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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은 왜 유소기를 죽였는가?(5)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0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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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10.10  09: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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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면, 사회주의 교육운동의 목적은 교육에 있었다. 교육을 통하여 단결할 수 있도록 만들면 되었다. 교육을 통하여 군중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 변질을 막고 특권을 일소하며 적들을 타도해 ‘방수(防修, 수정주의 방어)’의 목적을 달성하면 되었다.

유소기는 간부들에게 “모두 올라가 개개인이 전부 목욕하도록” 요구하였다. 매 사람마다 관문을 통과하고 엄격하게 비판하며 통렬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군중을 충분히 동원해 “뿌리 깊고 서로 연계된” 이들로 하여금 “철저하게 비판해 폭로하게 만들도록” 하였다.

유소기는 다음 같이 줄곧 주장하였다. “인민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은 반드시 새로운 방법, 새로운 방침, 새로운 노선을 이용하여야 한다. 군중이 소민주(小民主) 방법을 채용해 해결하여야 하는 문제를 해결하도록 반드시 허용하여야 한다. 소민주를 허용하지 않고, 소민주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대세는 분명 대민주로 가게 될 것이다.” 그는 진리와 법률 앞에 모든 사람이 평등하여야 한다고 제창한다. 이것이 바로 법치사회를 건설하는 데에 없어서는 안 되는 조건이고 민주를 충분히 발양할 수 있는 것이며 무정부주의를 방지하는 근본이라 하였다.

유소기가 주창하는 사회교육운동은 위세가 드높았다. 높은 수준을 요구하였다. 해결하여야 하는 문제는 주로 인민 내부 모순이었다. 타도의 대상은 봉건주의와 관료주의분자였다. 반대하여야 하는 것은 등급분화와 권력이화였다. 더 확대한다하여도 단지 광범위한 교육운동이었을 따름이었다. ‘소민주’를 통하여 군중과 간부가 서로 교육하고 자아 교육을 실행하는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유소기도 모택동의 “뿌리는 위에 있다”는 지시를 따르기는 했으나 공사와 현(縣)급에 국한하였을 뿐이었다. 동시에 모순을 윗선으로 넘기지 않도록 강조하였다. 모든 모순은 현지에서 처리하도록 하였다. 나누어 해결하도록 하였다. 모순의 하방(下放)이라 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서 한계선이 없이 “위 뿌리”까지 쫓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도 “3분의 1의 정권은 우리들 손에 없다”는 모택동의 직언을 견지했지만 적의 손아귀에 있다는 뜻이라고 보지는 않았다. 유소기는 당성(黨性)에서 출발한다고 보았다.

유소기는 반복해서 강조한다 : 공산당은 무산계급 정당이다. 근본 종지는 노동 인민을 위한 이익추구다. 노동자 농민의 뜻에 복종하지 않고, 심지어 민의를 위배하고 민중을 핍박하기도 한다. 요 몇 년 사이 군중에게 손해 끼치는 일을 하고 있는데 어찌 공산당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런 정권은 인민의 정권이 아니다! 분명 정권의 종지와 부합되지 않거나 위배되는 것을 의미한다.

모택동은 명성과 위세를 드높이는 운동 방식을 “완전 찬성”한다. 그리고 “신속하게 진행”하도록 요구한다. 1964년 9월, 중공 중앙은 정식으로 ‘후십조(後十條)’를 반포한다. 모택동은 높은 평가를 내리면서 군중들에게 교육해 결과를 토출하도록 반복적으로 얘기하였다. 왕광미가 다시 현장으로 나가도록 장려하였고 자신의 비서 임극(林克)과 호위병을 같은 팀으로 보내어 함께 가도록 하였다.

   
 

1964년 11월, 왕광미는 제2차 농촌활동을 떠난다. 하북 신성(新城)현 고진(高鎭)대대로 갔다. ‘후십조’는 “모든 운동을 공작대가 영도”하도록 규정하였다. 기층 간부들 거의 모두 옆으로 비켜 서 있었다. “대추가 있든 없든 세 번은 쳐봐야 한다”고 하였다. 타격하는 면이 너무 넓었다.

“대추가 있든 없든 세 번은 쳐봐야 한다”는 말은 속담이다. 원래 추수 때 대추를 수확한 농사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대추를 수확하면서 대추가 달린 가지를 때리는데 대추가 없는 가지도 한두 번은 때려준다. 그러면 다음해에 그 가지에도 열매가 많이 열리기 때문이다. 요컨대 대추가 있든 없든 한두 번은 때려주어야 나중에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것이 일이 있든 없든 정리하여야한다는 의미로 굳어졌다. 이 말은 ‘반우(反右)’ 투쟁과 문화대혁명 시기에 풍미한다. 원래는 ‘한 차례’였는데 ‘세 차례’로 바꾼 것으로 더 엄격하게 하여야한다는 말로 썼다. 물론 결과는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됐지만. 원래 아무 일도 없는 분야를 “대대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원칙을 바탕으로 일을 처리하면서 경제기초가 대대적으로 무너지게 된다.

그렇게 이것저것 다 의심하기 시작하니 초목개병인 셈이 되었다. 민심이 흉흉해졌다. 때마침 안자문(安子文)도 산서에서 돌아와 보고하면서 공작대에 “홍동(洪洞)현에 괜찮은 사람이 한 명도 없다”고 보는 경향을 비판하였다.

유소기는 즉각 전국에 간부와 군중 대다수를 반드시 믿어야 한다고 지시를 내렸다. 중공 중앙 화북국(華北局)은 바로 왕광미에게 통지하였고, 왕광미는 인민대회당에서 각 성의 책임자들에게 ‘좌(左)’를 규정하도록 해 대다수의 행태를 교정하도록 하였다.

‘후십조’를 집행하면서 노출된 문제, 즉 내부 모순을 반영하고 있다 : 적들의 “반혁명의 양면 정권을 건립”하려고 한다는 것을 적시하는 한편, “성실하게 민주혁명의 보충 작업을 진행하여야”한다고 제기하고 있다. 전자는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는 것으로 권력을 빼앗아오면 되었고, 후자는 인민 내부의 모순을 해결하는 것으로 교육하면 되었다.

운동이 시작될 때는 모택동과 유소기의 의견이 거의 일치했었다. 같은 목표, 같은 의욕, 같은 감정을 기반으로 하였다. 운동 중기에 이르렀을 때 묵계적으로 서로 호응하였다. 서로 무척 만족한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잠재된 모순(갈등)이 마침내 표면화된다.

   
 

어쩌면 처음에는 모택동과 유소기 자신들조차도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엇갈릴 줄을 몰랐을 지도 모른다. ‘23조’를 제정할 때 하룻밤사이에 갑자기 폭발한다.

1964년 12월 12일에서 1965년 1월 14일 사이, 한 달 동안 전국 공작회의가 열렸다. 박일파(薄一波)는 회고록에 그때 회의의 내용을 무척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 회고록은 유소기가 아들 유원에게 간략하게 설명한 내용과 ‘문혁’후 안자문이 유원에게 자신의 기억을 세 차례 서술한 내용을 근거로 하고 있다.

모택동이 말했다. “지주 부농은 후대(後臺)주인(배후 조종 세력)이고 전대(前臺)에는 ‘사불청(四不淸)’ 간부들이 있소. ‘사불청’ 간부는 당권파(當權派)요. 당신이 단지 지주와 부농만 처리한다면 가난한 하층 중농은 여전히 통과하지 못할 게요. 절박한 것은 간부요. 그들은 군중을 동원해 우리 당을 정리하려 하고 있소.”

그렇게 그날 이후 여러 날 동안 모택동은 회의석상에서나 개인적인 자리에서 유소기에게 강한 불만을 토로하였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모택동은 적대적 모순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중점은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를 정리하여야한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불청’ 간부는 모두 적대적 모순의 처리 대상이 되는 것! 유소기는 그 점에 동의하지 않았다. 진정시키며 말했다. “‘사청(四淸)운동’은 여러 가지 모순이 교차해 발생하는 것으로 무척 복잡하오. 역시 모든 것을 실제에서 출발해, 모순이 발생하면 그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모든 것을 적대적 모순으로 봐서는 안 되지 않겠소?”

모택동은 흥분해 말했다. “우리 이 운동은 사회주의교육운동이오. 무슨 ‘사청’, ‘사불청’운동이 아니란 말이오. 무슨 여러 가지 모순이 교차된 운동? 어디 그리 많은 게 교차되오? 이른바 ‘사청’, ‘사불청’은 어떤 사회에서도 모두 정리가 되어야 하오 ; 당 내외 모순이 교차되는 것은 어떤 당에서나 생길 수 있소. 모순의 성질을 설명하지 못하잖소! 다른 무슨 주의 교육이 아니라 사회주의교육운동이잖소. 중점은 당내에 자본주의노선을 걷는 당권파란 말이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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