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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여행 (12)] 일본이 왜성 지은 이유 ... 점령지 지배

 

「삼국지연의」에는 서촉을 정벌하던 방통이 적장 장임의 꾀에 넘어가 계곡에서 포위돼 죽는 장면이 나옵니다. 계곡에 들어선 방통은 ‘낙봉파(落鳳坡)’라는 글귀를 봤습니다. 그 순간, ‘아뿔싸! 내가 여기서 꾐에 빠져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방통의 호는 봉추(鳳雛)였고, 낙봉파의 낙자는 떨어질 낙(落)자였기 때문입니다. 봉추가 떨어지는 곳이라는 지명을 보고 죽음을 예감한 겁니다.

 

이순신이 서거하신 관음포가 보이는 뒷산에 그분을 애도하기 위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의 이름은 ‘이락사(李落祠)’입니다. 이충무공의 이(李)와 떨어질 락(落)을 합쳐서 만든 이름입니다. 이순신이라는 큰 별이 떨어진 곳임을 말없이 알려줍니다.

 

사당 옆길로 쭉 올라가면 첨망대를 만날 수 있습니다. 그리 멀지도 높지도 않습니다. 조선시대 누각은 아니지만 크고 아름답습니다. 첨망대에서 바라보는 바다와 섬들도 절경이죠.

 

이순신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기 위해 치밀한 전술ㆍ전략을 사용했습니다. 실제 전투에서도 아군의 피해는 적군과 비교할 수 없이 작았습니다. 게다가 이런 대승을 수십번이나 거뒀습니다.

 

이순신의 활동 시기는 거의 온전하게 작전권을 가지고 운영한 시기와 명나라 군과 협력해 전투를 운영한 시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물론 후자의 시기에 입은 피해가 좀 더 컸습니다.

 

아무래도 명나라 수군은 조선 수군처럼 이순신의 지휘를 일사불란하게 따르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순신은 이들의 안위와 전과까지 고려하면서 작전을 짜고 수행해야 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최고의 효율을 내는 것이 불가능했을 겁니다.

 

이순신은 퇴각하는 왜군의 씨를 말려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명나라 군대는 비협조적이었습니다. 무사히 집에 돌아가고 싶은 건 명나라 군사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입니다.

 

왜군이 물러가는 마당에 더 이상의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았던 그들의 입장도 이해는 갑니다. 명나라 수군 지휘관 진린은 이순신을 이해하고 지지했습니다. 가까이서 이순신을 지켜보며, 그 고매한 인품과 우국충정에 깊이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노량해전은 비협조적인 명군을 데리고, 필사적으로 항전하는 왜군을 섬멸해야 하는 어려운 전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측 피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가장 큰 피해는 이순신의 전사(戰死)였습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임진왜란에 참여했던 가장 중요한 일본 장수 중 하나였습니다. 당시에 그는 주로 순천에 주둔했습니다. 그 무렵 이순신의 통제영은 고금도에 있었습니다.

 

따라서 순천 오른쪽은 왜군의 영역이라고 봐야 했습니다. 왜군들은 이순신이 있는 동안에는 바다에서의 전투를 피했습니다. 그렇다고 바다를 포기한 건 아니었습니다. 매우 튼튼한 왜성을 바닷가에 지어 점령지를 지배하려 했습니다. [본사 제휴 The Scoop=장정호 교육다움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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