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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4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2200여 년 전 진시황이 중원을 통일한 후 10여 만 명을 동원해 현 섬서(陝西)성 임동(臨潼) 여산(驪山)에 자신을 위한 거대한 능을 건축했다. 능 주위에 고령토로 구워 만든 ‘병마용(兵馬俑)’을 만들어 묻어 놓았다. 그 거대한 능은 36년이라는 세월을 허비해 완성시킨 개인을 위한 지하 궁전인 셈이다. 사람들은 아직 발굴하지 않은 진시황릉에 숨겨진 비밀에 주목할 뿐만 아니라 그곳에 묻혀있는 진시황의 죽음 자체에 대해서도 비밀의 장막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진시황의 죽음과 관련한 많은 기록이 『사기』에 보인다. 「진시황본기」, 「이사열전」, 「몽념열전」등에 사인은 분명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돼 있다. 병사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시황 사망과 관련된 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의미심장한 부분이 많다. 결론부터 말하면 진시황의 죽음 뒤에는 환관 조고(趙高)가 있다.

 

시황 37년(기원전 210) 진시황은 다섯 번째 순유(巡遊)를 한다. 이사(李斯), 호해(胡亥), 조고(趙高) 등이 따르고 몽의(蒙毅)도 수행했다. 이때 조고를 중심으로 중국 역사상 거대한 정변이 발생한다.

 

수행원 중 몽의가 군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몽이는 몽념(蒙恬)의 친동생이고 진시황의 심복이었다. 그러나 진시황이 병을 얻었을 때 몽의는 자리에 없었다. 산천(山川)의 신에게 제사지내도록 파견됐기 때문이다. 순유 중에 병권을 쥐고 있는 심복인 몽의를 제사라는 명목으로 황제와 떨어지게 하였다? 이는 조고의 계략이라 본다. 진시황이 가장 신임하는 몽의의 친형 몽념은 군사 30만을 거느리고 부소(扶苏)와 함께 함양을 지키게 하고 그를 대신해 진시황과 함께 순유를 따르던 몽의를 멀리 떨어지게 만든 것은 바로 태자 부소의 눈과 귀를 없애 버리기 위한 조고의 계략이라는 것이다. 일찍이 조고는 몽의에게 죄를 범해 사형선고 받았었는데 진시황이 사면하면서 관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조고는 몽념, 몽의 형제에게 원한이 골수에 사무쳐 몽 씨 일족을 주살할 음모를 가지게 됐을 것이라 본다.

 

조고는 환관이라 궁정의 어거(御車)와 어신(御信), 묵서(墨書)를 관장했다. 진시황의 마지막 순유에도 중거부령(中車府令)이란 직책을 담당하고 있었다. 황제 명령과 군대 이동의 근거가 되는 ‘부(符)’와 ‘새(璽)’도 조고가 가지고 있었다.

 

황제의 순유는 순탄하게 질행되다가 평원진(平源津)에 이르러 진시황이 병을 앓는다. 조고는 명령을 받아 유서를 썼다. 진시황의 장자 부소에게 황위를 물려준다는 유서를 발송하기도 전에 진시황은 어쩔 수 없이 사구(沙丘 :현 하북[河北] 황종[廣宗]현 북쪽)로 행궁 하였다. 진시황의 소식이 알려져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승상 이사는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았다[秘不發喪(비불발상)].” 시체를 어가에 놓아둔 채 일상처럼 음식을 올렸다. 행군을 빨리하라면서 한편으로 조고에게 진시황의 유조를 장자 부소에게 보내라고 했다.

 

그러나 조고는 부소가 황위를 계승하기를 원치 않았다. 부소는 올바른 인물이라 아첨하며 떠받드는 조고를 좋아하지 않았다. 반면 진시황의 18번째 아들인 호해(胡亥)는 조고에게 법률을 공부한 적이 있었다. 사제 관계인 것이다. 두 사람은 의기투합한다. 조고는 호해를 황제에 앉히려 했다. 실질적으로 자신이 전권을 휘두를 수 있도록. 그렇게 정권 탈취의 음모를 꾸민다. 이를 실현시키기 위해 진시황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조서를 함양으로 보내지 않았다. 호해를 동원하여 이사를 위협도 하고 설득도 하여 3인이 함께 공모한다. 결국 진시황의 조서를 위조하여 호해를 황위에 앉히기로 했다.

 

동시에 진시황의 명의로 부소에게 ‘불효’를 이유로 자살하도록 했고 몽념으로 하여금 ‘불충’의 죄를 씌워 자결하도록 했다. 『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부소가 그 편지를 뜯어보고 울면서, 내실로 들어가 자살하려고 했다. 몽념은 부소를 만류하면서 “폐하는 궁 밖에 계시며 아직 태자를 책봉하지도 않으셨고 저로 하여금 30만 대군을 거느리고 변방을 지키게 하셨으며 공자께서 이 군대를 감독하게 하셨으니 이는 천하의 막중한 임무입니다. 지금 사신 한 사람이 왔다고 바로 자살하신다면 어떻게 그 진위를 알 수 있겠습니까? 다시 용서를 간청하고 간청하신 뒤에 자살해도 늦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사자가 여러 번 자살을 독촉했다. 부소는 사람됨이 어진지라 몽념에게 “아버지께서 자식에게 죽음을 내리셨는데 어찌 다시 용서를 간청하겠소?”라고 말하고 자살했다. 몽념이 죽지 않으려 하자 사자는 곧 옥리에게 넘겨 그를 양주(陽周)에 감금했다.(「이사열전」)

 

이렇듯 음모가 거반 성사됐으면서도 계속해서 신민을 속이고 함양의 일이 평정될 때까지 순유한다는 모양새로 사구에서 태원(太原)을 경유 함양으로 삼사천 리의 거리를 돌아갔다. 여름이라 고온 때문에 진시황의 시체는 이미 부패해 시취(尸臭)가 풍겼다. 대중의 눈을 속이기 위해 많은 생선들을 사서 수레에 싣고 시취를 숨겼다고 한다. 그렇게 쉬웠을까?

 

 

사실 진시황이 어디에서 죽었는가에 대해서는 역사적인 논쟁이 벌어진 적은 없다. 대부분 일치한다. 『사기』에는 “시황은 사구평대(沙丘平臺)에서 붕(崩)하셨다.”라고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다. 사구평대는 어디인가? 『사기․정의』에 “사구는 형태 평향현 동북 이십 리에 있다.”고 돼 있고 『사기․집해』에는 “사구는 장안에서 이천여 리 떨어져 있다. 조나라 때에 사구궁(沙丘宮) 기록이 있는데 무령왕(武靈王)이 죽은 곳이다.”라고 돼 있다.

사구궁은 원래 조(趙)나라의 궁전이었다. 기원전 299년 조나라에 정변이 발생한다. 한때 이름을 떨쳤던 무령왕이 반역자들에 의해 사구궁에 구금된다. 모든 궁 안의 사람들은 내보내지고 음식도 들이지 않았다. 3개월 후 궁문이 열렸을 때 무령왕은 대전에서 굶어죽은 상태였다. 『사기․제태공세가』에는 “환공(桓公)의 시체가 침대 위에 있었는데 67일이 지나자 충(蟲)이 문밖으로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충(蟲)’은 살이 썩으면서 생성되는 충저(蟲蛆)를 말한다. 『한서․진만년전』에 교사된 자가 수백수천에 달했는데 ‘오래된 자에게서는 부패되어 충이 나왔다’라는 기록이 있다. 『여씨춘추․지접』에 환공이 ‘충류(蟲流)가 문밖으로 나왔다’라는 기록도 보인다. ‘충류’는 살이 썩기 전에 흘러나오는 시수(屍水)다. 조 무령왕이 사구궁에서 참사되고 3개월간 장례도 매장도 하지 않았다. 당연히 ‘시수(屍水)’와 ‘시충(屍蟲)’으로 천지가 범벅됐고 ‘시취(屍臭)’가 온 세상을 덮는 참상이 벌어지게 된 것은 당연하다. 조고에 의하여 이 ‘시체의 궁’으로 모셔졌을 때 진시황은 자신의 죽음이 도래했다는 것을 알았을까.

다시 질문을 던져 보자. 처음부터 가장 가까이에서 진시황을 모시던 환관 조고는 이미 몰래 찬탈 음모를 꾸미고 있었을까? 결론은 그렇다 이다. 진시황의 순유는 진나라 국도 함양에서 멀리 떨어지게 되기에 정변을 일으키기 가장 좋은 시기가 된다. 진시황이 순유 때 무관(武關)을 나서 남양(南陽)을 경유하고 운몽(雲夢)을 거쳐 형산(衡山)에 오른다. 전당(錢塘)을 지나 대우(大禹)에 제사지내고 오중(吳中)으로 가 검지(劍池)를 팠다. 장강(長江)을 건너 감유(贛楡)로 가고 낭야(琅邪)에서 놀다 지부(芝罘)에 오른다. 일만여 리의 여정에서 건강에는 이상이 없었다. 평원군(平原郡 : 현 산동성 덕주[德州])에 도착했을 때 몸이 좋지 않자 진시황은 속도를 높이라고 한다. 하루빨리 한단(邯鄲)으로 가려 했다. 그곳에서 한동안 조용히 휴양하려 한 것이다.

 

사실 한단은 진시황에게는 특별한 곳이다. 그의 출생지이고 모친의 고향이다. 그의 부친 장양왕이 오랫동안 거주했던 곳이다. 그곳에는 어린 시절 추억이 있다. 그러나 조고는 달랐다. 진시황이 한단에 도착하게 해서는 안 됐다. 가장 좋은 것은 한단에 도착하기 전에 진시황이 죽는 것이다. 그래야만 일련의 음모를 성사시킬 수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가볍게 언급하는 방식으로 진시황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또 함양으로 돌아오는 모든 과정에 대해 가장 중요한 역사 사실 하나를 소홀히 했다. 진시황은 혹서기인 7월에 사구에서 죽었는데 혹서기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조고 등 5, 6명이 진시황이 죽은 소식을 알았다고만 적었으면서 ‘비밀로 하여 발상하지 않았다[秘不發喪]’고 돼 있다. 비밀로 할 수 있었을까? 사구는 구원(九原, 내몽고 오원현[五原縣])에서 3천 여리나 떨어져 있고 구원에서 함양까지 2천여 리인데 진시황이 건재하다는 모습을 보일 수 있었을까? 진시황의 시체가 협소한 온량거에 놓여 있었다는데 부패한 생선으로 함께 순유하고 있는 문무백관들을 속일 수 있었을까? 순유에 동행한 사람들이 진시황이 죽은 지 3개월 후 진나라 도성으로 돌아와 여산에 매장했다? 진시황의 유체는 여전히 수은이 충만한 지하궁전에 안장돼 있다? 만일 이것이 모두 사마천『사기』의 글이라면 분명히 모든 이들을 우롱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무튼 함양에 도착하자마자 진시황의 사망 소식을 공포하고 발상하고 출빈한다. 그리고 곧바로 호해를 황제로 옹립하였는데 그가 바로 진2세(秦2世)다. 조고는 낭중령(郎中令)에 오르고 이사는 계속 승상을 맡는다. 조고는 목적을 달성한 이후 제멋대로 한 시기를 풍미했다. 그는 진2세에게 참언하여 몽 씨 형제를 없애고 공자들을 주살하였으며 이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이사가 조고의 음모를 알아차린 후 조고를 고발하는 상서를 올렸다. 그러나 진2세는 조고를 두둔하고 이사를 감옥에 가둬 치죄한 후 결국 이사를 함양에서 요참(腰斩 : 허리를 잘라 죽이는 형벌)했다.

 

 

이처럼 조고가 정권을 찬탈한 과정을 보면 앙심을 품고 악랄한 수단을 마다하지 않는 인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진시황은 어릴 때부터 병이 있어 건강이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사람됨이 독단적으로 일을 처리하기를 좋아해 작은 일이나 큰일이나 친히 처리했다. 매일 120근이나 되는 문서를 열람했다 했으니 그 피로의 누적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순유를 날씨가 더운 7월에 떠남으로써 도중에 병이 났다는 것은 이해될 수도 있다. 그러나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일순간 황천길로 갔다는 데에는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품을 수밖에.

 

곽말약(郭沫若)은 역사소설 『진시황의 죽음』에서 시황이 평원진에서 황하를 건널 때 광질 발작을 일으켜 머리통을 청동병감(青銅冰鑒)에 부딪쳤고 뇌막염과 같은 병이 생겨 혼미한 상태로 빠져들었다고 했다. 사구로 급히 이동하였으나 이튿날 조고, 이사가 찾았을 때는 진시황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고 오른쪽 귀에서 검은 피가 흘렀으며 귀속에는 커다란 철침이 박혀 있었다고 묘사했다. 이 소설은 사람들이 진시황의 죽음이 비정상적인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누가 음해했을까? 소설은 호해를 지목했다. 그러나 조고가 모해했을 가능성이 호해보다는 크다. 조서, 옥새가 모두 조고의 손에 있었고 황위 계승을 결정할 권한은 그와 이사의 수중에 있었기 때문이다. 만약 호해가 친부를 시해했다고 하더라도 조고와 이사의 승인을 받지 않았다면 황위를 이어받을 수 없었을 것이고 도리어 목숨을 잃는 재앙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또 조고는 늘 황제의 곁에 있었기 때문에 기회를 틈타 흔적을 남기지 않고 시해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왜 조고는 진시황을 시해했을까? 조고는 부소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을 두려워했다고 본다. 조고는 이사에게 “장자는 강직하고 용감하며 믿음이 있고 투사의 기질이 있어 분명 몽념을 승상에 앉힐 것이다.”라고 했다. 그리고 조고는 몽념, 몽의 형제에게 천추의 한을 품고 있었다. 그렇다면 몽 씨 형제를 신임하고 있는 부소가 황제 자리에 앉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시황도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인물이라 결코 부소를 버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 폭군의 목숨을 취해야만 호해를 옹립할 수 있을 것이라 봤을 수도 있다. 진시황은 평상시에 구중궁궐 속에 거처했으며 경비도 삼엄했던 관계로 다른 방도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순유 도중 병을 얻어 쓰러졌으니 하늘이 내려준 기회가 아니었겠는가. 조고는 호해에게 “의심하여 주저하면 반드시 후회만 남습니다. 결단하여 과감하게 실행하면 귀신들도 피해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강권했다. 그래서 호해는 과감하게 진시황에게 독수를 써서 목숨을 앗아갔다고 했다. 이럴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

 

그렇다면 조고는 이런 시해의 음모에 정말 가담했을까? 그는 호해에게 “신이 듣기로 탕왕과 무왕은 각기 자신의 군주를 죽였지만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의롭다고 할 뿐 충성스럽지 못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위나라 군주는 자기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지만 백성은 그 덕을 받들었고 공자도 춘추를 지으면서 불효라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하였다. 조고는 시군(弑君)의 의론을 펼칠 뿐만 아니라 나중에 공개적으로 시군을 실행에 옮긴다. 조고는 중승상이 앉고 나서 얼마 없어 대택향(大澤鄕)에서 진승(陳勝), 오광(吴廣)이 농민봉기를 일으킨다. 그러자 조고는 천하가 혼란에 빠졌으니 시기가 도래했다고 생각하고 황위를 찬탈할 생각을 했다. 그는 대신들이 불복할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말을 따를지 않을지 실험해 보기로 한다. 그것이 유명한 ‘지록위마(指鹿爲馬)’의 익살극이다.

 

 

하루는 조고가 사슴을 끌고 함양 황궁에 입궁하여 진2세에게 바치면서 말이라고 했다. 진2세가 듣고는 아무 생각 없이 대소하며 어찌 사슴을 말이라 하느냐며 승상이 틀렸다고 했다. 그리고 좌우의 신하들에게 사슴인지 말인지를 물었다. 신하들 중에는 조고에서 죄를 얻을까 두려워 아무 대답도 하지 않는 자들도 있었고 아부하기 위해 그냥 말이라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사실을 존중하여 사슴이라 직언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나중에 조고에 의해 해를 당했다. 묵묵부답한 자들이나 조고에게 아부하기 위해 말이라고 한 자들은 조고에 의해 중용됐음은 말할 필요 없고. 조고는 여론을 정리한 후 그의 사위인 함양령 염락(閻樂)에게 사병 천여 명을 끌고 도적을 소탕한다는 명분아래 망이궁(望夷宫)으로 들어오도록 했다.

 

염락은 공포에 떨고 있는 진2세에게 죄상을 얘기하고 자살하라고 했다. 진2세는 애절하게 살려달라고 했으나 염락은 아랑곳하지 않고 병사들에게 호해를 에워싸라 명하자 호해는 그제야 자진했다. 당시 조고는 옥새를 가지고 대전으로 가 황제에 오르려 했으나 군신들이 불복하자 어쩔 수 없이 호해의 형의 아들인 자영(子嬰)을 앉혔다. 이런 조고의 행위를 봤을 때 그 사람됨이 잔인하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가 군주를 시해했다는 것이 그만큼 가능성이 많다는 얘기다. 그렇게 온갖 못된 짓만 일삼던 조고도 결국은 자업자득, 자영에 의해 척살당하고 3족이 멸한다.

 

진시황의 죽음은 궁정 정변이었다. 그 정변은 조고에게서 시작됐다. 조고는 모든 것을 계획해 자신의 운명을 바꿨으며 다른 사람들을 지배했다. 부소, 몽염, 몽의, 이사, 호해 등은 그 지배의 희생물이었다. 조고가 모든 것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시황을 지배해야 했다. 그러나 진시황은 영걸이었기에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호가호위했고 자신의 음모가 실현될 때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살아있는 진시황을 지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음으로 몰아갔고 그의 죽음으로 인해 진시황의 이름을 빌려 천하를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다만 조고가 어떻게 진시황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는지는 아직까지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물론 진시황의 사인에 대해서는 정론이 없다. 피살되었을까 아니면 병사했을까? 어쩌면 영원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 있을 수도 있다.

 

 

 

『사기․은본기』의 기록에 따르면 상나라의 주(紂)왕은 “사구(沙丘)의 정원과 누대를 늘이고 들짐승과 새들을 그 속에 넣어두고는 귀신에게 제사지내는 것은 소홀히 하며 사구에서 놀고 즐겼다.”고 했다. 『사기․조세가』에는 조나라의 국군 무령왕이 “나가려고 했으나 나가지 못하고 먹지도 못했다. 3개월여 만에 사구궁에서 굶어죽었다.”고 기록돼 있다. 이를 보면 사구궁은 악명이 자자한 주왕이 황음무도하고 잔혹한 정치를 펼치다가 망국에 이른 곳이다. 전국시대 제후인 조나라 무령왕이 반역자들에게 유폐돼 죽음을 맞이한 곳이기도 하다.

 

진시황은 어려서부터 부친을 따라 조나라의 도성 한단에서 장기간 거주했으므로 사구궁의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사구궁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비참한 죽음의 이야기를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곳이 정변의 궁, 공포의 궁, 사망의 궁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진시황은 중원을 통일한 후 각 제후국의 거대 궁전 145개를 모조리 철거하고 모든 목재와 다른 건축 재료를 함양으로 운송했다. 그리고 북판(北阪) 지역에 원래 모양대로 중건했다. 오직 사구궁만은 피비린내가 자욱했기에 남겨두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사람이 사용하지 않아 점점 쇠락했다.

사람이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혼자 사구궁 안에 갇혀 있다면, 그 비참함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백골 위에 각종 새똥이 가득하다. 전체 궁전은 음침한 바람과 음침한 비, 그리고 들풀, 마른 나무와 낙엽을 제외하고 아무 것도 없었다. 진시황은 시급히 한단의 옛 땅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조고는 그를 그 모골이 송연한 살인의 궁으로 데려갔다. 그리고 직접 무령왕이 세상을 떠난 대전으로 데리고 간다. 진시황은 이미 조고에 의하여 귀문으로 끌려왔다는 것을 알지 않았을까? 정변의 시작이라는 것을 몰랐을까? 그리고 자신이 개창한 제국이 와해되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몰랐을까?

 

진시황은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은 이미 늦어 버렸다. 분노의 눈, 부들부들 떨리는 몸 이외에 진시황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무서운 사구궁에서 진시황의 일생은 그렇게 조고에 의해 끝이 났다. 어쩌면 통일제국이란 명목 아래 죽임을 당했던 셀 수 없이 많은 원혼들이 어서 오라고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을 수도…….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중국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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