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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20)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돈황(敦煌) 막고굴(莫高窟)은 중국에서 가장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가장 완벽하게 보존된 석굴 예술의 보고다. 감숙성(甘肅省) 주천시(酒泉市) 돈황시(敦煌市) 남동쪽 20㎞지점에 있는 불교유적이다. 1987년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 있다. 천불동(千佛洞)이라고도 불리며 산서성(山西省) 대동시(大同市)의 운강석굴(雲岡石窟), 하남성 낙양시(洛陽市) 용문석굴(龍門石窟), 감숙성 천수시(天水市) 맥적산(麥積山) 석굴과 함께 중국 4대 석굴이 됐다.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석굴로 평가받고 있다.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종교예술품으로 중국고대의 정치, 경제, 문화, 군사, 교통, 지리, 종교, 사회생활, 민족관계 등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다.

 

16국 시대 전진(前秦) 건원(建元) 2년(366) 건립되기 시작해 위진남북조(魏晋南北朝), 수(隋), 당(唐), 오대(五代), 서하(西夏), 원(元)까지 4세기 중반부터 13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당대 무측천(武則天) 시기에 건립된 석굴이 이미 천 개를 넘어 천불동(千佛洞)이라고 불렸다. 천여 년의 세월 동안 자연과 사람들에 의해 파괴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1,600여 미터에 달하는 492개 석굴과 조각, 벽화가 있다. 45,000㎡에 달하는 벽화와 불상 및 소조상 2,400여 점이 남아 있어 세계적으로도 규모가 가장 크고 보존상태가 좋은 불교예술의 보고이며 거대한 미술관이다.

 

 

 

 

막고굴(莫高窟) 비문에 따르면 서기 366년 낙준(樂僔)이라는 승려가 수행 길에 올라 해질 무렵 명사산(鳴沙山) 동쪽 기슭에 이르렀는데 석양이 맞은편 삼위산(三危山)을 비추자 산봉우리가 온통 금빛으로 빛나며 그 속에 마치 천만 존의 부처님이 금빛 속에서 광명을 내리는 것 같고 천상(天上)의 향음신(香音神)이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았다고 했다. 낙준(樂僔)은 이 장엄한 불국(佛國)의 현상에서 부처님의 계시를 보고 이곳을 도량(道場)으로 삼아 불도를 닦고자 결심했다.

 

건축, 조각, 벽화로 이루어진 예술작품으로 현존 492개 석굴의 건축 형태는 다양하다. 선굴(禪窟), 전당굴(殿堂窟), 탑묘굴(塔廟窟), 영굴(影窟) 등의 형태가 있다. 종교적인 조각을 모셔두고 벽화를 그린 신전으로 승려가 종교 활동을 하는 장소였다. 초기의 석굴은 가운데 탑주(塔柱)를 설치한 형태였다. 수당시기의 석굴은 평면사각형인 복두정(覆頭頂)으로 후벽에 불감(佛龕)을 두었다. 당대 후기에서 송원대에는 벽화(壁畵) 불감(佛龛)이 동굴 중앙의 불단(佛壇)을 대체해 대형벽화에 자리를 내주는 형태로 변화했다.

 

사막 속에서 잠자고 있던 이 예술의 보고는 기연으로 우연히 발견됐다.
청(淸)나라 광서(光緖) 연간 돈황석굴의 왕원수(王圓蓨) 도사가 자신을 대신해 경서를 필사할 사람을 고용했다. 그 사람은 복도에서 일을 하다가 틈이 나면 잎담배를 피우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피다 남은 잎담배는 벽의 갈라진 틈에 보관했다. 한 번은 그가 갈라진 틈에 손을 집어넣었는데 상당히 깊다는 것을 알게 됐다. 벽을 가만가만 쳐보니 텅 비어 있는 공간이 있는 듯했다. 그는 이상하다 여겨 도사에게 알렸다. 왕도사와 그는 벽을 헐어보니 안쪽에 문이 있었고 문 안쪽 동굴에 고대 경문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 소식은 일시에 펴져나갔다. 많은 외국 탐험대가 흥분하여 끊임없이 방문했다. 왕도사는 싼 가격으로 경문을 외국인들에게 넘겼다. 그렇게 돈황의 많은 진귀한 문물이 해외로 빠져 나갔다.

 

왕도사가 돈황을 발견하기 이전에는 중국의 황량한 서북쪽에 굉장한 규모의 고대 문화 보고가 감춰져 있었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다. 그렇다면 돈황은 언제 폐쇄됐을까? 왜 봉인했을까? 이 문제에 대해 학술계는 지금까지도 논쟁하고 있다. 그 견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프랑스 학자 폴 펠리오(Paul Pelliot)의 견해다. 그는 장경동(藏經洞)은 11세기 전기, 즉 북송 초기에 봉인됐다고 했다. 서하(西夏)왕국과 북송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송나라의 경문을 관리하던 관원이 창졸지간인지라 모든 경문을 가지고 떠나지 못해 경전을 동굴에 차곡차곡 쌓아 동굴을 봉인하고 떠났다고 봤다. 당시 전란으로 세상이 어수선해졌고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있어 누구도 경문과 관련된 일에 주의하지 못했다. 그래서 경문동은 아무런 훼손 없이 천여 년 동안 완전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고 했다.

 

둘째는 송나라 철종(哲宗) 시기 봉인됐다고 본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은 장경도의 봉인은 이슬람교의 전파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1000-1009년 이슬람교를 신봉하는 까라한(Qarakhanids) 왕조가 군대를 이끌고 동진해 서역 불교 중심지였던 우전(于闐, 현 위구르 화전[和田]현 일대) 왕국을 점령한 후 동쪽으로 서하를 공격할 준비를 했다. 이 소식이 돈황까지 전해지자 위로는 관리들부터 아래로는 백성들까지, 심지어 불교도들조차 공포에 휩싸였다. 송 철종 8년(1093) 우전국은 송 조정에 서하를 토벌할 것을 요구했으나 허가를 얻지 못했다. 바로 이러한 형세 아래 돈황 상층 통치자들은 일사불란하게 각 사원의 경전, 화권, 법기 등을 봉인했고 이어 관부와 사원의 사회 서적들도 수장해 동굴 입구를 봉인했다고 본다.

 

 

 

 

세 번째 관점은 현지 통치자 조(曹) 씨가 봉했다고 보았다. 『송사․사주』 기록에 따르면 당(唐) 선종(宣宗) 대중(大中) 5년(851) 사주(沙州) 사람 장의조(張議潮)가 봉기해 토번(吐藩, bon chen po)의 통치를 벗어나 당 왕조에 귀순하면서 귀의군절도사(歸義軍節度使)에 봉해졌다. 장의조가 죽은 후 장 씨 후인이 계승했다. 오대 주량(朱梁) 시기 장 씨의 대가 끊기자 사주인들은 장사(長史) 조의금(曹義金)을 수장으로 추대했다. 이때부터 사주는 조 씨 가문이 통치하게 됐다. 당시 사주 동쪽에 위치해 있던 감주(甘州) 위구르(Uyghur) 정권과 서쪽 우전국 이(李) 씨 정권이 연이어 소멸되거나 멸망되기 직전으로 과사(瓜沙) 조 씨 정권은 양팔이 잘린 형국이 돼 직접적으로 서하의 위협을 받게 됐다. 유비무환의 자세로 전란이 도래하기 전에 사원의 불교 전적과 화권, 그리고 사회 문서 일부분을 장경동에 봉인했다는 것이다.

 

네 번째는 원(元)대 초기에 봉인했다는 견해다. 관백익(關百益)은 『돈황석실고략』에서 “석실의 주소는 원 왕조 이전의 대사원으로 여러 해에 걸쳐 수집해 보관하고 있던 보물과 장경이 무척 많았다. 원 태조 칭기즈칸이 서정할 때 그의 군사인 도사 구처기(邱處機)가 가장 신임을 받았다. 불교에 구원(舊怨)이 있었다. 도경이 돈황에 먼저 있었던 것으로 불교 사찰을 없애고 불교도들의 두발을 기르게 하여 도교 복장으로 고쳐 입게 만들려고 했다. 사찰의 사미들이 일찍 전해 듣고는 귀중한 고물들을 석실에 안치해 봉인해 재앙을 피하려 했다”고 했다. 이러한 설도 근거가 있는 듯 보이지만 논리에 맞지 않는다. 칭기즈칸은 도교도 존중했지만 불교도 숭상했기 때문이다. 도교 신도들에 의해 불교 사원이 훼멸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는 설은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

 

다섯 번째는 원명(元明) 교체기에 봉인된 것이라는 설이다. 장유(張維)는 『롱우금석록(隴右金石綠)』에 「중수황경사기(重修皇慶寺記)」석비를 언급하면서 제기했다. 장 씨는 원말 전쟁의 혼란기에 과사(瓜沙)도 전란을 겪었는데 훼멸을 필하기 위해 당시 황경사 중심으로 승려 수랑(守朗)과 그의 도제들이 불경과 문서 등을 동굴에 안치 후 봉인했다고 보았다.

 

이상의 견해 이외에도 장경도 내부에 『대장경』전부와 기타 진귀한 물품들은 없고 대부분 낙질이거나 단편이며 위경(僞經)도 적지 않게 섞여 있을 뿐만 아니라 잘못 필사한 책과 졸필의 것 등이 적지 않아 폐기하려는 문서와 철지난 계약 등을 동굴 속에 봉인했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폐기설’의 근거는 무엇일까? 첫째는 이렇다. 지역이 서쪽 변방의 돈황으로 종이가 비교적 진귀했다. 경전을 필사할 때 잘못 필사할 경우 잘못 쓴 종이는 버리지 않고 모아뒀다가 다른 용도로 썼다. 그래서 돈황은 폐기 처분하는 경서 부분과 폐지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고 본다. 둘째는 불교의 습속에 의한 것이라 본다. 불교에서는 사용 중 파손된 경전을 소각할 수 없으면 버릴 수도 없어 다른 장소에 보관했다. 그런 용도의 문물이라 보는 것이다.

 

 

 

 

돈황 장경동 봉인의 시기와 원인에 대해 아직까지 정론은 없지만 돈황의 가치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남겨진 고대 서적뿐만 아니라 돈황의 벽화도 세계 예술의 보고다. 내용이 지극히 풍부하다. 대체적으로 나누어보면 존상(尊像)화, 경변(經變)화, 고사(故事)화, 공양인화, 불교사적화, 건축화, 산수화, 동물화, 장식도안화 등 9종류가 있다. 경변화, 고사화, 불교사적화는 백성의 생활을 그린 생동적인 그림이다. 다양한 종류의 벽화는 여러 방면에서 고대 사회의 실재생활을 반영하고 있어 고대 봉건사회의 역사, 문화, 정치, 경제, 군사, 과기, 종교, 건축, 교통, 복식, 악무와 민속을 연구하는데 진귀한 형상 사료를 제공하고 있다. 그래서 ‘벽 위의 도서관’, 특수 ‘박물관’이라 불리는 천여 년을 뛰어넘는 ‘형상 역사’다.

 

돈황의 채색한 소상(塑像)은 주로 불상인데 석가, 미륵, 약사, 아미타, 삼세불, 칠세불 등을 포함하고 있고 보살상으로는 관음, 문수, 보현, 세지, 지장, 협시(脇侍), 공양보살 등이 있다. 제자로는 아난, 가섭, 십대제자 및 나한이 있다. 그리고 천왕, 금장, 지신 등도 있다. 채색 소상 형식은 원소(圓塑), 부소, 영소(影塑), 선업니(善業泥) 등이다. 불상은 중앙에 있고 양측으로 제자, 보살, 천왕, 역사가 시립해 있다. 적으면 셋, 많으면 열한 존이 있는 경우도 있다. 제96굴에 34.5미터의 미륵좌상이 가장 높다. 과장된 색채로 인물의 성격을 표현해 기색과 자태가 각각 다르다. 내포하고 있는 의미가 풍부하기 그지없어 동양 고대 천년 불교 채색 소상사라 아니할 수 없다.

 

돈황석굴 벽화 중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이야기 즉 고사(故事)화다. 선명하면서도 삶을 생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고사화는 대체적으로 세 분류로 나눌 수 있다. 한 부류는 여래를 선양하기 위한 석가 생애에 대한 이야기다. 석가가 탄생한 후 출가할 때까지 만화처럼 묘사돼 있다. 예를 들어 북주(北周) 제209굴에는 근 80개의 화면이 있는데 현존하는 유일한 불전 연속 그림책이라 할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석가 생전의 여러 세대를 전전하면서 중생을 교화한 본생 고사다. 석가의 생전 희생정신을 선양하는 내용이다. 그중 반복적으로 묘사한 이야기는 ‘시비왕(尸毗王) 육체보시’다. 그 고사는 다음과 같다.

 

한 마리 매가 까치를 잡아먹으려고 쫓아갔다. 까치는 잡히지 않으려고 시비왕의 겨드랑이 밑으로 숨었다. 매는 왕 앞으로 나가 “그 까치는 내 먹이다. 나는 몹시 굶주리고 있다. 제발 그 까치를 돌려주기 바란다.” 이렇게 말하고 왕에게 달려들었다.

 

왕은 “나는 일체의 것을 구해주고 싶다는 서원(誓願)을 가지고 있다. 나에게 구원을 청하러 온 이 까치를 건네줄 수는 없다.” 거절했다. 그러자 매는 “일체의 것을 구한다고 왕은 말했는데 내 먹이를 빼앗아 내 목숨을 끊으려고 하는 것은 일체의 것을 구하는 길이 아니지 않소.”라고 말하며 그를 몰아세웠다. 왕은 할 수 없이 “그러면 다른 고기로는 만족할 수 없겠는가”라고 매에게 말했다. 그러자 매는 “날고기가 아니면 나는 먹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왕은 생각했다. ‘날고기를 얻기 위해서는 죽이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를 구하기 위해 다른 것을 죽인다는 것은 도리에 맞지 않다. 자신을 희생시킬 도리 밖에 없다.’

 

왕은 칼을 뽑아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매에게 주었다. 그러자 매는 까치와 똑같은 중량이 아니면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래서 왕은 저울을 가져오게 하여 한쪽 접시에 까치를 얹고 또 한쪽 접시에 허벅지의 살을 얹어 달아보니 까치 쪽은 무겁게 내려앉는데 살이 있는 쪽은 가벼워 올라와 있었다. 그래서 허벅지의 살을 더 베어 얹었는데 그래도 가벼웠다. 그래서 허벅지의 살을 전부 베어 얹었는데도 조금 모자랐다. 그래서 왕은 팔의 살을 베고 겨드랑 밑의 살도 베었는데 그래도 부족했다. 최후로 온 몸을 들어 접시 위에 올라서려고 했는데 기진맥진해 땅에 쓰러지고 기절하고 말았다. 잠시 후 정신이 들자 스스로를 책망하며 말했다.

 

“먼 옛날부터 얼마나 이 육체 때문에 망설이고, 이 육체 때문에 괴로워했던 것인가. 이제야 이 망설임의 근원, 괴로움의 뿌리인 육체를 버리고 더구나 그 육체로 남을 구할 수 있게 됐다. 이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접시 위에 올라서고 마음속으로 다시없는 기쁨과 만족을 느꼈다. 이 때 대지는 진동하고 천계의 궁전은 기울었으며 하늘에서 연꽃이 내려오면서 찬탄의 소리를 질렀다.

 

이는 불가에서 지극한 감동으로 다가오는 자비심을 표현한 이야기다. 이외에도 ‘월광왕(月光王)의 머리 보시’도 있다.

 

 

 

 

둘째로 ‘인연’과 관련된 이야기도 많다. ‘난타 출가 인연’, ‘선사태자 입해품’ 등이 그것이다. 셋째로 인성과 관련된 이야기다. 불교는 인성의 약점에 대한 인식이 깊다. 죄를 벗고 회개하는 희망을 담고 있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회개 이전에 반드시 지극한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 공통이다. ‘미묘비구니 인과’가 바로 부처님의 힘이 끝이 없음을 나타내는 이야기다.

 

불교 내용 이외에 마고굴에는 중국 전통의 신화와 신선을 제재로 하는 벽화가 있다. 예를 들어 서왕모, 동왕공, 복희여화, 뇌공우사(雷公雨師) 등 자연신들이 있는데 이는 한(漢)대 묘의 벽화 중에도 보인다. 돈황석굴 벽화에는 위진 이래 불교가 점차 도교, 유교 사상과 융합돼 중국식 불교로 옮겨 가는 측면을 엿볼 수 있다. 이외에도 역사 이야기에 대한 벽화가 있다. 심지어 장건(張騫)이 서역을 넘어가는 과정을 세밀하게 표현한 벽화도 있다. 이런 벽화의 학술적 가치가 크다는 것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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