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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9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전족(纏足)이란 중국에서 여자의 발을 인위적으로 작게 하기 위해 헝겊으로 묶던 풍습이다. 중국 고대에 대다수의 여자들은 기다란 포로 자신의 발을 단단하게 묶어 발의 형태를 변형시키고 3촌(寸) 이상 자라지 않게 만들었다. 이를 ‘삼촌금련(三寸金蓮)’이라 부른다. 전족의 모양이 연꽃과 비슷하고 또한 중국에서 ‘귀함’을 표현할 때 ‘金’자를 붙이기 좋아하는 습속에 의해 중국 고대 여성의 전 족은 ‘금련’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가졌다. 미인의 상징으로 삼았다. 그러나 남녀 불평등의 악습에 의한 것으로 지금은 철저하게 폐지됐다.

 

중국 고대 부녀자들의 ‘전족’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의론이 분분해 아직까지 통일돼 있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대우(大禹) 치수 때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대우가 도산(涂山) 씨의 여인을 아내로 맞았는데 도산 씨는 여우 요정으로 발이 작았다. 어떤 사람은 또 은나라 말기 주(紂)왕의 비 달기(妲己)에서 비롯됐다고 하기도 한다. 여우 요정이 변해 아름다운 달기로 변했는데 그만 발만 그대로였다. 그러자 포로 발을 감쌌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설이다. 당시 여인들이 전족을 했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

 

전족은 수나라 때부터 시작됐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수양제(隋煬帝)가 강도(江都)로 출유 나갔을 때 미녀 몇 백 명을 선발하도록 명했다. 그중 오월낭(吳月娘)이란 여인이 있었다.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특별히 자그마한 칼을 하나 만들어 주고 긴 포로 발아래에 묶어 두었다. 그리고 신에 연화(蓮花)를 새겼다. 길을 걸을 때마다 연꽃이 찍혔다. 황음무치한 수양제가 보고는 그녀의 작은 발을 감상하기 위해 가까이에 불렀다. 오월낭은 발에 묶은 포를 풀고 칼을 꺼내 수양제를 찔렀으나 수양제의 손등에 상처만 냈다. 암살이 실패하자 오월낭은 강에 뛰어들어 자살했다. 나중에 수양제는 전족을 한 여자는 아무도 궁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민간 여인들은 오월낭을 기념하기 위해 발을 묶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중에 발을 묶는 것이 풍습이 돼 후세에 내려 왔다고 하고.

 

 

 

 

오대(五代) 때부터 전족이 생겼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남당(南唐) 이후주(李後主)의 비 요낭(窅娘)이 노래와 춤에 뛰어났다. 이후주는 특별히 높이 6척(尺)의 금련을 제작하고 주보와 비단포로 구슬 목걸이를 장식했다. 요낭에게 포로 발을 묶고 달 모양을 만들어 연화대에서 춤을 추게 하니 자태가 더욱 아름다웠다고 한다.

 

후대 연구에 따르면 중국 여인들이 전족을 하는 풍습은 북송(北宋)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부인들이 모두 전족을 한 것은 아니었다. 전족은 상층사회에서나 유행했다. 발을 곧게 묶었을 뿐 굽히지는 않았다. 이를 ‘쾌상마(快上馬)’라 불렀는데 후세의 ‘삼촌금련’과는 다르다.

 

원나라 때에도 전족의 풍습은 계속 발전했다. 여자들은 전족을 하지 않으면 부끄러워했다고 한다. 명대(明代)에 이르러 부녀자들의 전족하는 풍습이 성행해 각지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전족의 형태에 대해서도 일정한 방법이 강구됐다. 여자의 발을 작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3촌(寸)을 넘지 않게 축소시키고 굽게 만들었으며 쫑즈[粽子] 형태로 묶는 것 등 여러 가지에 신경을 썼다. 빈부귀천을 떠나 사회 각계각층의 여자들이 모두 전족을 했다. 여자의 발의 형태와 크고 작음이 여자의 미추(美醜)를 평가하는 중요한 표준이 됐다. 심지어 여자들의 결혼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여자들의 작은 발이 전대미문의 관심과 숭배를 받게 됐다. 당시 강소(江蘇), 절강(浙江) 일대의 세가와 대족의 여자들 중 전족을 하지 않은 사람이 한 명도 없을 정도였다고 전한다.

 

3촌 이내로 발을 묶어 전족을 하는 것은 여자로써는 당연히 해야 하는 의무처럼 됐다. 집에서 살림을 할 여자를 찾을 때는 반드시 3, 4촌 이내여야 했다. 5촌 이상이 되면 중매가 힘들뿐만 아니라 여자 자신도 쉽게 상대를 만날 수 없고 친척들과도 감히 대면을 하지 못했다. 출가할 때 친척들이 여자의 발이 크면 비웃음을 당했다. 심지어 “침상 가득할 정도로 큰 매기”라는 닉네임이 붙기도 하였다. 발이 큰 여자들은 부끄러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발이 크면 남편에게서 쫓겨나기도 했고. 서양에서 유행했던 허리를 묶던 코르셋이나 현대의 다이어트와 닮았다고나 할까.

 

 

 

 

그렇다면 부녀자들의 전족으로 만들어진 작은 발을 왜 ‘금련(金蓮)’이라 불렀을까?

 

남조(南朝) 동혼후(東婚侯)의 반비(潘妃)가 맨발로 금박으로 만든 연꽃 위를 걸으면서 “걸음마다 연꽃을 만들었다(步步生蓮花)”라는 아름다운 경관을 연출했는데 이것이 바로 ‘금련’이란 표현의 시작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반비의 발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대 요낭이 연화대에서 춤을 췄기 때문에 ‘금련’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요낭의 발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현재 비교적 일치되는 관점은 ‘금련’이 불교문화 중의 ‘연꽃’에서 유래했다고 보는 것이다. ‘연꽃’으로 부녀자들의 작은 발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쓴 미칭이라 본다. 연꽃은 진흙에서 피지만 더럽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서 청정, 고결, 아름다움, 진귀함, 길상의 상징이 됐다. 이외에 불교 예술 중 보살은 맨발로 연꽃 위에 서 있다. 이것도 연꽃과 부녀자들의 작은 발을 연상시킨 중요한 원인이 됐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왜 또 ‘연(蓮)’에 ‘금(金)’자를 붙였을까? 이는 중국인들의 전통적인 언어 습관에서 비롯됐다고 본다. 중국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금’자를 가지고 귀중하거나 아름다움을 수식한다. 작은 발을 귀하게 여겨 전족을 하던 시대에 ‘金’ 연꽃이라 부른 것은 진귀하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미칭이었다. 나중에 전족에 빠진 팬들이 ‘금련’을 3촌 이내의 발에 대해서만 그 이름을 붙였다. 4촌 이내는 ‘은련(銀蓮)’이라 했고 4촌 이상의 발을 ‘철연(鐵蓮)’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면서 ‘금련’은 반드시 3촌이어야 됐고. 그래서 이른바 ‘삼촌금련’이라는 말이 굳어지게 됐다. 결국 ‘금련’은 작은 발을 가리키는 대명사가 됐다.

 

 

 

 

여인의 두 발이 이렇게 많은 문장을 만들어 냈다. 그 속에 얼마만한 고달픔과 괴로움이 담겨 있을까. 중국 고대 사회의 생활과 심리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전족’, 그 속에 동양사회의 여인들의 피눈물이 담겨 있다. 여인들의 ‘苦’의 대명사 ‘금련’, 그 속에는 부권사회의 모순과 인간을 도구로만 봤던 동양사회의 모순이 그대로 담겨 있음엔.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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