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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19대 숙종 승하하자 박계곤 등 35인 명릉 능역 동참 ... 사연은?

제주인이 직접 왕릉 조성사업에까지 참가하며 추모를 한 조선조 왕이 있다. 

 

답은 숙종이다.

 

제주발전연구원 제주학연구센터의  '조선왕조실록' 제주관련 기사에 따르면 1720년 6월 숙종이 붕어하자 제주 백성들은 숙종임금의 은혜를 잊지 못해 박계곤(朴繼崑) 등 35명이 직접 숙종의 묘인 명릉(明陵 : 경기도 고양시)을 조성하는 능역(陵役)에 참가했다. 

 

조선 왕이 승하한 뒤 능역에 제주인이 직접 참가한 것은 이 기록이 유일하다.

 

심지어 박계곤 등 35인은 재궁(梓宮 : 임금의 관)을 모실 곳에 회(灰), 목화, 기름 등을 혼합해 다지는 힘든 작업을 직접 맡았다. 

 

또 박계곤은 숙종임금에 대한 추모가를 지어 제주시 도두리(현 도두동) 사람 남호현(南浩鉉)에게 능역 도중 부르도록 했다. 

 

이들이 직접 능역에 나선 이유는 무얼까? 사연은 이렇다. 

 

기록에 따르면 1711년(숙종 37년)부터 1715년(숙종 41년)까지 제주엔 흉년이 들었다. 특히 1711년 8월 집중강우로 인해 평지가 하천으로 탈바꿈했다. 조천읍 신촌리에는 민가 8호가 쓸려 내려갔다. 

 

1713년 가을에는 폭풍우, 해일이 겹쳐 민가가 무더기로 파괴되고 인명피해는 물론 마소 400여필이 폐사했다. 

 

당시 변시태(邊是泰) 목사가 조정에 보고하니 숙종은  "제주는 육지와 달라 여기서 쌀을 보내 주지 않으면 (백성들이) 살 수 없지 않겠는가"라며 "제주 백성도 나의 백성이다. 이들이 죽어 가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 조정에서 구제 방법을 궁리해 곡식을 계속 제주로 보내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숙종의 명에 따라 영남 해안가의 곡식 5000여석과 6조 중 호조의 소금 3000여석이 제주로 보내졌다.  

 

1714년(숙종 40년) 1월 숙종은 호남 비축미 3000여석을 재차 제주로 보냈다. 그해 2월에는 전주에서 쌀 7000여석을 보냈다. 

 

그해 봄부터 여름까지 전염병으로 제주백성 5000여명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숙종은 호남과 영남의 진휼 곡식 1만여석을 보내도록 지시했다.

 

숙종은 또 감진어사(監賑御史)를 제주로 파견해 제주민들이 조정으로 보내는 진상물과 환상곡을 줄이도록 지시했다. 

 

또 과거시험을 통해 제주출신의 인재 고만갑(高萬甲) 등 3인을 등용하기도 했다. 

 

숙종의 '제주사랑'은 여기까지가 아니다.

 

 


1716년(숙종 42년) 가을 흉년이 또 들었는데 1년이 지나서야 홍중주(洪重周) 제주목사가 상황을 보고하니 숙종은 "제주에 진휼 곡식을 아직도 보내지 않았단 말인가"라며 "불쌍한 섬 백성들이 장차 죽게 된다면 과인이 해마다 진휼한 뜻이 허사가 될 것이다. 그대들은 과인의 아픈 마음을 깨닫지 못하는구나. 각 도에 즉시 명령해 제주백성들을 급히 구제하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숙종의 명을 받은 비변사(備邊司)는 전라도와 경상도의 도사(都事 : 관리들에 대한 감찰을 맡은 종5품 벼슬)들을 독운관(督運官)으로 삼아 진휼곡식을 제주로 보냈다.

 

제주인 박계곤 등 35인은 "선대왕의 성덕을 머리 위에 얹고 싶었는데 뜻밖에 명릉(숙종의 릉)에서 일하게 됐다"며 "슬프다. 선대왕의 승하하심이여"라는 추모가를 불렀다.

 

이 소식을 접한 숙종 비 인원대비(仁元大妃)는 박계곤 등 35인에게 "선대왕(숙종)이 너희 섬 백성들을 지극히 걱정하시더니 너희들이 나라의 은혜를 잊지 않고 산과 바다를 건너와 능소에 나아가 일을 하기에 이르렀으니 가상하다"라며 피륙과 쌀 등을 상으로 하사했다.

 

숙종의 아들 조선 제21대 영조도 부왕을 본받아 1770년(영조 46년) 제주에 큰 흉년이 또 들자 곡식을 보내 구휼하도록 했다는 게 좌혜경 제주발전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의 설명이다.  [제이누리=강남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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