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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이자성(李自成, 1606-1645), 이름 홍기(鴻基), 섬서(陝西) 미지(米脂) 이계천채(李繼遷寨) 출신이다. 유년시기에는 목동이었다가 나중에 은주(銀州) 역졸(驛卒)이 됐다. 숭정(崇禎, 1629) 2년 군대를 일으켰다. 담력과 지혜를 겸비했으며 세상을 보는 안목이 뛰어났다고 평가받는다. ‘틈왕(闖王)’이라 불렸고 ‘균전(均田) 면부(免賦)’의 기치아래 백성을 위하면서 많은 봉기군들이 합세하게 돼 세력을 넓혀 나갔다. 여주(汝州), 서안(西安) 등지를 함락시켰고 숭정 16년 ‘대순(大順)’을 건국하고 호를 영창(永昌)이라 했다. 이듬해에 북경을 공격해 명明 왕조를 멸망시켰다. 오삼계(吳三桂)가 청병(淸兵)을 산해관(山海關) 안으로 끌어들임으로써 북경에서 철군했다. 영창 2년(1645) 호북(湖北)에서 피살됐다.

 

다시 말해 명나라 말기 농민 봉기군의 유명한 영수 이자성은 마부 출신이다. 동년에는 지주를 위해 목동 일을 했다. 1644년 음력 3월 19일 농민 봉기군을 지휘해 덕승문(德承門)을 통해 북경 성(城)에 입성한다. 273년 동안 중국을 다스렸던 명 왕조를 뒤엎고 역사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러나 산해관 전투 중 농민군은 오삼계 부대와 청병의 협공을 받아 참패당하고 4월 26일 북경으로 철수했다. 4월 29일 이자성은 무영전(武英殿)에서 즉위해 황제라 칭했다. 그리고 곧바로 명 황궁을 전부 불태우고 북경에서 철군한다.

 

이후 이자성은 연전연패 당한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보정(保定), 산서(山西), 섬서 서안으로 퇴각하고 다시 남쪽으로 한중(漢中)을 경유 사천(四川)으로, 장강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갔다. 호북 무창(武昌), 강서(江西) 구강(九江)에서 청병에게 박살난다. 동쪽으로 퇴각할 수 없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서남 방향으로 포위를 뚫고 행군했다. 1645년 이자성은 호북 통산(通山)현 경내 구궁산(九宮山)에 이르렀을 때 돌연 지방 토호 세력의 군인들의 습격을 받아 죽었다.

 

 

 

 

이자성이 호북 통산현 구궁산에서 죽었다는 설은 현재 중국에서 통용되는 역사교과서와 참고서에 쓰여 있는 내용이다. 그러나 역사 문헌의 기록과 학술계는 의문을 가지고 있다. 이자성이 마지막 귀착점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이자성의 마지막 행방에 대한 관점이 대략 세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투 중 희생됐다는 것, 둘째는 이자성이 병사했거나 자살했다는 것, 셋째는 이자성이 당시에 죽지 않고 삭발하여 승려가 됐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자성이 전사했거나 병사했다는 지점에 대해서는 더더욱 의견이 엇갈린다. 호북 통성(通城)현이라 하기도 하고, 진주(辰州), 무창(武昌)이라 하기도 하며 검양(黔陽) 라공산(羅公山)이라 하기도 한다.

 

하등교(何騰蛟)의 『역틈복주소(逆闖伏誅疏)』와 청나라 장수 아지거(아제격阿濟格)의 보고에 의하면 이자성이 통산(通山)에서 희생됐다고 한다. “틈(闖, 틈왕闖王 이자성)이 죽었다는 것은 실제 근거가 있습니다. ……틈의 세력이 실로 강성하고 틈의 군사들이 그리도 많은데 어떻게 구궁산(九宮山 단련(團練, 지주들이 조직한 지방 자체 무장 조직)의 손에 죽었는가? 진실로 그 까닭이 있습니다. 역적 틈이 죽었다면 그 수급을 남겨 신표로 삼아야 하는데 어찌 수급을 얻지 못했는가? 또한 그 까닭이 있습니다. 황상께 아룁니다. ……틈은 청병들에 쫓겨 진예(秦豫)에서 초(楚)로 도망갔습니다. 10일 동안 궂은비가 내려 역적 틈은 꼼짝없이 말 위에서 보내야 했습니다. ……하늘의 뜻이 틈을 버렸는지 28기마군이 구궁산에 올라 정찰할 때 사방에서 복병들이 나타나 불의에 난도당해 죽었습니다. ……역도 틈(闖)의 유반당(劉伴當)이 바람같이 말을 달리며 ‘이만세(李萬歲)가 향민(鄕民)에게 죽임을 당해 말에서 떨어졌다!’고 소리쳤습니다. 생존자가 한 명도 없었습니다. 적당들이 듣고는 일시에 군영에 모여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당시 하등교 부장이 기회를 틈타 투항한 이자성의 부하를 보내 탐문한 결과 이자성이 지방 무장 조직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그런데 “길이 막히고 정보가 두절됐고” 무더운 날씨 탓에 그 수급이 “이미 기이한 물건”이 돼 버렸다고 했다. 하등교는 또 이자성이 향병(鄕兵)의 손에 죽임을 당한 것은 순전히 의외의 상황이었다고 했다. 향병들도 사건이 벌어진 후에야 자신들이 포위해 죽인 자가 이자성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마지막에 하등교는 농민군 내부에 혼란이 생겨 순조롭게 귀순시킬 수 있었다고 하면서 만약 이자성이 살아있다면 어떻게 20만이나 되는 병사들이 순순히 자신의 말을 들었겠냐고 자문하듯 보고한다. 이 주소(奏疏)는 가장 믿을만한 자료다.

 

당시 오성총독(五省總督) 신분이었던 하등교에게는 제한된 병력밖에 없었다. 그런 병력으로 이자성의 20만 대군을 에워싸 전투를 벌여 승리를 거둘 수는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마찬가지로 청나라 장수 아지거가 이자성을 죽인 것이 아니었다. 이자성을 추격하던 청병의 수장 아지거도 비슷한 보고를 했다. 투항한 병사들이나 붙잡힌 군사들 모두 이자성이 촌민들에게 포위됐는데 벗어나지 못해 스스로 목을 매 죽었다고 전했다. 그리고 이자성의 얼굴을 알고 있는 병사들을 풀어 시신을 찾으려 했는데 이미 부패해 분별하지 못할 지경이 됐다고도 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제가 다시가 살필 것입니다”라고 끝을 맺는다.

 

아지거는 명을 받아 오로지 이자성의 뒤만 쫓았던 최고 사령관이었다. 하등교는 이자성의 군대와 대적했던 명나라 최고 장수였다. 그들의 보고서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했다. 거짓으로 보고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둘의 보고한 내용을 보면 실제에 부합되고 의문이 있는 것은 의문 그대로 보고해 공을 쫓아 허위로 과장한 부분이 보이지 않는다.

 

이외에 오위업(吳偉業)의 『수구기략(綏寇紀略)』, 곡응태(谷應泰)의 『명사기사본말』, 비밀(費蜜)의 『황서(荒書)』 등 야사에 이자성이 피살됐다는 기록은 모두 믿을만하다. 심지어 『통산현지』에는 이자성이 정구백(程九伯)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확실하게 기록돼 있다. 『정씨종보(程氏宗譜)』에도 정구백이 이자성을 죽인 과정이 모두 상세하게 기록돼 있고 그로써 청 조정에서 상을 받았다는 것까지 기록돼 있다. 이자성이 통산현 구궁산에서 죽었다는 내용은 관방에서 저술한 책들뿐만 아니라 청대의 사가의 저작들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동시에 현대의 명대 연구가들도 이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이자성이 패배한 이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일치된 견해가 없이 중구난방이다. 일세를 풍미했던 혁명가의 최후에 대해, 혁명군들의 결말에 대해 제대로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난세에 유언비어가 난무하는 현상에 기인한 것일 수도 있다. 청대에 많은 학자들이 고증을 거쳐 거짓되고 잘못된 부분을 수정해 내린 결론은 “순치(順治) 2년 5월 이자성은 호북 통산에서 구궁산 향병들에 의해 살해됐다”이다.

 

이자성이 출가하여 승려가 됐다는 관점에 대해 청대 학자들은 건륭(乾隆) 연간부터 끊임없이 비평을 가하기 시작한다. 이자성이 불문에 귀의했다는 설은 증거가 부족하다고 여겼다. 민국(民國) 연간에 많은 학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깊은 고증을 거쳐 청대 학자들의 견해를 실증했다.

 

『광우초신지(廣虞初新志)』에 기록된 「이자성묘(李自成墓)」조(條)가 ‘출가’했다는 근거가 되는 원시 자료다. 건륭 연간에 풍주灃州 지주知州가 직접 석문(石門)현 협산사(夾山寺)를 방문했던 일을 기록하고 있다. 하린(何磷)은 정확한 추리를 근거로 이자성이 봉천옥(奉天玉) 화상이라 단정했다. 이자성은 일찍이 ‘봉천창의대원수’라 칭했고 나중에 또 스스로 ‘신순왕新順王’이라 불렀기 때문이다. 이자성은 금선탈각(金蟬脫殼)의 계로 ‘그림자 무사’를 내세웠다고 보았다. 장사(長沙)를 방어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하등교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처와 조카들을 투항시키고 자신은 기회를 틈타 몸을 피해 운남(雲南)을 거쳐 사천(四川)으로 가 장헌충(張獻忠)과 연합하려 했다고 봤다.

 

다른 저작들 중에도 이런 관점이 기록돼 있다. 서자(徐鼒)의 『소전기년부고(小腆紀年附考)』에 이자성이 협산에서 승려가 된 일을 기록하고 있다. 70여 세의 노승이 스스로 “순치 조에 절에 들어왔는데 어디에서 왔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 어투가 ‘서인(西人)’ 같았다”고 하고 이자성이 바로 봉천옥 화상이라 단정했다. 후대에 발견된 야불(野拂)이 쓴 「봉천옥화상묘전잔비(奉天玉和尙墓前殘碑)」의 내용을 근거로 야불은 봉천옥 화상의 사부요 생평이 이자성과 비슷해 이자성이 봉천옥 화상이며 이과(李過)가 바로 야불이라고 단정했다.

 

이러한 관점의 또 다른 근거는 이자성 피살의 가능성에 대한 분석이다. 첫째, 이자성의 부하가 20만 대군이었는데 어떻게 일개 향병(鄕兵)의 손에 죽임을 당했겠는가? 둘째, 이자성이 피살됐다면 어떻게 수급을 찾지 못했을까? 이 점이 당시의 사람들과 후세의 사람들이 의문을 던지는 물음이다. 유명한 학자 장태염(章太炎)도 이런 관점에 동의한다.

 

 

 

 

그렇다면 이자성은 전사했을까 아니면 절에 들어가 승려가 됐을까? 아직까지도 논쟁이 치열하다. 그 이유는 문헌 자체에 모순이 있기 때문이며 인위적인 요소가 작용한 때문이기도 하다.

 

일세의 혁명가 이자성은 중요한 인물임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관방이나 민간, 야사에서 각자의 견해가 존재하고 있고 나름대로의 근거들을 내세우고 있다. 명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던 불세출의 농민혁명가 이자성, 그는 과연 어디로 갔는가?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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