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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작업을 맡았다. 그가 번역.정리한 내용으로 <중국, 중국인> 새 연재를 시작한다./ 편집자 주

 

황제(黃帝)는 소전(少典)의 아들이다. 성은 공손(公孫)이요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사기史記』에 “태어나면서 신기하고 기이하였으며 재능과 지혜를 두루 갖췄다(生而神異,才智周遍)”라고 하였다. 오기(五氣)를 다스렸고, 만민을 어루만졌으며 사방을 헤아려 제후가 모두 귀속되었다고 한다.

 

황제(黃帝)는 하화(夏華)족의 시조로 존경을 받고 있다. 어디에 안장되었는지 지금까지도 확실한 답을 찾을 방법이 없는 천고의 수수께끼다.

 

황제의 전설은 이렇다.

 

상고시대 황제는 섬서(陝西) 북부의 황토고원 일대의 부락 수령이었다. 후에 부락민을 이끌고 하북(河北) 탁록(涿鹿)으로 이주하였다. 황제는 걸출한 재능을 지녔다. 농업과 잠업을 장려하였고 수레와 배, 병기를 만들었으며 문자, 음률, 의술, 산술을 발명하였다. 이렇듯 백성을 위해 많은 일들을 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존경하고 우러렀다. 황하 중하류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점차 주변 부락을 융합시켰고 기본적으로 중원을 통일하면서 하화(夏華)족을 이루어 현재 스스로 ‘중화(中華)민족’이라 부르는 중원 사람들의 생존의 초석을 다졌다. 그래서 하화족의 시조로 존경을 받는 것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황제는 100년간 재위하였고 110살에 죽자 섬서 황릉(黃陵)현 북교산(北橋山)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역사 전적이든 신화전설이든 황제와 관련된 기록은 수없이 많다. 곤륜산 위에 장엄하고 화려한 궁전이 있는데 황제의 인간세상의 제국의 수도로 놀며 즐기는 행궁이라 하였다. 황제는 오방 중 중앙의 대제다. 그를 보좌하는 신은 후토(后土)로 손에 줄을 잡고 사방팔방을 경영하였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황제는 네 얼굴을 가졌다고 한다. 동서남북 네 방향을 동시에 굽어보고 네 방향에서 발생하는 사건들을 신속히 처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이러한 신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중앙대제의 존위를 받을 수 있었고 언제나 사방에 왕림할 수 있었다. 각지를 다니면서 많은 전쟁을 치르고 혁혁한 무공을 세웠다. 전심전력으로 통치 의례를 세웠으며 사관을 창립하는 등 문화적 공로도 대단하다. 심지어 중국인이 사용하고 있는 문자도 최초로 그의 사관인 창힐(倉頡)이 발명했다고 전한다.

 

신화전설 중 황제가 모성(母性)을 가진 신이라고 하기도 한다. 『국어國語』에 보면 ‘성명만물(成命萬物)’ 즉 만물을 양성할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옛날 신화가 춘추시대 사람들의 사상적 영향을 받았음을 뜻한다. 황제에서 변한 동악대제(東嶽大帝)는 남성으로 보이지만 사실 많은 기록 속에서는 여인으로 나온다. 황제는 생식(生殖)을 주관한다. 동악대제는 바로 그(녀)의 화신이기에 생식을 할 수 있다. 남성의 형상이기에 어딘지 어색한 점이 있어 ‘벽하원군(碧霞元君)’이라는 여신을 따로 만들어 관장하기도 하는데 이 여신과 황제는 둘이면서 하나인 것이다.

황제릉과 관련하여 민간에서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온다 : 황제가 하루는 하남(河南)을 순시를 하고 있었다. 순식간에 맑은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지고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폭우가 쏟아져 내렸다. 황룡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면서 황제에게 말했다. “폐하의 사명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나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십시다.” 황제는 부득이하게 용의 등에 올랐다. 황룡이 교산(橋山) 위로 날아갈 때 황제는 백성을 그리워하여 황룡에게 내려가자고 하였다. 주위의 백성들이 황제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말을 듣고 끊임없이 몰려들어 황제를 둘러싸고서는 황제의 옷을 잡기도 하고 신발을 끌기도 하면서 간절하게 만류하였다.

 

 

그러나 황룡이 재촉하자 황제는 어쩔 수 없이 의관만을 남겨두고 못내 아쉬워하며 백성들과 이별을 하였다. 후에 사람들은 황제의 은덕을 깊이 새기기 위해 의관을 교산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황제릉의 의관총은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이후 역대 중원사람들은 황제릉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황제의 진위와 상관없이 상징적 의의를 중요시 한 것이라 하겠다.

 

자료를 보면 헌원황제의 묘는 한대에 처음 세워졌고 당대에 중건하였으며 송대부터 지금까지 여러 차례 개수하였다. 

제비청(祭碑廳)에는 역대, 특히 명청 이래 제왕들의 기문과 왕조마다 묘릉을 중수 및 보호했다는 비각이 보존돼 있다.  <중국, 중국인 10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국립 중국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신종문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는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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