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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준의 '아버지로 살기, 아버지로 죽기'(5)···'눈물'의 가르침 백무범 선생님

내가 만난 아버지 중에 우는 아버지는 없었다. 한숨을 쉬기도 하고, 술에 취하기도 하고, 소리를 지르는 아버지는 봤지만 우는 아버지는 본 적이 없다. 남자는 울 수 있지만 아버지는 울 수 없는 것인지, 아버지의 눈물을 본 적이 없다. 그런데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담임이셨던 백무범 선생님의 눈물이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선생님들 같았으면 반 아이들을 개 패듯 팼을 상황이었던 것만은 기억난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아이들을 때리기는커녕 혼자 자책하며 우셨다.

 

“다 내가 너희들을 잘못 키운 탓이다.”

 

선생님께서는 교실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몽둥이를 교탁 위에 올려놓더니 이 말을 끝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으셨다. 60명이 넘는 반 아이들을 모아놓고 길게 한숨을 쉬시더니 아무 말 없이 한참을 천장을 바라보셨다. 그리고 우리는 봤다, 어느 순간 선생님의 두 볼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누가 먼저였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교실 바닥에 무릎을 꿇기 시작했다. 그리고 말없이 선생님을 따라 울기 시작했다. 어두워져가는 교실이 눈물바다가 됐다. 그 모습을 지켜보시던 선생님은 조용히 나가버리셨다. 우리는 그 후에도 한참 동안 무릎을 꿇은 채 울었다. 그걸로 끝이었다. 선생님은 우리의 잘못을 모두 용서하셨고, 우리는 선생님의 눈물이 어떤 매보다 매웠음을 그 때 알게 되었다.

 

매보다 손과 발이 먼저였던 그 때, 선생님께서는 매도 체벌도 아닌 눈물로 생몰(야생마) 같은 우리를 길들이셨다. 선생님께서 그때 왜 매나 체벌이 아닌 눈물이란 방법을 택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다. 원래 선비나 군자 같은 분이시긴 했지만 야생마인 우리에게도 눈물, 감동이 통할 것이라고 생각하셨던 것일까? 당장은 매가 효과적일지 모르지만 눈물의 약효가 더 지속적일 수 있음을 아셨던 것일까? 아니면 매를 맞고 죗값을 다 치렀다고 판단하고 더 엇나갈 것을 미리 알고 계셨던 것일까? 20년 넘게 선생을 했고, 그 때 선생님 나이보다 더 산 지금의 나로서도 짐작하기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날 선생님의 눈물은 우리의 잘못을 스스로 깨닫게 했고, 감동시켰고, 변화시켰다. 매보다 더 아픈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셨다.

 

그 후 우리는 선생님의 매를 두려워하기보다 눈 밖에 나는 짓을 해서 선생님 마음을 아프게 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그 날 선생님께서 매로 우리를 벌하셨다면, 다른 선생님들에게 그랬듯이, 선생님의 눈을 피해 엉뚱한 짓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러나 매가 아닌 선생님의 자책의 눈물에 감화된 우리는 선생님의 눈보다 더 무서운 게 있음을 알게 된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마음의 눈, 양심이란 것이었다. 남들이 보든 안 보든, 남들이 알든 모르든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조심 또 조심했다. 어떤 일이 터지거나 문제가 생겼을 때 선생님께서 결국 알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혼내는 대신 혼자 괴로워하거나 아파할 것이기 때문에 애초부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주의했다. 야생마들이 길길이 날뛰는 소란하고 혼잡했던 교실이 가라앉기 시작했고, 매와 체벌이 난무하는 살벌하기만 했던 수업시간이 바뀌기 시작했다.

 

“야, 너희들 왜 이래? 갑자기 안 하던 짓 하면 죽는다던데……”

 

갑자기 바뀐 우리의 태도와 수업 분위기에 비아냥거리던 선생님들도 차츰 우리를 인정하기 시작했고, 우리는 양심의 힘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하며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노력함은 물론 해야 할 일을 찾기 시작했다.

 

그 일이 있고 난 얼마 후, 나를 비롯한 반(班)친구 몇이 방과 후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2학년 말, 충격적인 사건―성적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음악선생님의 편견―을 겪고 난 후 성적(成績)으로 보복하고 말겠다는 생각으로 방과 후 교실에 남아 공부하기 시작한 나는 3학년이 되어서도 계속하고 있었다. 교실에 전등이 없어서 어두워지면 끝내야 하긴 했지만 매일 하는 일이라 얼마간 성과가 드러나고 있었다. 반 친구들도 그걸 알고 있었다. 급상승한 나의 성적을 문제 삼은 한 선생님 때문에 나의 성적 상승 비결이 온 학교에 다 알려졌으니까. 반 친구들은 나의 결단과 독기를 부러워하기도 했고 시기하기도 했지만 함께 공부할 의사를 내비치진 않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직후 반 친구 몇이 결단을 내려 나와 함께 공부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아마도 선생님께 실망시켜 드리지 않기 위해, 선생님께 보답하기 위해 그랬을 것이다.

 

늘 수석을 유지하던 경훈, 수위권의 창수와 정우, 순정 등이 나와 함께 하기 시작하자 미적거리던 녀석들이 하나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물론 몇몇이서 몰래 하는 자습이라 처음에는 날이 어두워지면 마쳤다. 그러나 인원이 많아져가자 담임선생님께서 알게 되셨고, 전등까지 마련해주시며 우리들을 지원해 주셨다. 그리고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때까지 교무실에 남아 계시면서 가끔씩 교실을 들여다보시곤 하셨다. 도시락을 싸가는 우리들과는 달리 봉투에 쌀을 담아가지고 오셔서 숙직실에서 손수 저녁까지 지어 드시면서. 그 사실을 안 우리는 우리 반찬을 조금씩 모아 선생님께 가져다 드렸고, 선생님도 고맙다며 맛있게 잡수셨다. 가끔은 숙직실로 도시락을 들고 가 아예 선생님과 함께 맛난 저녁을 먹기도 했다.

 

“선생님, 힘들지 않으세요? 괜히 우리 때문에……”

 

어느 날 저녁을 먹다말고 한 녀석이 우물거리자 선생님께서는 그 녀석을 빤히 쳐다보시더니 말씀하셨다.

 

“부모한텐 제 자식 입에 뭐가 들어가는 것보다 더 배부른 일이 없어서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지. 요즘 내 마음이 그렇다. 너희들이 이렇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데 내가 힘들 일이 뭐 있어.”

 

선생님께서는 우리를 제자들이 아닌 자식으로 여기고 계셨다. 자식의 입에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만 배부른 일이 아니라 자식의 머리에 뭐가 들어가는 것도 배부른 일임을 강조하셨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우리는 입에 밥이 들어가지 않아도 배가 부를 수 있음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마침 학교를 뒤덮고 있는 밀감꽃 향기보다도 진한 꽃내음을 풍기며 솟아올랐다.

 

그러나 선생님과 우리들의 밀월여행은 오래 가지 못했다. 밀감꽃 향기가 시들어갈 때쯤, 우리의 밀월여행을 눈치 채신 교장선생님께서 3학년 전반으로 자율학습을 확대해 버린 것이었다. 처음에는 지원자만 자율학습하게 하더니 어느 순간 3학년 전학생을 대상으로 강제적인 자율학습, 타율학습을 강요했다. 3학년 담임선생님 한 분씩 남아 자율학습을 지도하고, 9시까지 자율학습을 실시하라는 것이었다. 잔인한 일이여! 공부가 싫은 친구들로부터 받은 비난은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타율학습이 시작되어서도 선생님께서는 매일 남아 우리 곁을 지켜주셨다. 다른 반 선생님들은 3일에 한 번씩 남아 타율학습 감독을 하셨지만, 선생님께서는 매일 남아 자율학습을 하는 우리를 곁에서 지켜주시고 지켜봐 주셨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 보답하기 위해 9시까지 타율학습을 하고 11시까지 다시 자율학습을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실 우리들은 떨거지였다. 우리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학군제를 실시한다는 낭설―조천중학교 출신은 제주시내에 진학할 수 없고, 모두 함덕상고로 가야한다는, 시내 학교에 전학시키는 학부모들이 악의적으로 흘린 소문―이 돌면서 좀 사는 집 아이들이나 공부깨나 한다는 아이들은 이미 제주시내로 유학하고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6학년 때 교대부국(제주교육대학 부속초등학교)이 개교하여 내로라 하는 아이들을 죄다 쓸어갔다. 그러니 조천중학교에 남은 우리는 돈도 실력도 없는 떨거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해 우리가 거둔 고입성적은 예년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었다. 여러 요인이 있겠지만 나는 백무범 선생님의 공이 가장 컸다고 생각한다. 아니, 백무범 선생님의 눈물과 말없는, 티 나지 않는 동행(同行)이 일등공신이라 생각한다. 그렇다고 그 해 고생하신 두 분 선생님의 공을 부정하거나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모든 변화의 시초에는 백무범 선생님이 계셨음을 상기하는 것이다.

 

자책의 눈물로 우리를 변화시키고, 늘 함께 함으로써 우리를 지켜주시고 지켜봐 주신 백무범 선생님은 나에게 스승의 도리와 아버지의 도리를 가르쳐 주셨다. 한 마디 말씀도 없으셨지만, 그윽한 눈빛과 다정다감하신 얼굴과 선한 몸짓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키워주셨다. 잊은 듯 살고 있지만 때때로 생각나 가슴 적시게 하는 훌륭한, 모범적인 아버지셨다. 언젠가 스승의 날에 선생님을 생각하며 지은 시 한 편이 있다. 그걸 이제야, 이 자리를 빌어 선생님께 바친다.
 

 

말 한 마디 끝내 하지 못하고

 

 

 

새순이 돋기도 전

 

아직은 추위 속에서도

 

여름날의 짙푸른 잎새들과

 

가을날의 튼실한 열매들을 예감하시고

 

조용한 미소로 바라보시던 당신

 

버려진 씨만이라도 넉넉하여

 

사시사철 공그르시고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는

 

무정란들도

 

늘 당신은 황송해 했습니다.

 

 

 

비 몰아치는 날

 

우리가 찾은 나무는 당신이었고

 

바람에 허물어진 돌담

 

다시 쌓기 위해

 

혼자 끙끙거리다 우리가 찾은 석수는

 

결국 당신이었습니다.

 

떠올리기만 하여도 넉넉한 당신

 

하여 우리는 다시 당신을 찾습니다.

 

 

 

꽃은 시들지만 너희들은 시들지 않는다.

 

언젠가 당신께서 들려주셨던

 

그러나 시들어 버린 우리들은 기억합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흰머리도……

 

 

 

선생님!

 

낮지만 결코 작지 않은 목소리로

 

오늘도 또 그렇게

 

당신을 부르고 당신을 찾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말 한 마디는 끝내 하지 못하고.

 

 

 

 

 

이성준은?

 

=제주 출생. 제주대 국어국문학과를 거쳐 단국대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작가회의, 단국문인회 회원이다. 제주와 경기도에서 20여년 간 고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시인으로도 등단, <억새의 노래>, <못난 아비의 노래>, <나를 위한 연가>, <발길 닿는 곳 거기가 하늘이고 세상이거니> 등의 시집을 펴냈다. 최근엔 창작 본풀이 <설문대할마님, 어떵 옵데가?>와 소설집 <달의 시간을 찾아서>를 내기도 했다. <이청준과 임권택의 황홀한 만남>, <이야기로 풀어가는 우리 시조>, <읽기만 하면 기억되는 고사성어 365>, <글쓰기의 이해와 활용>, <통섭의 자리에 서서> 등 다양한 전문서적을 펴내기도 했다. 1년 전 고향 제주에 돌아와 제주 관련 글들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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