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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기성의 날씨이야기(8) ...얼어붙은 강, 추위에 강했던 그들

 

내몽골을 통일한 후금(後金)의 태종은 나라 이름을 ‘청(淸)’으로 바꾸면서 자신을 황제로 칭한다. 그는 1636년 사신 용골대(龍骨大)를 조선에 보내 군신관계를 맺고 명나라와 관계를 끊을 것을 요구했다. 국제정세에 무지하고 명에 대한 사대사상에 사로잡힌 조선의 왕 인조는 용골대를 상대조차 하지 않았다. 용골대는 서울을 떠나면서 객사의 벽 위에 ‘청(靑)’자 한 글자를 써놓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청(靑)자는 십(十)+이월(二月)이 되며 이것은 12월 압록강에 얼음이 얼 때 조선을 쳐들어올 것이라는 예고한 것이며 전쟁 시기를 자신들에게 가장 유리한 날씨조건에 맞춘 것이라고 말한다. 내몽골을 통일한 후금의 병력은 아시아에서 가장 추위에 적응이 잘 된 군사들이었기에 이런 해석이 나온 것이 아니었을까.

조선의 왕이 사신을 만나주지도 않았다는 보고를 받고 격노한 청 태종 홍타이지는 1637년 1월 직접 20만 대군을 이끌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넜다. 본래 이들은 만주 북부와 몽골 지방에 살던 기마 민족으로 겨울에는 -40℃까지 떨어지는 혹한과 살을 에는 강한 바람에 단련된 민족이었다. 그들은 용골대가 예고한 것처럼 가장 추운 1월에 침공을 단행했다.

조선에서는 청나라의 실력을 우습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혹 그들이 쳐들어오더라도 명나라가 구원해 줄 것이며 또 조선의 가장 유능한 맹장인 임경업 장군이 백마산성을 지키므로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러나 전략과 전술도 청나라가 한발 앞서 있었다. 1636년(인조 14년) 음력 12월 6일 의주 용골산에서 봉화가 올랐다. 청나라의 침공 소식을 전한 것이다. 기마병을 필두로 한 병력 12만명 이상의 대군이 압록강을 건넜다. 이들은 한양에서 강화도로 가는 길목부터 차단했는데 인조가 강화도로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10년 전 정묘호란 때 조정이 강화도로 피난 갔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놀란 조정에서는 왕자와 비빈, 남녀 귀족들을 급히 강화도로 피난시키고 난 다음 인조도 뒤따라가려 했지만 이미 강화도로 가는 길은 막혀 있었다. 겨우 남한산성으로 피했던 인조는 그곳에서 8도에 근왕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보내고 명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남한산성에 갇혀있는 왕을 구하고자 도처에서 일어난 구원군마저 청군에 의해 격파됐다.

남한산성 안에 있는 1만 3000명은 18배에 달하는 청나라 병력에 포위되어 버렸다. 청나라는 남한산성을 고립시키기 위해 참호를 파고 목책을 설치했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그해 정월에 큰 눈과 맹추위로 모든 강이 얼어붙었다. 제대로 된 장비와 무기, 갑옷이 없었던 조선의 근왕병들은 청나라 군사에 아예 상대가 되지 못했다.

한편 조선군에게 심각한 문제는 청나라 공격보다 식량난이었다. 창고에 있는 쌀과 잡곡이 겨우 1만 6000여 석 밖에 되지 않았다. 1만 명의 군사가 한 달을 겨우 버틸 적은 양이었다. 추위도 큰 문제였다. 동상에 걸린 병사가 속출했고 심지어 활사위를 당기지 못할 만큼 손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병사도 부지기수였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행랑과 옥사를 허물어 불을 피웠으며 포위된 지 45일이 지나자 식량은 떨어졌다. 유달리 눈이 많고 추웠던 그해 겨울 혹한이 기승을 부렸다. 성안에서는 죽을 때까지 싸워야 한다는 '척화파'와 항복하고 미래를 바라보자는 ‘화친파’가 대립했다.

 

이들 사이에서 더 싸워야 할지 항복해야 할지 결단하지 못하던 인조에게 비보가 들려왔다. 강화도가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은 인조는 결국 항복을 결정한다. 1637년 정월 30일 인조는 성문을 열고 왕세자와 함께 삼전도에 나가 수항단에서 청 태종을 향해 삼궤구도두(三跪九叩頭·세 번 절을 하는데 절을 한번 씩 할 때마다 이마가 땅에 닿도록 세 번 머리를 조아려야 하는 의식)의 항복을 하게 된다.

 

한국 역사상 가장 많은 부녀자가 욕을 당하고 또 고아들이 많이 나온 것이 바로 ‘병자호란’이다. 조선시대 민간인이 가장 큰 피해를 당하고 수십만 명이 포로로 잡혀간 치욕적인 전쟁이었던 반면 청나라에게는 외국과의 전쟁에서 가장 적은 희생으로 큰 승리를 거둔 것으로 남았다.

청나라가 이렇게 쾌승을 하게 된 배경은 명나라가 겨울에는 조선을 돕기 위해 출병하기 어렵다는 점, 모든 강이 얼어붙어 공격하기 쉽다는 점, 청나라 병사들이 다른 나라의 군사와 달리 추위에 적응을 잘하며 놀라운 전투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철저하게 날씨를 전쟁에 이용한 청나라의 전략이 돋보이는 전쟁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그해 겨울이 별로 춥지 않아 강이 얼지 않았거나 눈이 덜 내려 근왕병들이 더 많이 전투에 참여했거나, 명나라의 구원병이 참전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반기성은?

 

=충북 충주출생. 연세대 천문기상학과를 나와 공군 기상장교로 입대, 30년간 기상예보장교 생활을 했다. 군기상부대인 공군73기상전대장을 역임하고 공군 예비역대령으로 전역했다. ‘야전 기상의 전설’로 불릴 정도로 기상예보에 탁월한 독보적 존재였다. 한국기상학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군에서 전역 후 연세대 지구환경연구소 전문위원을 맡아 연세대 대기과학과에서 항공기상학, 대기분석학 등을 가르치고 있다. 기상종합솔루션회사인 케이웨더에서 예보센터장, 기상사업본부장, 기후산업연구소장 등도 맡아 일하고 있다. 국방부 기후연구위원, 기상청 정책자문위원과 삼성경제연구소, 조선일보, 국방일보, 스포츠서울 및 제이누리의 날씨 전문위원이다. 기상예보발전에 기여한 공으로 대통령표창,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날씨를 바꾼 어메이징 세계사>외 1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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