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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 아름다운 제주어 공모전 대상 수상후기] 수상자를 대신해 딸이 보낸 서신

 

 

지난 여름의 무더위는 그야말로 살인적이었다. ‘30년 만에 최고로 뜨거웠다’는 여름을 지나는 동안 몇 분의 할머니들이 돌아가셨다. 어머니도 호흡이 어려울 정도로 숨이 가빠서 응급실로 실려 갔다. 폐렴과 천식이 겹쳤다는 진단을 받은 지 이틀 만에 어머니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판정을 받았다. 담당의사는 ‘서귀포에서 그냥 임종준비를 하든지, 한 가닥 희망을 붙들고 제주시로 가보라’고 하였다. ‘내 어머니라면 어떻게 해서든 기회를 살려보겠다’는 그의 중얼거림에, 바로 어머니를 앰블런스에 실었다.

 

‘눈을 감으면 끝’이라는 간병인의 코치에 ‘어머니’를 목이 터져라 부르면서 한 시간을 달렸다. ‘어머니, 눈 감으민 절대 안돼 예. 어머니 눈 뜹서, 제발 눈 크게 떠봅서 양. 나 누군지 알아지쿠가?”를 반복하면서.

 

다행히 어머니는 중환자실을 거쳐서 열흘 만에 회생하셨다. 오랜만에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오던 날, 담장을 둘러 핀 칸나 꽃들이 일제히 붉고 노란 봉우리를 터뜨렸다. 한없이 쇠약해진 어머니의 얼굴에서도 희미하게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아름다운 기적이었다.

 

사실 어머니의 삶은 기적의 연속이라 할 만큼 혹독하고 억척스러운 것이었다. 제주의 모든 해녀 할망들의 삶이 그러하듯이 말이다. 집 앞 올레로 나가서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내딛는 한 걸음 한 걸음 또한 기적 같은 움직임이었다. 동네 해녀할망들은 걷지도 못하는 걸음을 옮기면서도 바다에 뛰어들면 너끈히 서너 시간씩 물질을 해낸다. 문득 어머니의 삶, 다시 살아주신 그 경이로운 생을 기념하고픈 생각이 일었다. 어머니, 세상에 하나뿐인 우리 어머니의 인생을 ‘유종의 미’로 장식해 드릴 방법은 없을까?

 

 

 

그러던 중 우연히 <제이누리>의 ‘아름다운 제주말·글 찾기’ 공모전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그렇지, 내 어머니의 삶을 제주말로 써드리자. 학교 마당에도 가보지 못한 어머니의 무궁무진한 얘기를. 그렇게 해서 시작된 제주말로 글쓰기는 ‘어머니가 말하고 딸이 받아쓰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사실 이쯤에서 고백하자면, 어머니의 아버지(내 외조부)는 바다에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서 돌아가신 게 아니다. 사연인 즉, 함경환 사건의 희생자다. 함경환은 1918년에 첫 출항해 제주-시모노세키-오사카를 오가는 500톤급 여객선이었다. 당시는 그 배가 제주섬의 주요 항구를 한 바퀴 돌면서 승객들을 태운 후 일본으로 떠났다. 우리 고향인 대포 바다는 수심이 낮아서 함경환이 먼 바다에 정박하면 거룻배가 포구에서 사람을 싣고 가서 승선시켰다. 1928년 1월 28일, 함경환까지 승객을 실어 나르던 거룻배가 갑자기 불어 닥친 돌풍에 그만 뒤집혀서 배에 타고 있던 중문면 주민 32명이 익사하고 말았다. 외조부는 43세의 건장한 장년이라 헤엄을 쳐서 본선에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웃집 아주머니가 아기를 업고 허우적거리는 것을 보고 다시 바다로 뛰어들었다.

 

그 순간 집채만 한 파도가 덮치더니 순식간에 물속으로 집어삼키고 말았다. 외조부는 ‘일본 가서 돈을 많이 벌어다가 밭도 사고, 아이들 공부도 시키고, 막내딸 고무신도 사오신다’며 떠난 길이었다. 대포마을에는 수 십 명의 장례식이 한꺼번에 벌어졌고, 외조모는 빈 상여로 장례를 치러야만 하였다. 그 안타까움과 서러움이 얼마나 컸던지, 외조모는 ‘어떤 사람은 복도 많아서 시신을 두고 장례를 치르는가’며 평생을 상여가 나가는 행렬에 눈을 주지 않았다.

 

외조부의 장례식 날 어머니가 배고파서 칭얼거리자 일곱 살짜리 오빠가 동생의 손을 붙잡고 이웃집 장례식에 가서 밥을 얻어 먹였단다. 이 긴 사연을 쓰기가 쉽지 않아서 이 부분을 ‘아버지가 고기잡이 나갔다가 풍랑에 휩쓸려서 돌아가신 것’으로 고쳐 썼다. 이 부분을 제외한 어머니의 얘기는, 대부분이 사실에 바탕을 둔 논픽션이다. 나는 이 대목을 떠올릴 때마다 세 살 짜리 어머니가 불쌍하고, 얼굴도 모르는 외조부가 보고 싶고, 그 모든 걸 견뎌 낸 외조모가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

 

 

 

어머니의 일생을 얘기하고 받아 적는 데는 족히 3일이 걸렸다. 어머니는 귀가 어두워서 내가 묻는 말을 잘 못 알아듣거나, 내가 어머니의 제주어를 잘못 알아들어서 큰 소리로 외치고 되묻기를 거듭해야 하였다. 나는 목이 아프고 어머니는 머리가 아팠다. 끝내 어머니는 타이레놀을 드셔야 했고, 그렇게 어머니의 이야기도 끝을 맺었다. 어머니의 얘기는 바다로 시작해서 바다로 끝났다. 그래서 우리는 글의 제목을 ‘바당 어서시민 어떵 살아시코 이(바다가 없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로 정했다.

그런데 그 바다가 어머니를 공모전의 대상으로 이끌어 주었다. 세상에, 우리 어머니가 1등을 하시다니. 파도처럼 허연 웃음을 터뜨리면서 어리둥절한 어머니를 끌어안고 울었다. 어머니가 만약 학교에 다닐 수만 있었다면 나보다 더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하고, 노래도 잘 하고, 반장도 잘 하였을 것이다. 이는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바다도 아는 사실이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한 절망, 땅이 꺼지는 듯 한 슬픔, 바다가 덮치는 듯 한 위기 앞에서도 어머니는 악착같이 살아내셨다. 너무나 힘들어서 ‘죽어야지’ 하고 인건이 기정(대포.중문 주상절리대)으로 달려간 밤에도, “9남매”란 소리가 들려서 돌아왔다지 않은가. 그리고 94세에 만난 살인적인 더위에도 끝내 살아내지 않으셨는가?

 

제주의 딸들이라면 누구나 다 그러하겠지만, 어머니는 내 삶의 기준이요, 의지할 태산이다. 지치고 힘들고 어려워서 주저앉고 싶을 때, 어머니를 생각하면 다시 일어서게 된다. ‘우리 어머니의 반만큼만 노력하면 이 정도는 넉넉히 이기고도 남으리라.’ 싶어진다.

 

 

 

어머니를 모시고 대상을 받으러 가는 날, 어머니는 한 송이 꽃처럼 어여쁘게 차려 입으셨다. 그리고 수상 장소인 김만덕 기념관은, 생애 최고의 상을 받는 어머니에게 더 없이 훌륭한 무대가 돼 주었다.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 주관기관인 <제이누리>는 휠체어를 마련해 주었고, 수상자들 모두가 어머니의 느린 걸음을 기다리고 참아주었다. 어머니를 대신해서 수상소감을 얘기하는 동안, 어머니를 바라보는 내 눈에선 눈물이 고였다. 참으로 고마운 우리 어머니, 부디 100세까지 건강하게 살아주세요.

 

이 자리를 빌어서 그토록 아름다운 자리를 만들어 준 <제이누리>에게 가슴 뜨거운 감사를 드린다. 그리고 함께 협력해 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발전연구원, 연세대학교 제주동문회 등에게도 진심으로 고마운 인사를 올린다. 이 글을 쓰면서 거듭 느끼기는, 제주어를 살리고 전하고 보전하는 일은 제주의 자연을 가꾸고 지키고 지속시키는 일 만큼 소중하다. 제주인이 아니고선 어머니 같은 제주의 자연을 진심으로 지켜낼 수 없을 테니까. 제주어가 없이는 제주인의 정신을 이어갈 수 없지 않은가. / 수상자를 대신해 딸 허정옥이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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