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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기획>고봉식 전 교육감과 아들 병준 부자의 은퇴 후 삶 이야기
소외된 노인들 벗 삼아 행복인생 2막..."지혜를 일깨워주는 스승이 필요"

노구라는 게 실감나지 않았다. 92세란 나이는 진정 숫자에 불과했다. 곧 일흔을 바라보는 큰 아들은 마치 청년 같았다. 환한 미소가 그의 얼굴을 떠나지 않아 흡사 맑은 기운이 감도는 부처랄까?

 

고봉식(92) 전 제주도교육감과 그의 장남 고병준씨(65).

 

고 전 교육감은 제주교육사의 산증인이다. 1947년 오현중학교에 첫 부임, 사도(師道)의 길을 걸었던 그는 1988년까지 41년간 교육현장과 학생지도의 삶만 살았다. 교육감까지 올랐던 그는 은퇴 후 동려야간학교장, 한국예총 제주도지부장, 보이스카우트 제주도연맹, 제주국제관악제 조직위원장 등의 왕성한 활동을 했다.

 

그는 목포상고를 졸업했다. 故 김대중 전 대통령과 동문이다. 광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오현중학교 음악교사로 교육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오로지 중학교 시절 브라스밴드 단원으로 활동한 경험 때문이었다.

 

그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인 소령 길버트의 도움을 받아 오현고등학교에 관악대를 만들었다. 용장 밑에 약졸은 없었다. 오현고 관악대는 국내 음악교육계 주요 인사들의 발원지가 됐다. 오현고 관악대는 1976년 제1회 KBS배 전국관악경연대회에서 은상을 거머쥐는가 하면, 1953년 진주 개천예술제, 호남예술전 등에 참가해 12차례나 최고상을 휩쓸었다.

 

관악은 고 전 교육감의 분신이나 다름없다. 그 열정으로 제주국제관악제 초대 위원장을 지냈다. 현재는 제주국제관악제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예체능이 매우 중요했음에도 불구, 당시에는 먹고 살기 힘들어서 기능공을 배출하기에 바빴지. 그래서 1960년대 말 보이스카웃을 도입했어. 학생들에게 교실이란 울타리에서 벗어나 교과외 활동도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거든. 경직된 머리와 육체로는 자기를 키워나갈 수 없어.”

 

그는 교단에 있는 동안 학생들에게 공부만 강요하지 않았다. 그건 아들인 병준 씨도 마찬가지다.

 

고 전 교육감은 “교장을 하던 시절, 교사들에게 주말 숙제를 내지 말라고 강조했다. 교사들이 반항했다. 그러나 그는 학생들이 스스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며 “주말 과제를 잔뜩 내주고 꼼짝 못하게 하는 것은 벌(罰)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병준 씨도 “아이들에게 늘 꿈을 꾸라고 말했다. 꿈을 꾸어야 뭔가를 시도하고, 도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기 초에는 학생들에게 ‘꿈’을 화두로 이야기를 나눴다”고 웃음 지었다.

 

 

1984년 고 전 교육감은 제주에서 전국소년체전을 열었다. 당시 뭍에서 제주까지 선수들을 실어 나를 비행기편이 어려웠다. 그래서 군함을 동원했다. 지금의 제주해양경찰서 운동장도 그때 소년체전을 열기 위해 만들어졌다. 김영관 전 제주도지사의 도움이 컸다.

 

전국소년체전은 대성공이었다. 소년체전을 개최할 무렵 체전 행사장에 동원돼 파김치가 되는 학생들이 나오자 학부모들의 반발도 컸다. 하지만 그는 학부모들에게 “대학진학률과 전국 1등을 제주에서 나오게 하겠다”고 장담했다. 그의 말이 나오기 전인 1982년 그가 교육감 재직시절 원희룡 전 국회의원이 학력고사 전국수석을 차지했고, 그 후로부터 4~5년간 줄곧 제주의 고3생들은 명문대는 물론 대학입학률 전국 최상위를 기록했다.

 

그는 여전히 ‘교육’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라 믿는다. 그는 “교육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것이라고 본다. 지식만 주입시키는 교사 보다는 지혜를 알려주는 ‘스승’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만 갔던 그에게 시련이 찾아왔다. 병환을 앓던 그의 아내는 오랜 기간 제주의료원에서 신세를 지다 2005년 세상을 떠났다.

 

“허무했다. 그때 치매, 신경쇠약 등의 질환을 앓으며 외로운 노년을 보내는 노인들을 만났다. 삶의 막바지에 있을지 모를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누군가 곁에 있다는 안도감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세상을 등진 아내가 생각났다. 슬펐지만 무엇이라도 해야 했다. 그대로 주저앉아 있는 건 아내를 위한 도리가 아니라 생각했다. 그래서 외롭게 삶과의 이별을 준비하고 있는 노인들을 위해 2009년 제주시 연미마을에 사회복지법인 고연을 설립해 ‘연화원’(蓮花院)을 지었다. 빛나는 연꽃이란 뜻을 가진 연화원은 아내의 법명인 ‘법연’(法蓮)에서 ‘연’을 따왔다.

 

연화원을 지어 놓고 보니 흡족했다. 하늘에 있는 아내도 기뻐할 것 같았다. 땡전 한 푼 받지 않고 있지만 행복했다.

 

연화원 원장은 며느리 전상혜(58)씨가 맡았다. 전 씨는 “아버지는 하루에 한 두 번씩 노인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게 참 어렵고 힘든 일일텐데도 고령의 나이에 매번 거르지 않는다. 덕분에 노인들도 즐거워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친절하고 꼼꼼한 성격 덕분에 직원들에게도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 즈음 큰 아들이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아들 역시 평생을 교직에 몸담은 사람이다. 오현고에서 불어과목을 맡아 교직에 발을 들여놓았던 그의 아들 병준씨는 지난해 퇴직했다. 아들은 노령의 아버지와 함께 연화원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 역시 무일푼 봉사에 나선 것이다.

 

현재 연화원에는 오갈곳 없는 19명의 치매노인이 간병치료를 받고 있다. 주간에만 찾는 노인이 15명, 재가노인복지서비스 20명 등 60여명의 노인들이 서로 버팀목이 돼 삶을 즐기고 있다. 이 중심에는 항상 고봉식·병준 부자가 자리하고 있다.

 

한 달에 한 번 꼴로 이·미용 서비스, 웃음치료, 안마서비스, 대중목욕탕 무료입장 등 각계각층에서 연화원을 돕기 위해 나서고 있어 훈훈함을 더해주고 있다.

 

성균관대 불문과를 나온 고씨의 말. “두주일 전에 제자들이 고교 1학년 시절 제가 담임을 맡았던 이유로 저녁식사를 같이할 기회가 있었죠. 사실 제가 교사생활을 하며 첫 담임을 맡았던 제자들인지라 꽤 신경 썼던 친구들인데 잘 자라줘 너무 대견하고 고마웠습니다.”

 

10여명의 제자들이 둘러앉은 그 자리에 그는 그가 소중히 보관하던 그 시절 출석부를 꺼내보였다. 40여명의 연락처를 겨우 갖고 있던 그 제자들에게 63명의 출석부는 보배를 건진 격. 현장에서 제자들은 지금도 이름을 기억하는 선생님의 사랑에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가정형편이 어려워 그가 쌈짓돈을 쥐어주고, 장학금을 알아봐 준 제자들은 이제 어엿한 기업의 대표 또는 간부이거나 변호사, 판사, 의사, 교수, 언론인 등 ‘쟁쟁한’ 우리 사회의 동량으로 자라줬다.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고씨는 제주에서 알아주는 ‘인기남’이었다. 잘생긴 외모와 유창한 프랑스어 실력으로 여고생과 여선생님들의 추파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를 닮아서일까? 고씨는 성품이 온화했다. 마음도 여렸다. 화도 잘 내지 않았다. 교사재임시절 매도 들지 않았다. 그저 사랑으로만 보듬었다.

 

평생을 그렇게 교직에 몸 담았던 부자는 지금 행복하다. 노년으로 접어든 그들이 그 노인들과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참 스승’에 대해 한 마디 묻자 부자의 답은 이랬다.

 

“공부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지식만 가르치는 교사는 ‘기능공’일 수 밖에 없어요. 참된 '스승‘은 아이들과 ’함께‘하는 존재입니다. 선생님의 철학과 생각을 함께 공유하고, 학생 스스로 삶을 개척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스승‘입니다.” (고봉식 전 교육감)

 

“꿈을 키워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교사로 재직하던 시절 학생들에게 ‘내 청춘의 꿈에 충실하라’고 말했어요. 스승은 제자들과 항상 어울려야 합니다. 사랑은 할 수 있지만 함께 나누는 게 더 중요합니다.” (고병준 씨)

 

참 스승은 멀리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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