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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4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항우(項羽)가 『해하가垓下歌』를 비장하게 부르자 ;

 

力拔山兮氣盖世(역발산혜기개세) 힘은 산을 뽑아낼만하고 기운은 세상을 덮을만한데
時不利兮騅不逝(시불리혜추불서) 때가 불리하니 오추마도 나아가질 않는구나.
騅不逝兮可奈何(추불서혜가내하) 오추마가 나아가질 않으니 내 어찌할 것인가,
虞兮虞兮奈若何(우혜우혜내약하) 우미인아 우미인아 너를 어찌할거나.

우희(虞姬) 춤을 추며 답가를 한다.

 

漢兵已略地(한병이략지) 한나라 병사들이 이미 모든 땅을 차지하였고,
四方楚歌聲(사방초가성) 사방에서 들리느니 초나라 노래뿐.
大王意氣盡(대왕의기진) 대왕의 뜻과 기운이 다하였으니,
賤妾何聊生(천첩하류생) 천한 제가 어찌 살기를 바라리오.

우희(虞姬 : ? - 기원전 202년), 서초패왕 항우(項羽)의 애첩이다. 화용월태(花容月態)를 갖췄고 노래와 춤에 능했으며 빙설의 지조를 지니고 있었다. 유방(劉邦)의 병사들에 의해 해하(垓下)에서 포위돼 사면초가(四面楚歌) 신세가 되자 항우가 걱정할 것을 염려하여 오강(烏江) 기슭에서 자진했다.

 

 

항우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비극적 영웅이다. 스스로 ‘역발산’의 ‘기개세’를 지녔다고 하였고 자신을 ‘서초패왕(西楚覇王)’이라 불렀으며 힘으로 천하를 정벌하여 경영하려다 오강에서 자진하여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의 애첩인 우희도 같이 자진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우희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 기록하지 않아 대대로 사람들의 억측을 불러왔다. 지금까지 4가지 관점이 전해온다.

 

우희의 묘가 안휘(安徽)성 영벽(靈璧)현에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
청나라 건륭(乾隆)년간 『영벽현지』에 “영벽 성 동쪽 15리, 사현(泗縣)과 접경지역에 우희의 묘가 있다. 지금까지 묘비가 존재한다. ‘건귁영웅(巾幗英雄)’이라는 4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 대련에 ‘우여 어찌 자고이래로 미인은 박명하였으며 희여 어찌 홀로 청총을 남겨 황혼을 향하였느뇨.’라 쓰여 있다.”라고 기록돼 있다. 이 기록은 『중국명승사전』에 채용돼 있다.

 

이런 관점은 시인묵객들의 시에 의거한 것이기도 하다. 남송 시인 범성대(范成大)는 금나라에 사신으로 가면서 사주(泗州)를 경유했는데 그때 『우희묘(虞姬墓)』라는 시를 남긴다. “유방 항우 모두 가련하구나, 영웅은 미인을 비호할 방법이 없으니. 사랑하는 이의 무덤 있는 곳을 그대는 아시는가? 우의 묘에 가지도 못하고 있으니.” 그러면서 사현 교외 37리에 묘가 있다고 주를 달았다.

 

이외에 『중수오희묘비문』에 “영벽의 남쪽이 해하의 옛 주소다. 그 동쪽에 우희의 묘가 있다.”고 기록돼 있다. 비문에는 우희가 자살하는 과정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는데 전통 역사극 중에 자주 상영되는 『패왕별희(覇王別姬)』의 이야기와 무척 닮았다. “항우의 부대가 해하에서 유방에게 포위되자 병사들은 달아나고 먹을 것이 떨어져 깊은 수심에 잠겼다. 깊은 밤 장막 안에서 미인 우희, 준마 오추마를 앞에 두고 패왕 항우는 비가를 부른다. 바로 ‘해하가’다. 우희는 춤을 추며 답가를 부른다. 좌우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비 오듯 눈물을 쏟자 분위기는 일순간 비통에 잠긴다. 우희가 노래를 마치고 검을 뽑아 자진하자 항우는 몹시 애통해하며 우희를 묻은 후 포위를 뚫고 나아갔다.”

 

 

청대 유월(兪樾)은 진석로(陳錫路)의 『황내여화』의 기록에 주의했다. 그 기록에 따르면 제나라 무평(武平) 5년(574)에 팽성(彭城 : 영벽)에 항우의 첩의 분묘를 발굴하여 『도덕경』을 얻었지만 그 첩은 우희가 아니었다. 유월은 이상하게 생각했다. 우희 이외에 항우에게 다른 첩이 또 있었다는 기록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된 것인가? 만약 영벽의 묘가 우희의 무덤이라면 위태로운 지경에 놓여있던 항우가 창졸지간에 다른 미인의 이름을 새긴 기록을 우희의 무덤에 놓아둘 리가 있을까? 그래서 영벽의 묘는 우희의 묘가 될 수가 없다고 했다.

 

우희의 묘는 안휘성 정원(定遠)현에 있다고 하기도 한다.
정원현 현지에는 지금까지도 우희가 항우를 따라 정원까지 도망간 후 자진했고 정원현에 묻혔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 『사기정의』, 『환우기』, 청(淸) 강희(康熙) 39년에 편찬한 『정원현지』에 같은 기록이 보인다.

 

북송 희녕(熙寗) 4년(1071) 소식(蘇軾)이 항주(杭州)로 부임하며 몽주(蒙州)를 지나면서 『호주칠절(濠州七絶)』을 썼는데 그중「우희묘」가 있다.

 

帳下佳人拭淚痕(장하가인식루흔)장막 밑의 가인은 눈물자국 닦아내고,
門前壯士氣如雲(문전장사기여운) 문 앞의 장사들은 구름처럼 기세 드높다.
倉黃不負君王意(창황부부군왕의) 창황 중에 군왕의 뜻을 저버리지 않는 이는
只有虞姬與鄭君(지유우희여정군) 우희와 정군 두 사람뿐 이였네.

 

이렇게 본다면 북송 시대에 정원에 분명 우희묘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재는 남아있지 않다.

 

 

또 다른 설은 우희의 묘가 안휘성 화현(和縣)에 있다고 한다.
그곳에는 삽화산(揷花山)이 있고 산 위에는 묘(廟)가 세워져 있는데 ‘삽화묘’ 혹은 ‘노비묘(魯妃廟)’, ‘우희묘’라 하기도 한다. 청(淸) 도광(道光) 연간에 편찬한 『화주지(和州志)』에 보면 “미인 후의가 자진한 후 항우가 그의 머리를 말의 목에 걸고 포위를 뚫고 말을 몰아 산 아래에 이르렀다. 우의의 머리에 꽂혀 있던 난화(蘭花)가 떨어졌는데 후세 사람들이 산 이름을 삽화라 불렀다.”고 기록돼 있다.

 

청대 주이존(朱彛尊)은 『오강알항왕사제명(烏江謁項王祠題名)』에 “항왕의 사당에서 10리를 가면 음릉(陰陵) 고도다. 우희의 묘가 있고 묘 앞에는 사당이 있다. 기도를 드리는 촌민들은 제사를 지내는데 반드시 꽃을 꽂아 표시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희와 관련된 그곳의 전설을 이렇다.

 

항우가 해하에서 포위되자 우희가 자진했다. 항우는 그녀의 시신을 방치할 수 없어 우희의 몸은 땅에 묻고 우희의 머리를 가지고 강동으로 돌아가 후하게 장례를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화현 음릉산에서 한 농부의 농간에 속아 큰못(화현 홍초호[紅草湖])에 빠져 한나라 군사의 추격을 받게 됐다. 이때 항우에게 28기의 기마대만 남아 있어 포위망을 쉽게 뚫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어쩔 수 없이 우희의 머리를 음릉산 남쪽 작은 산에 묻었다. 후세 사람들이 우희를 기념하기 위해 산 위에 묘지를 만들고 묘(廟)를 세웠다.

 

이외에 강소(江蘇)성 강포(江浦)현에도 우희의 묘가 있지만 진짜인지 가짜인지 알 길이 없다. 현재 강포현 남쪽 30리 쯤에 ‘난화향(蘭花鄕)’이 있고 난화향 남쪽 7리에 교림(橋林)진이 있는데 그 서쪽에 ‘실희교(失姬橋)’가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항우가 해하에서 포위망을 뚫고 현 강포현의 난화향까지 도망을 쳤는데 한신(韓信)의 군대와 맞닥뜨려 혼전을 벌였다. 우희는 난화를 무척 사랑하여 항상 난화를 머리에 꽂았지만 그때 그녀의 머리에는 벽옥 난화 비녀만 꽂혀 있었을 뿐이었다. 창검이 난무하는 와중에 그만 머리에 꽂아두었던 난화 비녀가 연못에 떨어져 버렸다. 그때부터 그 연못과 부근의 기슭에는 난화가 만개했다. 해마다 온통 난화가 피어 사람들을 미혹시켰다. 그래서 그 연못을 난화당이라 부르고 그 지방을 난화향이라 불렀다고 한다.

 

 

패왕은 우희 등을 데리고 어렵사리 한신의 포위를 뚫고 7리쯤 지나 자그마한 다리 옆에서 숙영을 하였다. 항우는 무척 우울해했다. 우희가 그 광경을 보고 칼춤을 추며 항우의 기분을 풀어주려 했다. 춤을 추면서 항우에게 말했다. “대왕이시여 옥체를 보중하소서. 신첩은 먼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자진했다. 항우는 비통하여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바로 그때 한 병사가 한나라 군사들이 야습을 할 것이라고 알려 왔다. 항우는 어쩔 수 없이 눈물을 머금고 우희를 다리 서쪽의 들에 묻고는 병사들을 거느리고 포위를 뚫고 도망쳤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그 다리를 ‘실희교’라 부르면서 우희를 기념하게 됐다고 전한다.

 

우희의 무덤은 과연 어디에 있을까? 위 4가지 관점은 역대 사료나 문인들의 기록, 그리고 옛 자취에 근거한 것이라 나름대로 실증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재 우희의 묘가 어디에 있는지는 아직까지도 확정돼 있지 않다.

 

천하의 영웅과 운명을 같이 했던 절세미인의 흔적이 불분명한 것은 역사 속의 패자가 어떻게 대접을 받는지 대변해주는 것은 아닐까?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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