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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롤드 대주교가 본 맥그린치 신부(2)[연속 특별기획] 격동의 현장-남기고 싶은 이야기(제2화)
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17)
양영철  |  yongchul@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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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6.23  18:0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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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절 농부들이 수확을 하는 장면이다
일이 잘 되기 시작했다. 미 공군은 제주도(모슬포)에도 기지가 있었는데 미 공군 군목인 죠지(George B. Gerner, 군산미군공군기지 군목도 겸하고 있었음)는 제주도의 긴박한 필요성을 알고 가톨릭 병사들과 함께 십만 달러를 모금, 송금해 주었다. 그 결과 맥그린치 신부는 한림에 1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 고산에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 귀덕에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당을 지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가톨릭 신자가 3000명이 됐다.

당시 맥그린치는 미국 가톨릭 원조단체에 의해 지원된 음식과 옷을 주민들에게 무료로 나누어 주는 일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무상 원조방식에 대하여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농부와 어부, 공무원들과 함께 어떻게 하면 주민의 생활수준을 높일 것인가에 대하여 끊임없는 토론을 했다. 교사와 사업가들과 하던 토론도 줄곧 그 주제였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비관적이었다.

맥그린치는 그 시절 제주도민들에게 우선 필요한 것은 자본지원이 아니라 스스로 문제해결 능력과 그 방법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고향 아일랜드의 농업에 비해 이곳 주민들의 농사기술이 얼마나 떨어졌는가를 생각하면 안타까운 생각만 들었다. 예컨대 제주의 농부들은 화산으로 인해 모든 토지들이 극도로 산성화되었지만 이를 누그려 뜨릴 수 있는 석회를 뿌리지 않았다. 사실 석회는 주변에 산적해 있는 조개껍질을 부수기만 하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는데도 그랬다. 비료도 역시 주지 않았다. 결국 농사를 짓고, 목축을 해야 할 땅은 메말라 있었다.

감자도 아일랜드에서는 골을 파서 심는데, 여기서는 구멍을 파서 심기 때문에 비가 많이 내리면 구멍에 물이 차서 씨 감자가 흐물흐물 썩는다. 맥그린치는 "일이 너무나 막연하게 처리되고 있다. 나는 섬의 모든 농사법이 원시적이고 아직도 개발되지 않았다고 단언한다. 그 결과 사람들이 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그들은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힘들다. 같은 모습이 어업생활도 역시다."

맥그린치는 어느 날 아침 한림에서 그 당시의 차림새가 아닌 미국인을 만났다. 그와 인사를 나누고 보니 그는 퇴역한 육군 대령 찰스 앤더슨(Charles Anderson)이었다. 4H 클럽을 시찰하기 위해 제주도에 온 것이었다. 그는 2차 대전 후에 한국에 근무하면서 한국의 농사짓는 법을 개선하기 위하여 4-H클럽을 한국 젊은이들에게 보급한 사람이었다. 그는 해방 후 미군정 시절에 경기도에서 군정 책임자를 지냈다. 그 당시에 한국의 협동조합 농부들에게 상당량의 미국의 우수한 품종의 소, 돼지, 닭, 토끼 등을 분양해 주었다. 그런데 1950년 터진 6.25 전쟁이 그가 추진하던 4-H 보급을 막았다. 휴전 후 4-H 운동은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다.

   
▲ 1950년대 한림 풍경
그는 전역 후 세계 4-H 클럽협회 고문을 맡고 있다가 한미재단의 요청으로 다시 한국에 온 것이었다. 대령은 좋은 품종의 소, 돼지, 염소, 양 등을 가져오기 위해 일본과 미국을 부지런히 오가고 있었다. 대령은 한국 전체에 4-H 클럽이 조직 되었으나 지방의 헌신적인 지도자가 없어서 오랫동안 활성화되지 못하고 있었다고 안타까워했다. 앤더슨 대령은 헌신적인 지도자의 부족으로 제주도의 4-H클럽도 질이 저하되어 있고, 어떤 곳은 이미 없어져 버렸다고 말했다.

맥그린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한림에서 4-H가 필요한 운동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4-H운동에 헌신적인 열정을 쏟을 수 있다고 믿었다. 그는 앤더슨 대령에게 필요한 자료와 책을 부탁했고, 곧바로 대령이 준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읽어나갔다. 게다가 서울 근교의 활성화된 몇몇 클럽도 찾아갔다.

1958년 2월 그는 한 림에서 4-H클럽 운동을 시작하면서 4-H클럽 회원들에게 좋은 품종의 가축과 농작물 씨앗을 공급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씨앗과 가축들을 기간 내에 발육시키기 위해 경기도에서 사온 우수품종 돼지인 요오크셔 종자로 일을 벌였다. 그게 한림의 청소년들을 4-H클럽으로 자연스레 모이게 한 사연이다.

맥그린치는 "젊은이들이 그들의 암퇘지를 보고 기뻐했다. 그들은 돼지들을 목욕시키고, 우리를 청소하는 등 돼지을 돌보는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암퇘지들이 첫 새끼를 낳을 시기가 되자 우리는 매우 흥분했다. 우리는 돼지를 사육하는 방법을 4-H클럽에서 배운 회원들에게 실제로 실습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어린 새끼 돼지들을 분양하여 주었다. 나는 돼지를 분양받은 젊은이들이 그 돼지를 길러서 처음으로 새끼를 낳았을 때는 그 중 두 마리는 4-H 동물은행에 기부하게 하고, 그 기부한 새끼들은 다른 회원들에게 다시 분양하고, 이렇게 반복하다보면 커다란 마을 목장이 탄생할 것이라고 생각하며 계획을 세우고 추진해 나갔다.“

당시 대주교 하롤드 헨리는 맥그린치가 교회에서 떨어진 곳에 있는 조그만 땅을 사라고 자신이 준 돈으로 땅 대신 그 주민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돼지를 분양한 일에 대해서 무척 기뻤했다. 그 노력과 협력으로 인하여 돼지 사육은 번창했다. 여기에 힘입어 맥그린치는 닭과 양, 소 사육에 대한 준비도 시작했다.

몇 년이 흐른 뒤 아일랜드의 골롬반 신부들과 친구들이 보내준 돈으로 젊은 선교사 맥그린치는 한림 동쪽으로 갔다. 황량한 미국 서부의 목장을 떠올리며 1200에이커(약 147만평)의 땅을 샀다. 젊은 사제는 그것이 아일랜드의 서부를 연상시키기 때문에 매력적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 땅을 에이커당 2달러도 안 되는 돈으로 샀다. 쓸모 없이 버려진 땅이라는 게 당시 제주인들의 생각이었다. 맥그린치는 그 땅이 쓸모가 있다는 것을 농부들에게 증명해 보인다면 농부들도 자신의 땅이 쓸모 있다고 생각하고 개척해 나갈 것이라고 봤다.

   
▲ 당시 돼지 돈사
이러한 그의 열정이 유지된데는 두 가지의 도움이 있었다.

그 하나는 미국 가톨릭 후원회(Catholic Relief Services)의 지도자 몬시뇰 조오지 캐롤(George Caroll) 주교가 미국 공공법 480(PL 480)의 원조를 받아내 이시돌에 대규모 옥수수를 지원하기로 한 일이다. 당시 미국은 곡식의 대 풍년으로 인하여 팔지 못한 옥수수, 밀 등이 창고에 가득하였다. 이를 원조물로 전환, 후진국에 현물(곡물)로 지원하는 정책이 공공법 480이다. 이 원조에 의하여 창고에서 썩어버릴 그 옥수수는 이시돌에 지원되어 축산업을 크게 번창시킨 것이다.

두 번째 도움은 미 공군 하사관이 돼지농장을 방문하고서 돼지 우리가 부족한 것을 알고 조립식 건물을 짓기 위해 사용되었던 원형의 강철 틀과 철도를 건설하는데 사용된 강철판금 한 트럭 분량을 건네준 것이다. 그들은 그걸로 여러 개의 돼지 우리를 만들어 주었다.

맥그린치는 병 든 돼지에게 시간과 정력을 쏟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처음부터 면역에 강한 순종을 구입, 일을 하고자 했다. 바로 그때 그는 독일 주교회의 산하 국제원조단체인 미세레오르(Misereor)로부터 지원 확정통지를 받았다. 그는 그 돈으로 푸록스(Puros), 체스터 화이트(Chester White) 등 품종 좋은 순종을 샀다. 그는 원조해주 준 미세레오르(Misereor) 책임자와 담당자들에게 이번 원조가 더 많은 농부들을 자립할 수 있도록 하는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겠다고 약속했다.

그 구조단체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5년 동안 ‘미국 평화를 위한 음식’ 프로그램을 통해 4만1천톤의 곡식을 모아 지원해 주었다. 그 원조물은 옥수수를 잘게 간 것과 비타민을 강화한 것 등이다. 균형 잡힌 식단을 위해 필요한 다른 곡물들을 개척농가에 참여하는 농부들에게 싸게 팔았다. 이 수익금으로 24에이커(2만9380평)의 농장을 확보하는데 썼다. 이렇게 개척농장을 만들어 갔는데 1976년까지 300개 개척농장이 만들어졌다. 분양받은 농가는 외상으로 땅과 소를 분양받되 장기저리로 갚아가도록 하였다.

그 자금을 받은 농부인 김베드로의 경우다. 김베드로는 빈터 오두막에서 그의 아내와 4명의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의 수입은 1년에 고작 50달러였다. 처음 1년동안 그의 농장에서 6에이커의 땅을 개간하여 고구마를 심고, 돼지를 키웠다. 그 해에 그의 수입은 1205 달러였다. 그는 헨리 대주교에게 다음 해에는 그 땅의 절반으로, 그의 수입을 두 배로 올릴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활짝 웃으며, “나는 이제 내 딸을 대학에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고 말했다.

이 시기에 독일의 미세레오르(Misereor), 영국의 고르타, 뉴질랜드의 코르소(Corso) 등의 구호단체에서 원조가 왔다. 이 원조는 4-H클럽 청소년들의 사기를 끌어 올렸고, 1976년부터 이시돌 농장에서는 해마다 1만5000마리 이상의 돼지를 생산하게 되었다. <번역=양영철/ 18편으로 이어집니다>
 

   
▲ 하롤드 헨리 대주교
하롤드 헨리(Henry, W. Harold; 1909∼1976) 대주교

=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선교사, 대주교. 제5대 광주(光州) 대교구장, 초대 제주(濟州)교구장. 한국명은 현해(玄海). 미국 미네소타주 노드필드(North Field)에서 출생. 미국에서 골룸바노 신학교와 밀턴대학을 졸업한 뒤 1932년 사제서품을 받고 중국의 선교사로 임명되어 중국으로 가던 도중 포교지가 한국으로 바뀌어 1933년 10월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6개월 동안 한국어와 한국풍속을 익히고 1934년 전남 노안본당 보좌신부, 1935년 전남 나주본당 주임신부를 역임했고, 1941년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일제(日帝)당국에 체포되어 8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강제 추방된 뒤 1943년 미(美) 육군에 입대, 유럽에서 군종신부로 사목하였다. 1945년 군에서 제대하고 1947년 한국에 재입국, 광주교구 경리부장을 거쳐 1950년 6.25동란으로 광주교구장 브레난(Brennan) 몬시뇰이 북한공산군에게 납치되자 광주교구장서리 겸 성 골룸바노 외방전교회 광주지부장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1954년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5월 11일 주교로 성성(成聖)되었다. 그 뒤 1962년 3월 한국 교회의 교계제도가 확립되어 서울 · 광주 · 대구 등 3교구가 대교구로 승격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되었고 1971년 제주교구의 창설과 함께 초대 제주 교구장으로 전임되어 사망할 때까지 제주교구의 교세 신장에 힘쓰는 한편 광주교구장 시절부터 힘써 온 교육 · 의료 · 사회개발 분야에 걸친 사회사업운동을 전개하였다. 1976년 3월 1일 심장마비로 사망, 유해는 제주도의 첫 순교자들이 묻힌 황사평(黃沙坪)에 안장되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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