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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화] 제주 근대경제 개혁 ... 농업개량, 교육, 사회기반시설 조성, 농촌생활개선

박영효(朴泳孝, 1861-1939)는 구한말 근대적 개혁을 추구하며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의 주체인 개화사상가로 철종의 부마이며 고종의 친척 매제이다.

 

정변으로 일본에서 두 번의 망명생활을 보냈으며 1907년, 귀국 후 제주도로 유배되어 유배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긍정적 평가와 부정적 평가가 상존하는 인물이다. 즉 박영효는 반조선의 근대화에 이바지한 공을 평가하는 견해, 예를 들면 김옥균 등 개화파가 청나라에 바치던 조공과 문벌제도의 폐지 등, 정치 개혁을 시도했다는 점을 들어 근대화의 선각자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발표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공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어 지탄받고 있다.

 

구한말 최대 문벌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사람됨이 소탈해 신분 상하를 막론하고 어울리기를 즐겼다는 박영효는 사실 제주 최초의 자발적 유배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효는 제주도에서 일년간의 유배기간이 끝난 후에도 곧바로 상경하지 않고 제주에 정착하여 농사를 지으며 제주도민과의 활발한 교류를 통해 제주도의 농업개량, 교육(여성교육), 사회기반시설 조성, 농촌생활개선 등 각 분야에 걸쳐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된다.

 

그는 형 집행이 끝난 후에도 귀경하지 않고 제주에 머물면서 제주읍 구남동(九南洞) 독짓골에 땅을 매입하여 개량 감귤과 원예농사를 지었는데 당시 이러한 박영효의 행적은 중앙까지 알려졌다.

 

박영효가 제주에 유배되어 만기가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이때 시국이야기를 하지 않고 포전(圃田)을 개간하여 과목(果木)을 심으면서 섬사람들에게 관상수(觀賞樹)를 심도록 하였다[황현(黃玹), 매천야록(梅泉野錄)].

 

당시 국내 정치계에서 비상한 관심을 받고 있던 박영효의 제주살이는 중앙정치판에서도 초미의 관심사였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박영효는 구한 말 중앙정치에 대한 실망과 좌절을 뒤로 한 채 상경하지 않고 제주에 머무르면서 제주에서 그의 이상을 조금이나마 펼쳐 보이려 했던 게 아닌가 한다.

 

조선조 500년 동안 제주를 다녀간 유배인은 대략 200여명이다. 대부분의 유배인들은 중앙정치에 대한 동경, 복권에 대한 열망이 주였으며 정작 제주사회에 대한 관심이나 애정은 그리 많았다고 보기 어렵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김정희(金正喜 1786~1856), 김윤식(金允植 1835~1922), 박영효 등은 제주도에 대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문화, 교학, 농촌사회 개선 등에 기여했다.

 

특히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이며 한성판윤을 지내는 등 정치적으로나 신분적으로 높은 위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고난 천성으로 지역주민들과의 격식없는 교류를 통해 당시 제주사회 개선과 농업개량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제주도 농업은 낮은 토지생산성, 자급자족적이며 보리, 조 등 곡물중심 작물 재배 등이 특징이었으며 무엇보다 농촌기반시설의 절대 부족한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을 간파한 박영효는 당시 제주농촌의 문제점들을 다소 나마 해결, 해소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현실적 대안을 마련하여 제주 농가에 실천하려 했다고 보아진다.

 

그는 자신의 농사에만 국한하지 않고 주변농가에 원예농사를 보급하는 가하면 의식주 개선, 농업개량사업 등 구체적이고 실천적 대안들을 보급시켰다.

 

박영효의 경제개혁사상은 구한말 암울했던 당시 경제상황에 대한 고민에서 출발하여 해결책 모색하려 한 데서 비롯된다. 그 구체적 해결책이 체계적 개혁안 <내정개혁에 대한 1988년 상소문> 건백서(建白書)이다. 경제이윤부국(經濟以潤富國) 44개항, 그 중 치무비보민호국(治武備保民護國) 10개항이 박영효가 제시한 구체적인 경제개혁안이라고 할 수 있다.

 

박영효의 경제개혁안의 기초는 기존 유학의 경제사상, 실학파에서 개화파로 이어진 경제사상, 일본에서 오랜 망명생활 동안 미국 고전파를 경험했으며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과의 교류를 통해 서양의 근대적 경제사상을 습득하여 이를 동양사상과 실학을 바탕으로 현실에 적용한 것이라 요약할 수 있다.

 

박영효는 유길준(兪吉濬 1856-1914) 김옥균(金玉均, 1851~94) 김윤식(金允植, 1835~1922) 등 당시 개화파 핵심세력들과의 교류를 통해 그의 경제개혁안과 실천론을 체계화한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와 같은 개화파의 중심인물인 유길준은 ‘지제의(地制議)’에서 상업작물의 재배가 민생을 두텁게 하므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수입하는 귤과 차의 재배를 장려하여 수출작물로 장려하자고 하였다. 이처럼 개화파의 경제사상 속에 이미 수입대체작물, 수출유망작물로 감귤재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박영효는 일본 망명 생활 동안의 경험을 통하여 감귤재배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제주도에 와서 일본 감귤재배지역의 기후와 제주도 기후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손수 실천해 보려 했다.

 

박영효는 제주읍 구남천(九南泉) 독짓골에 4만여 평의 토지를 마련하고 여기에 각종 원예작물과 함께 일본에서 들여 온 개량감귤을 재배하였다. 아울러 박영효는 주위 농가나 평소 교류가 있는 제주인사들에게도 개량 감귤 재배를 적극 권장하였다. 근대적 의미의 제주 감귤재배의 효시라고 할 수 있다.

 

애석하게도 현재 남아 있는 나무는 없다. 이후 제주도 근대감귤의 재배는 타케신부(Emile Joseph Taquet, 1873-1952) 한국명 엄탁기(嚴宅基)에 의해 이루어 졌다.

 

박영효는 감귤뿐 아니라 원예작물의 재배에도 관심이 높았다. 박영효는 원예작물을 비롯하여 감, 비파, 대추, 석류 등 과수와 양배추, 토마토, 무, 당근 등 여러 가지 작물을 시험 재배했다. 물론 일부는 실패했지만 대체로 성공률 높았고 성공한 작물은 이웃 농가에 적극 권장했다(양진건, 1999).

 

당시 제주농업은 자급자족적이며 조나 보리, 콩, 피 같은 식량 곡물 재배가 주를 이루고 있었다. 박영효는 이러한 제주도 농업상황에 대해 일본 망명 생활에서 얻은 경험 토대로 우선 재배작물의 다양성을 시도 했던 것을 보인다.

 

즉 주곡작물 위주에서 환금작물(판매, 수입대체 수출유망작물 등)로 농영경영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라 보아진다. 물론 성과에 대해서는 미지수이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 자체로 충분히 평가받을 만하다.

 

박영효는 한성부(漢城府) 판윤(判尹)시절 과감한 치도사업(治道事業) 시행한 최초의 근대적 도로 행정가로 평가된다. 그는 유통경제 활성화의 전제조건으로 도로건설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도로, 교량, 수운은 물론이고 육운상사, 단교사(丹橋司) 등의 설치를 주장했다. 아울러 유통경제 활성화, 시장 활성화를 위한 도로개설, 도량형 통일, 거래 화폐 정비, 화폐 적정 발행 등 경제저 개혁과 이를 위한 사회기반 조성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박영효가 제주에서 교류하던 제주지역 유지들에게 사회기반 시설 조성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박영효는 철종의 부마이며 고종의 친척 매제라는 사회적 신분 덕분으로 중앙서 파견된 정부관리 들과 관계가 원활했다. 따라서 당시 윤원구(尹元求)군수의 정책 자문역을 하며 제주지역 경제개혁과 사회기반시설 조성에 관한 많은 정책적 조언을 하였다.

 

 

평소 유통경제 활성화와 시장원리의 보급을 주장해 온 박영효는 이 시기 처음 개설된 제주도 오일장의 활성화에 대해서도 윤원구군수에게 적극 건의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주성을 시작으로 삼양, 이호, 외도, 애월, 조천, 김녕, 세화, 서귀포 등에 개설된 오일장은 제주도 농촌마을의 상거래 활성화를 촉진시켰음은 물론 새로운 정보교류의 장이 펼쳐지게 되었다.

 

박영효는 농촌계몽에도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그는 제주도 농촌의 계몽에도 뜻을 두어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반상귀천을 막론하고 따뜻이 맞아 대화를 나누고 친절히 모든 것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기회 있을 때 마다 낡은 제도와 인습 등 제주도 근대화를 가로막는 저해 요소들을 과감히 타파하여 새로운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한 길이라고 역설했다.

 

양반에게는 신분을 고려하지 말고 상공업 등 여러 산업에의 종사할 것을 주지시켰으며 농민들에게는 근로의식 고취, 교육의 중요성 강조했다.

 

아울러 신성여학교 설립에 자금지원과 여타의 도움을 주는 등 신분타파와 여성교육 활성화를 몸소 실천했다. 이처럼 박영효는 언제 어디서든 제주도민들과 교류하며 그의 지식을 공유하고 경험을 전파하려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 개화파의 거두 박영효가 아니라 최초의 자발적 유배인 박영효의 제주살이에 대한 제주 근대사 관점에서의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이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제주대 사범대를 나왔으나 교단에 서지 않고 동국대에서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에서 사회복지학 박사(2011) 학위를 받았다. 제주도 경제특보에 이어 지금은 지역산업육성 및 기업지원 전담기관인 제주테크노파크에서 수석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겸임교수로 대학, 대학원에 출강하고 있다. 저서로는『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등이 있으며『문화콘텐츠기술과 제주관광산업의 융복합화연구』(2010),『제주형 첨단제조업 발굴 및 산업별 육성전략연구』(2013),『제주자원기반 융복합산업화 기획연구』(2011) 등 보고서와 다수의 논문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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