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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그 진실을 찾아서(59)… 4·3영령들과의 특별한 만남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소설 같은 이야기다. 그런데 실제 일어난 일들이다. 4·3영령과의 만남 스토리이기에 일반 상식으론 믿기 어려운 이야기일 수 있다.

 

2007년 3월 중순 4·3중앙위원회에 근무하던 나는 한 고위 공직자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자신을 청와대 소속 위원회 국장으로 신분을 밝히고 4·3과 관련해서 상의할 일이 있으니 만날 수 없겠느냐는 뜻을 전해왔다.

 

서울 광화문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그는 2급 상당의 고위 공무원(이사관)이었다. 그는 자신이 경험했던 이야기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노근리사건 지원단장으로 재직하던 2006년, 그는 4·3평화공원을 방문했다고 한다. 노근리에도 노근리사건 평화공원을 만들게 되어서 먼저 조성된 4·3평화공원을 벤치마킹하기 위한 시찰이었다.

 

4·3위패봉안소에서 체험한 빙의현상
4·3평화공원 위패봉안실에 들른 그는 노근리공원 조성을 염두에 두고, 희생자 명단이 새겨진 위패 크기를 일일이 재면서 30분가량 머물렀단다. 그리고 봉안실을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음습한 기운이 갑자기 자신을 덮치면서 꼼짝 못하는 상태가 돼 버렸다는 것. 일종의 ‘빙의’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겨우 서울까지 되돌아왔지만 어쩐 일인지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독실한 불교신자인 그는 사찰에 가서 불공을 드렸다. 그래도 몸이 풀리지 않자 고향인 경상북도에 내려가 원래 다니던 사찰에서 철야 기도를 드렸다.

 

철야 기도하는 가운데 4·3영령들을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4·3영령들로부터 그 억울함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4·3공원 위패봉안실에서 억울함을 달래는 천도재를 드리겠다고 영령들에게 굳게 약속했다는 것이다.

 

그는 더불어 자신에게 일종의 신기(神氣)가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놨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어떤 사찰에 대한 꿈을 꾼 적이 있다. 대학교 3학년 때 고시 공부를 하기 위해 한 절간을 찾았는데, 신기하게도 고등학생 때 꿈에 나타났던 그 사찰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더라는 것이다.

 

그 곳에서 공부를 해서 행정고시를 패스했다. 그러면서 그는 허공을 헤매던 혼백들이 그런 자신에게 기대어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접근한 것으로 풀이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내 의견을 물었다.

 

그는 제주특별자치도 김태환 지사나 박영부 자치행정국장을 잘 안다면서 “행정 쪽에 도움을 요청할까 하는데 양 수석의 생각은 어떠냐?”고 묻기도 했다.

 

기독교인인 나는 4·3영령들을 만났을 때 교회에서 기도로 풀었지만, 천도재는 불교의식이 아닌가. 그래서 아무래도 스님을 만나 처방전을 받아야 할 것이 아닌가라고 되물었다. 마침 제주도 관음사에서 해마다 4·3영혼 천도재를 지내고 있으니 그쪽과 상의하자고 제안했다.

 

당사자 참석 못한채 천도재 봉행
그는 나와 함께 제주에 내려와 관음사 중원 주지스님을 만났다. 저간의 사정을 들은 중원 스님은 영령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4·3 위패봉안실에서 천도재를 봉행하는 것이 마땅하고, 그 일을 해야 한다는 처방전을 내놓았다.

 

그리고 그 천도재를 관음사에서 맡겠다고 선선히 나섰다. 그래서 그해 3월 말에 위패봉안실에서의 천도재 계획이 전격적으로 결정됐다. 나는 위패봉안실에서의 천도재는 처음 하는 일이어서 제주4·3사업소에 장소 사용 협조를 구하기도 했다.

 

 

그런데 오전 10시에 천도재가 치러지던 행사 당일, 서울에서 아침 첫 비행기를 탔던 그는 끝내 제주공항에 내리지 못했다. 아침 일찍 공항에 마중 나갔던 나는 그로부터 “여기 광주공항입니다. 4·3영령들 참으로 대단합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들었다.

 

휴대전화를 통해 들려온 그의 이야기는 자신이 탄 비행기가 제주공항에 와서 세 번이나 활주로에 착지했지만 그때마다 강풍이 불어 결국 광주로 회항해서 날씨가 호전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4·3영령들이 조화를 부린 것으로 해석했다.

 

천도재는 그가 없는 상태에서 봉행됐다. 중원 스님은 “그것은 4·3영령들과의 약속이기 때문에 본인이 없더라도 봉행하는 것이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김두연 회장을 비롯한 4·3유족회 임원단과 관음사 신도 등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위패봉안실에서 처음으로 4·3영령들을 위무하는 천도재가 거행됐다.

 

 

그날 제주에 오지 못했던 그는 4월 3일 제주에 왔다. 비록 앞의 천도재 행사에는 참석하지 못했지만, 3일 오후 5시에 관음사에서 해마다 치러온 천도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관음사 천도재 계기로 떨리던 몸 풀려
그날은 유독 추웠다. 관음사 야외에서 천도재가 진행됐는데, 어느 순간 그의 의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추워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아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떨림은 더 강해갔다. 스님이 큰 소리로 영혼들을 불러들이는 순서에서였다. 이어 합창단이 영혼들을 위무하는 찬불가를 부르자 그는 긴 숨을 내쉬면서 조용해졌다.

 

행사를 마치고 자리를 옮길 때, 내가 “아까 왜 그랬나”고 물었다. 그는 “주체할 수 없는 어떤 힘이 와서 나를 흔들었다”고 답변했다. 그러면서 찬불가가 흐르자 마음이 편해졌다고 덧붙였다.

 

그의 몸은 천도재를 계기로 풀렸다. 그로부터 1년이 지난 2008년 3월 그는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수석님(내가 ‘수석전문위원’이어서 그런 호칭을 썼다), 또 도졌어요. 그것이 동티난 것 같습니다.”

 

‘그것이’ 무어냐는 나의 질문에 그의 설명은 이랬다. 관음사에서 천도재할 때 시주 돈 봉투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주지스님은 그걸 알고 “공무원이 무슨 돈이 있겠냐”면서 그 봉투를 되돌렸다는 것이다.

 

나는 모른 사실이었다. 그는 그 봉투를 갖고 오지 말아야 하는데, 그걸 잘못 갖고 오는 바람에 문제가 됐다는 해석이다.

 

그 후로도 그와는 4·3영령과의 관계로 몇 차례 연락이 있었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그는 그후 경북 행정부지사와 행정자치부 지방재정세제실장을 거치는 등 직업공무원으로는 최고 자리인 1급 공무원까지 올랐다는 점이다.

 

일반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4·3 진실찾기를 하다 보니 이런 경험들을 종종 만나게 됐다. 4·3연구자나 유족들이 영혼과 만나는 빙의 현상을 자주 보게 됐다.

 

4·3취재반장 갈등할 때의 가위눌림
아니, 나에게도 특별한 경험이 있다. 얼마 전까지도 나는 4·3영령과의 첫 만남이 4·3취재반장을 맡아야 될지를 놓고 갈등할 때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이미 체험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야 깨달았다.

 

나는 이 글을 처음 시작할 때 “4·3영령과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것 같다”고 한 적이 있다. 1988년 4·3취재반장을 맡아 며칠 동안 뒤척이던 어느 날 가위눌리는 일이 있었던 일을 회고한 이야기였다.

 

“‘빨간 줄’ 한 줄이면 인생 망친다.”는 시절이라서 심적 갈등은 계속됐다. 어느 날 잠을 자는데, 누군가 내 목을 누르기 시작했다. 심리적으로 불안해서 그런가보다 하면서도 결심이 서지 않았다.

 

가위눌리는 밤이 계속됐다. 그러던 어느 날 밤은 침대까지 흔들어댔다. 안 떨어지려고 발버둥 쳤지만 결국 침대에서 떨어졌다. 꿈이었다. 그런데 난생 처음 침대에서 떨어진 것은 실제 상황이었다. 꿈과 실제가 겹친 것이다.

 

침대에서 떨어지는 순간 “하겠다!”고 소리친 것 같다. 시계를 보니 새벽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길로 내가 다니던 교회(중앙감리교회)에 가서 앞만 보고 달려갈 테니 도와달라는 절실한 기도를 했다. 내 결심이 서자 가위눌림은 사라졌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가위눌림과 침대를 흔든 것은 4·3영령이 조화를 부린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에 불현듯 중학교 3학년 시절의 일이 떠올랐다. 친구 4명과 함께 외도천에 캠핑을 갔다. 물이 많은 속칭 ‘나라소’를 앞에 두고 잔디밭에 텐트를 쳤다. 뒤에는 소나무 숲이 있었다.

캠핑장에서 강한 음기 알아보니 학살터
그런데 한밤중에 나는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갑자기 음기가 엄습해오고, 불빛이 내 눈앞으로 씽씽 날아다녔다. 온몸에 전율을 느끼면서 꼼짝할 수 없었다. 나는 아침에 기진맥진한 상태로 “몸살이 심하니 그냥 내려가자”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2박3일 일정의 캠핑은 하루 만에 끝이 났다. 내려오던 길에 외도에 있는 이모 집에 들러 밥을 얻어먹었다. 외도천 나라소 앞 잔디밭에서 캠핑을 했다고 하니 이모부가 무심결에 “그 곳은 4·3사건 때 사람 많이 죽은 곳인데…”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나는 그 말의 의미를 그때는 몰랐다.

 

나는 4·3광풍이 몰아치던 1948년 12월 제주시내 중심지인 오현단 앞 이도동에서 태어났고, 유년시절은 동문로터리 주변인 일도동에서 보냈다. 거기다 가족이나 가까운 친척 중에 4·3 피해자가 없었다.

 

나는 실상 4·3사건이 뭔지 잘 몰랐다. 최근에야 ‘4·3영령과의 만남’에 대한 글을 써야겠다며 회상하다 문득 그 때 일이 생각난 것이다.

 

그래서 4·3위원회에 신고된 희생자들의 피해 실태를 검색해 보았다. 1948년 12월 17일, 도평에 살던 일가족 5명이 외도천 부근에서 총살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62세의 할머니, 30세의 아버지, 27세의 어머니, 4세의 딸, 2살의 아들이 몰살된 것이다. 또 같은 날 애월읍 상가리 주민 6명도 외도천에서 총살당했다는 신고 내용도 있었다.

 

나는 외도에 사는 나의 이모부 배광경 교장에게 연락했다. 이모부는 1948년 11월 초순께 ‘항파두리’ 쪽에 살던 고성 주민 10여 명이 포승줄에 묶인 채 외도천으로 끌려가 처형됐던 사실을 증언했다. 줄에 묶인 어린이도 직접 봤다고 말했다.

 

50년 만에 이모부와 함께 그 현장을 다시 찾았다. 그때의 잔디밭은 간 곳 없고 소나무숲과 잡목으로 우거져 있었다. 우리가 텐트 쳤던 곳 뒤편 50m 지점이 바로 그 학살터였다. 애기 무덤 등이 많은 공동묘지였다고 한다.

 

 

나는 그때 동행했던 친구들에게 연락했다. 그랬더니 한결같이 “조훈이 너가 몸이 아파 도중에 내려온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그 원혼들이 나에게만 접근했다는 말인가. 결국 그것이 4·3영령과의 첫 만남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런 일도 있었다. 4·3취재가 한창 가속도가 붙은 1989년, 표선면 중산간마을 주민을 대상으로 4·3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 그 날은 너무 피곤했다.

 

그래서 길가에 차를 세우고 잠시 눈을 붙였다. 그런데 꿈속에 여러 사람이 나타나서 나를 뚱뚱 하늘로 올리는 것이 아닌가. “친구야, 같이 놀자”면서. 나중에 보니 교래리 학살터 주변이었다.

 

4·3관련자들이 말하는 특별한 체험들
한이 많은 영혼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허공을 떠돌다가 혼백이 머물기에 적당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억울함을 호소하며 그에 의지하려는 습성이 있다고 한다.

 

전기가 전혀 통하지 않은 ‘부도체’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로 잘 전하는 ‘양도체’가 있듯이. 4·3연구자나 유족들이 영혼과 만나는 특별한 체험은 많다. 그렇다고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일찍부터 4·3영령에 대한 이야기를 해온 사람은 「순이삼촌」의 작가 현기영 선생이다. 그는 4·3 소설을 계속 쓰는 이유를 “저승에 안착하지 못한 원혼들을 음습한 금기의 영역에서 대명천지의 밝은 태양 아래 불러내어 공개적으로 달래주기 위함”이라고 역설해 왔다.

 

그는 또한 “원혼들의 한은 풀어줘야 해코지하지 않고 오히려 힘이 되어 준다.”고 강조해왔다. 수만의 영혼이 도와준다면 그 에너지는 막강하다면서.

 

 

1989년부터 3년간 위대한 4·3 연작그림 ‘동백꽃 지다’ 작업을 하던 강요배 화백은 그 작업 과정에서 4·3영령들을 만나는 느낌을 여러 번 받았다고 회고했다. 영령들은 “너 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무언의 압력을 주기도 했는데, 그게 오히려 힘이 되었다고 털어놨다.

 

4·3특별법 제정운동에 앞장섰던 고희범(전 한겨레신문 사장)은 형체는 없이 사람 모양의 그림자인 4·3영령들을 꿈에서 만났다고 했다. “여기 계시면 어떻게 합니까. 좋은 데로 가셔야지요”라면서 두 손을 내밀자 그 그림자들이 둥둥 하늘로 떠 올라가는 꿈을 꾸었다고 회고했다.

 

추미애 의원도 비슷한 증언을 했다. 1999년 정부기록보존소 부산지소 캄캄한 창고에서 수형인 명부를 찾아냈을 때, “자료를 손에 쥔 순간 막힌 것이 뻥 뚫린 듯 했고, 마치 4·3영령이 뭔가 풀리게끔 도와주는 느낌마저 들었다.”고 술회했다.

 

언젠가부터 나도 4·3 일을 새롭게 하게 되는 사람들에게 “4·3 일을 잘 하면 영령들이 도와 줄 것”이란 말을 곧잘 하게 됐다.

 

서울 4·3중앙위원회에 근무할 때, 행정고시 출신의 ‘육지’ 사람들이 4·3사건처리지원단장으로 여러 명 거쳐 갔다. 나는 그들에게 주술하듯 반복해서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들은 대부분 요직을 받고 떠났다. 영전을 축하하면 그들은 세뇌가 됐는지 “4·3영령들이 도와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안전행정부 차관까지 오른 이경옥 단장이다.

 

이 단장에게 차관 영전을 축하하자 그는 “4·3영령들이 도와주어서 여기까지 왔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그것은 그냥 인사치레가 아닌, 다양한 체험을 통해 체득한 엄숙한 고백이기도 하다.

 

☞양조훈은? = 4·3 광풍이 휩쓸던 1948년 12월 제주읍에서 태어났다. 1972년부터 27년 동안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88년 제주신문 4·3취재반장을 맡아 「4·3의 증언」을 연재하며 운명적으로 4·3과 조우했다. 이후 제민일보 4·3취재반장과 편집국장 등을 거치며 4·3의 진실을 밝히는「4·3은 말한다」(456회)를 10년 넘게 연재했다. 1999년 신문사에서 해직당한 이후에는 4·3특별법쟁취연대회의 공동대표를 맡아 4·3특별법 제정 운동에 앞장섰다. 2000년 이후 4·3위원회(위원장 국무총리) 수석전문위원으로서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작성의 실무책임을 맡아 공권력의 잘못을 밝혀냈고, 이 진상조사보고서를 근거하여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통령 사과를 이끌어내는 데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뉴욕타임스』(2001)는 저자를 “4·3 학살을 조사 연구해온 저널리스트”로 소개하고, “그의 소망은 나라 전체가 이 역사를 인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4·3평화재단 초대 상임이사, 제주특별자치도 환경부지사도 지냈다. 현재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 4·3평화교육위원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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