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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회] 바다 건너 항쟁에 달려간 우도해녀 ... 하도.우도 지역민이 사립초교 설립

 

바로 그때 바다를 건너 온 우도해녀 300여 명과 성산읍 시흥리의 해녀들이 만세를 외치며 합세하였다. 이에 힘입어 주재소 안에 들어선 20명의 해녀대표가 다구치 도사와 협상하여, 지정판매 절대 반대·조합재정 공개 등 8개의 합의사항이 발표되었다.

 

해녀들은 도사의 약속을 재차 확약 받고 자진해산했다. 그러나 도사는 형사들에게 해녀의 배후를 체포하도록 명했다. 해녀항일운동의 배후가 하도리 야학당과 우도 영명의숙의 청년교사들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경찰은, 제주 전 지역에 비상경계령을 발표했다.

 

결국 세화리의 문도배와 김시곤, 종달리의 한양택과 한원택, 우도의 신재홍과 강관 순, 하도리의 오문규 등 수십 명이 체포되었다. 그러나 그들을 호송 하던 차를 1500여 해녀들이 막아섰다.

 

돌과 빗창으로 자동차를 막아선 해녀들은 체포된 청년교사들을 탈출시키기에 이르렀다. 경찰에서는 무장경관들을 편성하여 현장에 급파시키나, 이웃 마을 해녀들도 속속 모여들어 세화리는 전시상태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이에 놀란 경찰은 해녀를 설득하는 척하면서 몰래 해녀들의 옷에 도장을 찍었다. 다음 날 옷에 도장이 찍힌 해녀 100여 명이 체포되어 세화 주재소 철창 안에 다시 수감되었다.

 

1월 24일, 호미와 빗창으로 무장한 500명의 해녀들이 세화리 경찰 주재소에 전날 수감된 100여 명의 해녀들을 탈출시키고, 대신 주재소 급습작전을 지위한 부춘화 해녀 등 34명이 현장에서 체포돼 수감되었다.

 

1월 26일, 수감된 해녀들을 구출한 청년교사들과 해녀대표들이 우도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우도로 간 경찰에 의해 40여 명의 청년교사와 해녀대표들이 체포되었다. 이들을 구하기 위해 우도해녀 800여 명이 체포된 이들을 싣고 떠나려는 배에 달라붙어 경관의 옷자락을 잡고 늘어지자, 경관들은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결국 배를 놓친 해녀들은 서둘러 풍선을 바다에 띄워 일본경관의 배를 뒤쫓아갔으나 역부족이었다. 당시 해녀들의 배는 엔진으로 가는 발동선이 아닌 바람으로 가는 풍선이었다.

 

해녀항일운동은 청년교사들이 주도하는 야학당을 중심으로 일어났고, 야학당에서의 훈학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 우도와 하도리였다. 해녀항일운동에서 해녀의 대표였던 부춘화, 김옥련, 부덕량 등은 하도리 야학당 1회 졸업생으로서 문무현, 부대현, 김태륜 등 청년 지식인 교사들에게서 민족교육을 받았다.

 

강관순, 신재홍, 김성오는 우도의 영명의숙 교사였다. 결국 이들 모두에게 해녀항일운동의 배후세력, 치안유지법 위반, 가택침입, 보안법 위반, 협박, 폭력행위 등으로 형이 언도되기도 했었다.

 

우도의 300여 명의 해녀들은 세화리 장터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5일간의 양식을 준비하고, 호미와 빗창을 들고 10대의 풍선에 나누어 타고 바다를 건넜다고 한다. 우도출신 강관순은 감옥에서 해녀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기 위해 해녀가를 지어, 면회 온 지인에게 몰래 전해주었다.

 

강관순이 작사하고 행진곡조로 불려진 ‘제주도해녀의 노래’는 당시 우도를 비롯한 제주도 전역과 타 지방에 출타한 해녀들에 의해서 널리 애창되기도 했다. 다음은 강관순이 지은 해녀의 노래 가사이다.

 

1절 우리는 제주도의 가이없는 해녀들 / 불쌍한 살림살이 세상도안다. / 
     추운 날 더운 날 비가 오는 날에도 / 저 바다 물결 위해 시달리는 몸

 

2절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황혼 되면 돌아와 / 우는 아이 젖먹이며 저녁밥 짓는다. /
     하루 종일 헤엄치나 번 것은 기막혀 / 살자하니 한숨으로 잠 못 이룬다.

 

3절 이른 봄 고향산천 부모형제 이별하고 / 온 가족 생명줄을 등에 다 지어 /
      파도 세고 무서운 저 바다를 건너서 / 각처 조선 대마도로 돈벌이 간다.

 

4절 배움 없는 우리 해녀 가는 곳마다 / 저 몸들은 착취기관 설치 해 놓고 /
     우리들의 피와 땀을 착취하도다. / 가없는 우리 해녀 어데로 갈까.

 

당시 야학당 훈학활동이 활발한 우도와 하도리의 공통점은, 배움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지원이 있었던 마을이란 점이다. 1면1교제가 상징하듯 일제 강점기의 교육정책은 우민화 정책이었다.

 

이에 교육만이 구국의 길임을 마을공동체가 앞장서 실천하려 하도는 1923년, 우도는 1936년에 지역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지원금을 마련하여 사립으로 초등학교를 설립한 대표적인 마을들이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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