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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 물든 황위, ‘현무문 사변’ <1>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6)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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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6.07.28  10:4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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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당(唐) 태종(太宗 : 599-649) 이세민(李世民), 고조(高祖) 이연(李淵)의 둘째 아들이다. 수(隋)나라 말기 아버지와 함께 ‘진양(晉陽)’에서 기병해 당나라를 세우고 진왕(秦王)에 봉해졌다. 무덕(武德) 9년(626) 현무문(玄武門) 사변을 일으켜 형 이건성(李建成)을 죽이고 황위에 올랐다. 적절하게 나라를 다스렸고 인재를 등용해 ‘정관지치(貞觀之治)’를 이뤄냈다. 626년에서 649년까지 재위했는데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봉건 황제가 되었다.

무덕 9년(626) 6월 4일 오전, 진왕 이세민은 장손무기(長孫無忌), 위지경덕(尉遲敬德) 등 10명의 장군을 현무문(玄武門)에 매복시켰다. 그들은 군마의 고삐를 움켜쥐고 하나하나 활을 뽑고 시위를 당겨 긴장한 얼굴로 동궁(東宮)으로 통하는 길의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이따금 바람이 불어와 나뭇잎들이 사사 소리를 냈다. 갑자기 멀리에서 또랑또랑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얼마 되지 않아 태자 이건성과 제왕(齊王) 이원길(李元吉)이 말을 채찍질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이건성과 이원길이 임호전(臨湖殿)에 다다랐을 때 마침 까마귀 한 마리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이건성이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말 머리를 돌려 동궁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때 이세민이 말고삐를 놓고 큰 소리로 “태자, 제왕, 어찌 조회에 참석하지 않으십니까?”라며 불러 세웠다. 이건성이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이세민은 기회를 틈타 화살 하나를 날렸다. 이건성의 목을 관통했다. 이건성은 곧바로 말에서 떨어졌다. 이원길이 그 상황을 보고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이세민과 장손무기 등이 화살을 쏘자 화살을 맞고 말에서 떨어졌다. 순간 위지경덕은 칼을 뽑아 들고 말을 몰아 앞으로 내달렸다. 그리고 이건성과 이원길의 머리를 잘랐다. 이 폐부를 찌르는 광경이 바로 당나라 초기에 발생한 ‘현무문 사변’이다.

 
   
 

이세민은 왜 친형과 친동생을 죽였을까? 이 문제에 대해 천여 년 세월 동안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어떤 사람은 이세민이 형과 동생을 죽인 것은 스스로를 지키려고 했다고 본다. 만약 자신이 그들이 죽이지 않았다면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라고. 어떤 이들은 이세민을 멸시한다. 황제가 되기 위해 가장 잔인한 수단을 동원해 자신의 친형제를 죽였다고. 과연 누가 이 정변의 책임을 져야 할까? 지금까지도 의론이 분분하다.

이세민 형제 사이의 권력 투쟁은 당 고조 이연이 태자를 세우면서부터 시작된다. 이연은 22명의 아들을 뒀다. 고조의 본처 두(竇) 황후는 4명의 아들을 뒀다. 장자 이건성은 태자가 되고 둘째 이세민은 진왕(秦王)에 봉해졌으며 셋째 원패(元覇)는 일찍 죽었고 넷째 원길(元吉)은 제왕(齊王)에 봉해졌다. 건성, 세민, 원길 모두 재능이 있었다. 그러나 태원(太原)에서 기병[진양기병晉陽起兵]하기 전에는 이세민만이 계획에 참여했다. 그리고 기병한 후 반란 세력을 평정하는 전쟁에서 이세민의 공이 가장 컸다. 그러나 이세민은 적장자가 아니었다. 전통 관습에 따르면 황위는 적장자가 승계해야 했다. 그래서 당 고조는 즉위 후 이건성을 황태자에 앉혔다.

이세민은 중국 역사상 가장 걸출한 인물이요 진정한 영웅으로 평가 받는다. 그의 행위와 재능, 지혜는 천 년에 한 명 날까말까 하다고 한다. 고조 이연도 이세민의 재질과 담력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그가 전쟁을 하면서 남긴 공적도 잊지 않고 있었다. 이세민은 전투 중 “사병들 앞에 서서 말을 타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 지도자라면 없어서는 안 될 원대한 정치적 안목이 있었다. 사람을 알아보고 인재를 잘 썼다. 예를 들어 기병 초기 그는 “재물로 사람을 모으는” 수단으로 지방 세력들과 교류했다. 나중에 서세훈(徐世勛), 정지절(程知節), 진경(秦瓊), 위지경덕 등 저명한 모사들과 장군들이 이세민에게 의탁했다. 그는 넓은 도량과 진심어린 태도로 그들을 대했으며 심지어 생사지교를 맺기도 했다.

이세민의 이러한 골간은 출신이 미천해 강한 공명 의식에 기인한 것이다. 새로 굴기한 신진세력에 속한 인물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는 장안에 문학관을 설치해 광범위하게 인재들을 모았다. 두여회(杜如懷)를 중심으로 하는 당시로써는 가장 총명한 18명의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그들은 진왕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고 좋은 책략을 받쳤다. 여러 수단을 동원해 이건성이 거느리고 있던 팀의 중요한 인물들을 빼오기도 했다. 장군 상하(常何), 경군홍(敬君弘), 여세형(呂世衡) 등이 그들이다. 이런 인물들은 ‘현무문 사변’과 같은 중요한 때에 이세민을 도왔다. 따라서 군사 능력이나 책략, 정치적 안목, 인재 등용 등 여러 방면에 이세민은 이건성, 이원길을 뛰어넘었다. 당나라가 이런 위대한 군주가 있었으니 국력이 역사상 최강을 자랑하게 됐다.

그렇다고 정변 중에 죽임을 당한 이건성이 녹녹한 인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동생 이세민처럼 부친 이연의 오른팔이었다. 기병 초기 이건성은 좌령군대도독이 라는 직을 맡아 전투에 참여했다. 장안을 공략하는 전쟁에서 그의 공적은 이세민의 아래가 아니었다. 이후 그는 자신이 직접 지휘하면서 중요한 전투에 참가해 혁혁한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건성은 이세민처럼 많은 전투에 참가하지는 못했다. 그는 황태자의 신분이었기에 조정에 남아있어야 했다. 이것은 이연의 안배였다. 이건성이 나약했다는 말이 결코 아니다. 그는 당나라 군대가 안정적인 근거지를 확보하고 전선의 작전을 지원했다. 이는 이건성의 정치적 영향과 정지 세력이 이세민보다 앞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건성이 장안 지역에서 얻은 커다란 성과는 이세민은 발밑에도 미치지 못한다.

그리고 이건성의 인품도 동생에 뒤지지 않았다. 역사 사료를 보면 그는 인간관계가 좋았던 인물이다. 덕망 높고 어진 사람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했다. 그의 주변에 재능이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예를 들어 위정(魏征), 왕규(王珪) 등이 이건성의 힘이 돼 주었다. 이건성은 황친들과도 융화를 잘했다. 그리고 최고의 인물 이연이 지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면 이건성은 황위를 계승할 자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군림천하의 능력이 있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세민과 이건성의 다른 형제 이원길도 권력의 와류 속의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고조 이연의 넷째 아들이었다. 남달리 용맹해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나 그는 교만하고 방종한 면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원길도 마음속으로는 황위 계승권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건성과 이세민의 세력과 영향 아래 균형을 잡으면서 어느 쪽에 붙을 것인가 고민했다. 나름대로 주도면밀하게 고민하고 나서 이원길은 결국 이건성을 선택했다. 이윈길은 이세민을 따르면 자신이 황위에 앉겠다는 야심을 실현할 수 없고 이건성에게 의탁하면 황위를 얻을 희망이 그나마 있다고 판단했다. 이원길은 또 먼저 이세민만 없애버리면 이건성을 제거하는 것은 손바닥 뒤집듯 쉬울 것이라 여겼다. 어느 때인가는 태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도 식은 죽 먹기일 것이고. 이런 생각 아래 이건성이 이원길에게 동참하자고 제안하자 이원길은 즉각 이건성의 편에 섰다.

이건성과 이세민 모두 형제 사이의 세력이 엇비슷했다. 언젠가는 생사를 건 격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 대비하기 위해 둘은 자기의 역량을 확충해 나갔다.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 상대의 진영을 와해시키려고 했다. 고립무원의 상황으로 몰고 가려고 애썼다. 이연의 저울추가 향하는 방향에 따라 그런 위험한 균형은 일시에 무너지는 것이었다. 고조 이연도 이건성과 이세민이 대립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원칙 없는 중재인 태도로 이미 백열화(白熱化)된 모순을 처리하려 했다. 그것이 불행이었다. 분쟁을 없애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두 형제의 투쟁을 격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건성과 이원길은 고조 이연에게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후궁의 지원을 받으려 애썼다. 이 방법은 효과가 있었다. 원래 이세민에 대한 후궁들의 인상은 좋지 않았다. 왜 그럴까? 무덕(武德) 4년 이세민이 낙양을 함락시키자 이연은 빈(嬪)과 비(妃)들을 낙양으로 보내 궁인과 보물들을 선택하라고 했다. 어떤 후궁들은 그 기회에 이세민에게 보물을 달라고 했고 어떤 후궁들은 자신의 친척을 관직에 앉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세민은 보물과 관직을 모두 자신의 부하들에게 나눠줘 버린 상태였다. 후궁들의 요구를 들어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빈과 비들은 이세민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단지 오랫동안 발산할 기회가 없었을 뿐이었다. 이건성이 후궁들에게 선심을 쓰자 후궁들의 세력은 이건성과 이원길 쪽으로 단번에 쏠렸다. 이로부터 후궁들은 고조 이연의 면전에서 이세민을 헐뜯기 시작했다.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이연이 총애하는 윤덕비(尹德妃)가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윤하서(尹阿鼠)로 그의 세력을 믿고 남을 괴롭히기를 밥 먹듯 했다. 그에게 당한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루는 이세민의 부하 두여회(杜如晦)가 윤아서 집 앞에서 말을 내리지 않자 윤아서의 가복이 뛰쳐나오면서 “네 놈. 어떤 놈이기에 우리 집 앞에서 감히 말에서 내리지 않아?” 소리를 지르며 두여회를 말에서 끌어내려 발길질을 했다. 나중에 윤아서가 그 일이 이연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적방하장의 방법을 동원해 윤덕비를 통해 이연에게 “진왕(이세민)과 같이 있는 인물들은 모두 흉포합니다. 그들이 제 연로하신 아버지를 능욕했습니다”라고 알리도록 했다. 고조는 대노하여 진상을 조사하지도 않고 이세민을 궁으로 불러들여 “네 놈의 부하들이 내 비의 아버지를 능욕할 수 있단 말이냐. 그걸 보면 일반 백성들에게는 얼마나 설치고 다니는지를 알겠다”며 호되게 야단을 쳤다. 그러면서 이세민의 말을 듣지도 않았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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