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금)

  • 흐림동두천 1.0℃
  • 흐림강릉 1.3℃
  • 서울 3.2℃
  • 대전 3.3℃
  • 대구 6.8℃
  • 울산 6.6℃
  • 광주 8.3℃
  • 부산 7.7℃
  • 흐림고창 6.7℃
  • 흐림제주 10.7℃
  • 흐림강화 2.2℃
  • 흐림보은 3.2℃
  • 흐림금산 4.4℃
  • 흐림강진군 8.7℃
  • 흐림경주시 6.7℃
  • 흐림거제 8.0℃
기상청 제공
검색창 열기

[인사이드제주] 물질에 푹 빠져 사는 ICC jeju 전 대표이사 허정옥 교수

 

"제주 해녀의 본질은 어머니 정신이에요"

시원한 가을 바람과 높은 파도가 치는 서귀포 바다! 물질을 마치고 나온 그녀는 지친 얼굴이라기 보단 개운한 표정이었다.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  대표이사를 지낸 허정옥 서울과학종합대학원 교수. 아침 물질을 마치고 나온 그녀를 보목포구에서 만났다.

잠수복에 테왁과 망사리를 둘러매고 바다에서 나오는 그녀를 보면서 바다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에게 경영학을 가르치는 교수이자 ICC jeju의 대표이사가 주는 세련된 이미지와 달리 그녀는 영락없는 해녀의 모습이었다.

너무나 자연스레 해녀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줄은 몰랐던 터라 의구심이 들었다. “어떤 계기로 물질을 하시게 됐어요?”

“2009년에 한수풀 해녀학교를 졸업했구요. 올해 법환동 좀녀학교도 1기로 졸업했어요”

 

매주 3시간씩 해녀 인턴십을 12월까지 마치고 나면 내년부터 어촌계와 수협에 등록해 해녀들과 함께 자유 조업을 할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쳤다.

이 대답만으로는 단지 해녀학교 출신으로만 여겼다.

이를 의식한 듯 허 교수는 "살면서 공부말고 1만시간 이상 공들인 건 물질이 유일해요. 물질을 하고 있으면 고향 같은 느낌이고 몸도 개운해지고 시원한 느낌이 들어요."

알고 보니 허 교수는 어린 시절 고등학교에 가기 전 16살 때까지 물질을 했다. 더 어린 시절엔 물질을 못하더라도 바닷가에서 미역 등을 주으며 일하는 듯 노는 듯 지냈단다.

허 교수의 어머니는 30년 전까지 해녀였다. 대포마을의 '1등 상군'이었다. 어머니의 물질로 허 교수도 자연스럽게 물질을 하거나 밭일을 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불가피했다.

 

 

허 교수는 어린 시절 어머니의 물질을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의 물질은 노상 가슴 졸이게 하는 두려움을 자아냈다. 숨이 모자라서 못나오면 어떡하나, 파도에 휩쓸리면 어떡하나, 바위에 부딪치면 어떡하나. 하지만 테왁이 움찔거리는 순간,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미는 어머니가 ‘호이, 호오이’ 하고 숨비소리를 토해내면, 나도 같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어머니를 따라 참았던 호흡을 내지르면서 해녀를 배우던 대포바다는 상군을 그리던 내 어린 시절, 꿈의 무대였다. 어머니가 망실이 가득 소라와 전복, 문어 등을 매고 화안하게 웃으시며 파도를 잡아 제치고서 ‘날 보아라’ 올라오시는 모습은, 그야말로 위대한 전사와도 같았다."

“어른 들이 제가 물질을 하기에 맞는 신체구조를 가졌다고 이야기 하곤 했어요. 손과 발이 큰 게 잘 어울린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으니까요”

그 덕이었는지 모르지만 중학교 때까지 바로 위 언니와 함께 물질을 하며 동네를 휩쓸곤 했다고 회상한다. 중3 때 이미 '하군' 수준의 물질을 했었다는 것.

"그 어머니의 그 딸처럼, 나는 동네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만큼 물질을 잘하기로 소문난 '애기좀수'였다." 허 교수의 표현이다.

순간 허 교수의 손을 쳐다봤다. 그의 말대로 어린 시절부터 단련된 덕인지 새까맣고 커다란 손이 눈에 띈다.

이런 그에게 수 십년간 벗어나 있던 물질이지만 돌아와야 할 고향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렇다고 마냥 물질이 당연하지만은 아닐 터.

“탐라대에서 교수를 하던 중 ICC jeju의 대표이사 제의가 왔어요. 학칙상 휴직을 못해 3년간 대표이사를 했고 임기를 마치고 나니 실업자가 되더라구요.”

이후로 쉽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어렵게 서울종합과학대학에 자리를 잡았는데 5년간 매주 서울을 오가는데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는 설명이다.

“아이는 아이들 대로 힘들어하고, 모시고 사는 어머니도 힘들어 하셨지요. 제 건강도 나빠졌구요.”

5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니 모든 게 어려워졌다는 그녀는 그 때 어린시절 어머니와 함께 물질을 하던 때를 생각하게 됐다.

“고난이 올 때마다 어머니 생각을 해요. 어머니가 물질 하던 것의 절반만 하면 뭐든 잘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하곤 했죠.”

 

 

그런 그에게 “모든 걸 내려놔야겠다. 본질적으로 물질을 해야 할지도 모른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사도 해봤는데 뭐가 문제야. 교수였다는 직함도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살면 되지."

물질이 제2의 인생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그러고 나니 맘도 편해지고 건강도 좋아지고 식구들도 챙길 수 있게 됐다.

그가 기뻤던 건 해녀학교를 다니면서 보니 자신의 물질 기량이 없어지지 않았다는 사실.

“요즘도 다른 해녀들이 자신들과 같이 작업해도 된다고 걱정말라고 한다”며 그녀는 즐거워했다.

생각이 바뀌니 해녀들이 하는 일이 새롭게 다가왔고 나름 욕심이 생겼다. 어린 시절에야 먹고 살기위해, 어머니를 돕기 위해 악착같이 물질을 했지만 지금은 해녀들의 삶을 찬찬히 살피게 되고 그 속에서 많은 것을 깨닫는 자신을 보게 됐다.

그는 해녀들의 정신에 인간의 기본 품성이 담겨있다고 말한다.

“제주 해녀의 본질은 어머니 정신이에요. 저의 멘토이신 상군 해녀는 제가 하는 것을 보면 지친다고 소라를 잡아 먹여주곤 하세요. 그게 어머니 정신이지요. 본인은 입에도 안 대거든요. 자유물질을 할 때에도 공동어장의 것은 손에 대지도 않거든요.”

그는 해녀의 모습에서 정직함. 도전정신, 부지런함, 노력, 선한 품성을 본다.

여기까지 이야기 하다보니 어느새 ‘교수는 교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간간히 해녀정신을 모티브로 특강을 할 때가 있는데 반응들이 아주 좋아요. 그 정신들이 기업가들에게도 아주 좋은 모티브가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는 해녀학교 역시 실물을 배우는 체험과 함께 해녀들의 정신을 바탕으로 CEO교육이나 청소년교육이 함께 이뤄지면 복합적이고 다차원적인 해녀학교의 교육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강변한다.

 

 

“제 멘토를 모시고 물질을 하다 보면 정말 정직하고 곧이 곧대로 일하는 걸 봐요. 숨을 참아가며 죽을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6시간 동안 똑 같은 행동을 반복하는 일을 누가 쉽게 할 수 있겠어요. 성취감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지요. 특히 해녀들의 문화에는 제주도의 정신과 습관, 말, 식습관들이 그대로 살아있는데 이를 잘 보전하고 가르치는 일이 필요한 거지요. 그러면 해녀학교가 훨씬 의미 있는 문화학교가 될 수 있다고 봐요”

그는 멘토가 자신에게 결코 일을 강요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저의 멘토는 언제나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되 결코 무리하지는 말라’고 가르쳐요. 그리고는 말로만 하지 않고 앞서서 시범을 보여주시죠. 이런 말을 듣고 그 모습을 보면 저 역시 힘이 나서 120%의 노력을 하게 되지요. 이게 해녀들의 전문가 교육방식이기도 해요”

그의  해녀문화 칭찬은 어느새  문화의 변화로 이야기를 옮겨가지 시작한다.

“해녀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려면 가장 중요한 게 지속가능성이에요. 시대가 변해도 지속적으로 해녀 충원이 되고 가능해야 하잖아요. 그런 점에서 과거에 물질이 비장한 일이었다면 이제는 좀 더 즐거운 문화로 자리잡아야 해요. 해녀학교가 그런 문화를 만들어줘야 하는 의미도 있구요”

그는 스위스의 호텔학교가 호텔경영만이 아니라 정신을 가르치듯 해녀학교가 기술적인 부분과 함께 해녀문화를 가르칠 수 있는 자리매김을 함께 해 줄 수 있기를 기대한다. 그게 앞으로 그가 해녀 생활을 계속 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확신하는 듯 했다.

 

순간, 그가 뭔가 잊었던 말이 생각난 듯 말을 바꿨다.

“매년 여러 명의 해녀들이 물질을 하다가 아까운 목숨을 잃어요. 수영장에 안전요원이 늘 대기해 불의의 사고를 예방하는데 해녀들이 조업할 때는 왜 누군가는 지켜주지 않는 거죠? 사고나지 않게 지켜줘야 할 거 아닌가요? 매년 많은 분들이 바다에서 돌아가시는데…”

그가 해녀 정신의 의미를 이야기하면서 보였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안전사고와 관련해서는 안타까움을 담은 높은 언성과 함께 단호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그의 기원이 서귀포의 바람을 타고 제주도 전역에 퍼져가고 있다. 허 교수는 그 마음으로 요즘도 '물질'에 제2의 삶을 걸고 있다. [제이누리=이재근 기자]

 

추천 반대
추천
0명
0%
반대
0명
0%

총 0명 참여


배너

배너
배너

제이누리 데스크칼럼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실시간 댓글


제이누리 칼럼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