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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구천(勾踐 : ? - 기원전 465), 월(越)왕 윤상(允常)의 아들이다. 즉위 후 오(吳)왕이 월나라를 침략하였다. 기원전 473년, 구천은 군대를 이끌고 북으로 회(淮)를 넘어 오나라를 공격하여 3년간의 격전 끝에 오왕 부차(夫差)가 죽고 오나라는 멸망하였다. 구천은 재위 32년에 죽었다.

 

월왕 구천이 ‘와신상담(臥薪嘗膽)’[섶에 눕고 쓸개를 씹다. 원수를 갚으려고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딤]했다는 얘기는 사람마다 다 알고 있는 사실이 되었다. 전해 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춘추시기 월나라는 오나라와 1차 전쟁에서 패하고 월왕 구천은 오나라 군대에 의해 회계산(會稽山)까지 쫓기자 어쩔 수 없이 오(吳)왕 부차(夫差)에게 굴욕적인 화친을 구걸했다. 이때부터 월나라는 오나라의 속국이 되어 오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구천은 오나라에 압송된 후 오왕 부친의 묘소 옆 석실에서 묘를 관리하고 말을 기르면서 살았다. 월왕 구천은 오나라 궁정에서 3년 간 노역을 하는 등 노예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갖은 능욕을 당했다. 그는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 겉으로 오왕에게 충성을 다하는 것처럼 하였다. 3년 후 오왕은 구천이 순종하는 것을 보고 그제야 월나라로 돌려보냈다. 구천은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고 복수하여 한을 풀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는 자신이 당한 치욕을 잊지 않고 자신의 투지를 북돋우기 위하여 자신의 침소에 쓴 쓸개를 매달아 놓고 앉으나 누우나 볼 수 있게 하였다. 물을 마시거나 식사를 할 때도 핥으면서 쓴 맛을 잊지 않았다. 잠자리에 들 때 그는 이불에도 눕지 않고 섶을 깔아 그 위에서 잠을 자면서 자신의 신체에 고통을 주었다. 구천의 정치력으로 10년 동안 생산을 증대시키며 힘을 축적했다. 그리고 10년 간 병사를 훈련시키며 월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후 마침내 오나라를 멸망시켰다.

 

 

이 ‘와신상담’ 이야기의 교육적 가치는 크다. 그런데 역사상 과연 이런 사실이 있었을까?

 

먼저 춘추시대 역사를 기록한 가장 오래된 역사서 『좌전』과 『국어』를 보자. 이 두 권의 역사서는 전국시대의 사람들이 춘추시대의 역사기록을 이용해 편찬해서 만든 춘추시기 사실들을 전문적으로 기술한 문헌으로 신뢰할만하다. 『좌전』에 ‘정공(定公)’과 ‘애공(哀公)’, 『국어』에 ‘오어(吳語)’와 ‘월어(越語)’로 나누어 월왕 구천의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와신상담에 대한 이야기가 없다. 서한(西漢)시대에 사마천의 『사기』에서야 비로소 월왕 구천이 “쓸개를 자리에 놓고 앉거나 누웠을 때는 올려다보고 음식을 먹을 때는 쓸개 맛을 보았다(置膽於坐,坐臥卽仰膽,飮食亦嘗膽)”라는 기록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월왕 구천이 ‘와신’했다는 기록은 없다. 사마천이 『사기』를 쓸 때 선진시기 고문서의 자료를 광범위하게 섭렵하였고 역사 유적과 민간 전설을 탐방하였다는 것은 역사학자들의 일반적인 평가다. 만약 ‘와신’의 이야기가 있었다면 굳이 빼버릴 이유는 없는 것이다.

 

동한(東漢)에 와서 원강(袁康), 오평(吳平)이 『월절서』를, 조엽(趙曄)이 『오월춘추』를 쓰면서 전문적으로 춘추시기 오월 양국의 역사를 기술하였다. 그런데 이 두 권은 선진 고적을 기초로 하였으나 소설가들의 괴탄(愧誕)을 섞어 놓아 그 신뢰도는 거의 반 토막이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두 권에도 구천이 “쓸개를 걸어 두고 출입하면서 핥았다”고 하였으나 역시 ‘와신’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당송(唐宋)시대에 이르러, 일부 저술에서 비로소 월왕 구천이 ‘침과상담(枕戈嘗膽)’했다는 말이 나온다. 곧 창을 베고 쓸개를 맛보았다는 말이다. 당나라 시인 두보(杜甫)의 「장유」라는 시에도 ‘침과억구천(枕戈憶句踐)’이라는 구절이 보인다. 북송의 학자 왕수(王洙)가 이 시를 주석하면서 월왕 구천은 “나갈 때는 쓸개를 맛보고 누울 때는 창을 베게로 삼았다”고 하였다. 남송초기 이강(李鋼)은 「의국시」소에서 구천이 “침과상담으로 그 뜻을 격려했다”고 하였다. 『논사사찰자』에서는 “구천은 침과상담하고 마침내 오나라에 갚아주었다”고 하였다. ‘과(戈)’는 고대의 병기다. 이를 보면 구천의 ‘와신상담’은 춘추에서 양한(兩漢)시대, 그리고 당송시대까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와신’과 ‘상담’의 두 단어를 연결시켜 성어로 사용한 것은 북송(北宋) 시대 소식(蘇軾)의 「의손권답조조서」가 처음이다. 소식은 손권이라는 인물에 대하여 존경해 마지않았다. 손권의 이름을 빌어 유희적으로 쓴 서신체 글이다. 즉 북송의 소식이 삼국시대의 손권이 조조에게 답신을 보내는데 그 서신중에 손권이 삼국 정립시기에 ‘와신상담’했다고 가설을 세운 것이다. 그 내용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즉 손권의 ‘와신상담’은 순전히 소식의 허구이고 설사 있었다고 하더라도 월왕 구천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러나 소식은 북송 후기의 문단의 영수로 반세기동안 이름을 떨친 대문호로 그 문장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그가 처음 만들어낸 ‘와신상담’은 널리 퍼지게 된다. 남송시기에 이르러, 증개(曾開), 진덕수(眞德秀)와 황진(黃震) 등은 남송의 반벽강산에 만족할 수 없어 자주 월왕 구천의 영웅적 이야기를 추억하며 구천이 ‘좌신상담(坐薪嘗曇)’ 또는 ‘와신상담’했다고 썼다. 이것은 구천을 끄집어내어 유약하고 무능한 남송의 황제들을 향해 하는 말이라 보면 된다. 이와는 반대로 적지 않은 학자들은 상반된 견해를 내놓았다. 남송(南宋)의 학자 여조겸(呂祖謙)은 『좌씨전설』에서, 오왕 부차가 ‘좌신상담’했다고 말했다.

 

명(明)나라 때에 와서 장부(張溥)는 『춘추열국전』을 쓰면서 “부차가 즉위하며 와신상담했다”고 썼다. 이후 청나라 때 역사학자인 마숙(馬驌)은 『좌전사위』와 『강사』를 편찬할 때, 여전히 ‘와신상담’의 일을 오왕 부차에게 연결시켰다. 하나의 성어를 각각 동시대에 서로 경쟁했던 상대에게 사용한 것이다. 이런 문자 유형의 대결은 역사상 보기 드문 일이다.

그러나 적지 않은 학자들은 ‘와신상담’의 일을 월왕 구천에게 부가하고자 했다. 청나라 초기 오승권(吳乘權)은 『강감역지록』을 편찬하면서 “구천반국(句踐反國),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 하였고 건륭(乾隆) 시기의 문학가인 채원방(蔡元放)은 『동주열국지』에서 “(월왕구천은) 섶을 쌓아놓고 잠을 잤고 침상과 요를 깔지 않았다. 그리고 쓸개를 앉고 자는 곳에 두고 식사를 하거나 기거함에 반드시 그 맛을 보았다.” 이렇게 월왕 구천의 ‘와신상담’이야기는 갈수록 널리 알려지고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은 ‘와신’의 기록이 송나라 때 가장 먼저 나타난데 대하여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들은 『오기춘추』에 월왕 구천이 ‘목와칙공지이료(目臥則攻之以蓼)’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바로 ‘와신’의 뜻이라는 것이다. ‘료(蓼)’라는 것은 청나라 마서진(馬瑞辰)이 ‘쓴 야채’라고 해석한 바 있다. 월왕 구천이 그때 밤낮으로 일하면서 눈이 피곤해서 잠을 자고 싶을 때[목와], 쓰고 맛이 없는 요채[요신]로 눈을 자극해서 잠을 쫓아냈다는 말이다. 이는 ‘상담’이란 미각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고 ‘와신’은 시각의 고통을 느끼는 것이라는 말이 된다. 그래서 ‘와신’을 단단한 섶 위에서 잔다고 말하는 것은 분명 후대의 오해라는 것이다.

 

한나라 때부터 기록되기 시작한 ‘상담’과 송나라 때 비로소 보이기 시작한 ‘와신’은 역사상 실제 있었던 일인가 아니면 잘못 전해진 것인가. 월왕 구천은 일찍이 ‘침과상담’하였는가, 아니면 ‘와신상담’하였는가? ‘와신’은 잠을 자고 싶을 때 ‘쓴 야채’로 눈을 자극하는 것인가, 아니면 딱딱한 장작더미에 누워서 근골을 자극하는 것인가. 이를 분명히 하는 것은 힘든 작업일 수밖에 없다.

‘와신상담’ 성어가 역대 유명 인사들에 의하여 각각 손권, 구천과 부차라는 서로 다른 세 인물에게 붙여졌지만 최종적으로 월왕 구천이 했다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이를 보면 자신이 찬양하고 싶은 인물에게 자의적으로 붙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실 ‘와신상담’의 성어가 확실한 역사적 전고가 있는지 어느 인물에게 발생한 것인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이미 보편적으로 한 사람, 한 국가가 실패에 낙담하지 않고 자기가 살고 있는 사회나 국가의 발전을 도모하며 자강불식하는 가치를 지니게 됐다는 점이다. <27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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