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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연가] 박선후 제주4.3 70주년범국민위 홍보기획위원장
서울서 성공한 디자이너 ... '4.3은 대한민국 역사입니다'

 

1986년 갓 스물의 나이로 제주를 떠났다. 그리고 서울에서 보낸 시간이 벌써 32년이다. 

 

나름 성공했다. 디자이너로서 성공가도를 달렸다. 공공디자이너로서 서울시내 곳곳에 그의 이름이 박힌 작품들이 널려 있다. 

 

도시에서 성공했지만 무언가 무겁게 짓누르는 것이 있었다. ‘사람’이었다. 

 

“디자인은 사람을 얼마나 이해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디자인은 결국 사람을 이해하고 상호간에 대화를 하기 위한 것이죠.” 

 

사람을 이해하기 위한 디자인, 대화를 위한 디자인을 바라는 마음이 그의 마음을 다시 고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그 마음이 고향에서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는 '4.3'을 바라보게 했다. 

 

그는 이제 4.3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말하게 하고자 한다. 대화의 주제로 삼고자 한다.

 

‘제주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

 

올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그 메시지는 바로 그런 생각을 하던 중 나온 영화감독 오멸씨의 제안에서 나온 카피를 재생산한 결과다.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 홍보기획위원장 박선후(51).

 

그는 이렇게 4.3을 제주 밖으로 꺼내 ‘대한민국의 역사’로 만들려 한다. 

 

◻ 역사학도를 꿈꾸던 학생에서 디자이너로, 디자이너를 넘어 4.3으로

 

학창시절, 처음에는 역사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공부는 곧잘 해왔기에 사학과를 가려고 했다. 하지만 주변에서 그에게 걷네는 말들은 달랐다. “미술에 재능이 있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도 미술 선생님이 미술쪽으로 진학하는 것을 추천해줄 정도였다. 미술이라면 평소에 관심도 많았다. “역사를 공부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보다는 조금 더 다이나믹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도 크게 작용했다. 그는 결국 친구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미술을 하는 학생이 됐다. 그 중에서도 그는 디자인을 택했다. 

 

“디자인은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이 조화를 이루는 측면이 있다고 봤습니다. 디자인은 기본적으로 세상과 소통을 하기 위한 것이에요. 그래서 더 흥미가 갔죠”

 

그렇게 그는 서울대 산업디자인과로 진학을 했다. 제주도에서 디자인 계통으로 서울대를 진학한 1호 학생이었다. 미술계통에서도 강요배 화백, 중앙대 이기조 교수의 뒤를 이어 서울대를 진학한 제주출신 3호 학생이었다. 

 

서울대에서의 생활은 무난했다. 무난하다 못해 교수들이 더 공부를 해 교수직까지 해보라고 권할 정도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현장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학생을 가르칠 수 있겠나”라는 생각이 강했다. 그는 사회로 나가 ‘실질적인 현장경험’을 해보고 싶었다. 

 

처음에는 취업을 할까 고민을 했다. “하지만 남들이 하던 것과 달리, 저는 조금 더 ‘객기’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는 말했다. 그 객기를 발판삼아 그는 자신만의 디자인전문 회사를 차렸다. 

 

 

“초반에 일은 잘 풀렸습니다. 삼성과 LG, 현대 등 국내 대기업의 일들을 해왔죠. 좋은 평가도 받고 회사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얻었습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 안에 불편이 자라났다. “디자인이라는 게 결국은 상품을 잘 팔리게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저는 계속해서 우리 사회내에서 자본주의를 더욱 강화하는, 소비를 촉진하는 디자인을 해왔죠. 그게 불편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돈을 잘 버는 기업에게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게 해주는 것, 그것이 과연 의미 있는 삶인가? 그 불편한 마음은 결국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생각해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줬습니다.”

 

그는 시선을 공공디자인으로 돌렸다. 특히 서울시 공공디자인을 도맡아 하기 시작했다.

 

10여년 전 버스가 다니기도 불편했던 서울시 삼청동의 도시재생 사업을 기획하기도 했다. 많은 작가들과 함께 많은 곳에 예술작품을 설치했다. 파출소 옆에는 그네도 설치했다. “사람들에게 파출소가 더욱 친근하게 다가올 수 있었죠.”

 

이렇게 사업은 잘 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삼청동 도시 재생, 이게 성공을 했죠. 이후 재생사업이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기 시작했죠. 땅투기가 일어나고 기존의 사람들은 쫓겨났습니다. 화장품 가게와 카페들만 잘되면서 삶의 순환적인 구조가 깨지기 시작했죠.”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둥지내몰림)의 대두다. 

 

“도시의 주인은 사람입니다. 도시의 모든 시설도 사람의 배경으로만 역할을 해야죠. 하지만 사람보다 거대해지고 압박을 하기 시작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사람’이 중심이어야 했다. 결국 그가 원했던 디자인은 ‘사람’을 중심에 놓고 어떻게 소통을 해야하는가를 고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회사 설립 초반 기업의 일을 도맡아하면서도, 이후 공공디자인의 과정에서도 ‘사람’은 결국 밀려났다. 

 

그러던 와중에 그는 4.3을 만났다. “30년간 서울에서 살며 고향을 떠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고향에 대한 관심이 큰 건 당연한 것이었죠.”

 

70주년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봤다. 70주년, 4.3을 직접 경험한 세대와 그것을 부모로부터 전해들은 세대, 아무것도 경험하지 못한 세대까지 포괄적으로 엉켜 있는 유일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10년 뒤에는 경험세대가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 후 다른 일들은 모두 접었다. 4.3에 모든 것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 박선후, 그가 바라보는 4.3의 전국화는?

 

그는 4.3 70주년 범국민위원회에서 일하기 시작하면서 4.3이 제주를 벗어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4.3은 제주 안에 고립된 문제가 아닙니다. 제가 바라보는 4.3은 인권 및 법치와 관련된 중요한 이슈에요. 4.3이 일어났을 당시는 국가가 완전하게 성립되지 않은 시기입니다. 그 당시 권력 및 무력을 위임받은 집단에 의해 시민이 학살을 당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단순히 제주가 억울한 일이 아니에요.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거죠.”

 

4.3을 제주 밖으로 나오게 만들어야 했다. 이를 위해 다른 지역 사람들에게 4.3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봐야 했다. 무엇보다 ‘과연 제주가 대한민국의 역사였는가?’를 물어보고 싶었다.

 

그 의문이 결국 ‘4.3은 대한민국 역사입니다’라는 카피로 등장했다. 

 

하지만 슬로건이 만들어졌다고 단숨에 사람들의 뇌리에 박히는 것은 아니었다. ‘소통’이 필요했다. 그가 디자인을 하며 줄곧 뇌리에 꽂아두던 '신념'이다. 그 신념이 4.3으로도 이어졌다. 입에서 입으로 회자되게 만든 것이다. 

 

 

“4.3의 전국화가 목표였습니다. 이를 위해 17개 시・도 광역자치단체장의 목소리를 다 딴다, 이것을 이뤄야 했죠. 그들이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4.3은 전국화가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결국 그 시・도의 대표자니까요. 또 이들만이 아니라 나름 유명인사라고 생각되는 분들의 참여도 이끌어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를 담아 사람들에게 들려줬죠.”

 

소설가 조정래, 영화배우 김혜수, 안성기, 문소리의 영상과 음성이 그에게 화답했다. 물론 대구와 경북, 부산, 인천, 충남 등 7개 시도를 제외한 10개 시・도지사의 목소리도 담아냈다. 안희정 당시 충남지사의 등판도 예정됐지만 불의(?)의 뉴스주인공이 된 일이 그를 만나기 하루 전 일이 돼 버려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릴레이 캠패인은 예산 문제가 아직 남았지만 연내 100명을 채우는 게 목표다. 물론 아직 등장하지 못한 나머지 시・도시자 모두 섭외대상이다.

 

캠페인이 어느 만큼 진행되자 전국 시.도교육감의 연락도 빗발쳤다. "왜 우리는 끼워주지 않는냐"는 것이었다. 고마움이다. 결국 4.3이 '교육 안'으로 들어가야 하기에 그렇다. 

 

“4.3은 역사교육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학교 현장에서 가르쳐야 할 역사에요. 이게 전국화의 핵심입니다.”

 

'4.3의 전국화'는 이렇게 그와 그의 동지들의 노력으로 한발자국 한발자국 전진하고 있다.

 

“이번 캠페인을 통해 참여한 분들에게 서명을 받아뒀습니다. ‘4.3은 대한민국의 역사입니다’란 문구 옆에 서명을 받아둔 것이죠. 훗날 4.3평화재단 바닥에 새기려고 합니다. 4.3평화재단 바닥에 서명이 가득찼을 때 4.3이 대한민국의 진짜 역사로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란 소망입니다. 혹시 아나요. 나중에 자기 이름을 넣어달라고 줄을 설 지...”

 

그가 꿈꾸는 4.3의 전국화는 이제 '제 이름'을 찾기 위한 정명(正名)의 길로 성큼성큼 다가서고 있다. '공공'의 영역으로 눈을 돌린 그의 '디자인'이 뿜어내기 시작한 에너지가 서서히 열매를 맺어가고 있다. [제이누리=고원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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