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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연가]재일제주인 음악가 양방언…그의 인생스토리와 '제주사랑' 토크

자신에게 붙은 '재일제주인'이란 표현을 '최고'라 받아들이고 '제주홍보대사'를 자처한 세계적 음악가 양방언 씨. 제주도 한림읍 협재리가 고향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제주도를 사랑하게 된 그는 동경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양씨의 아버지는 일제 식민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갔다. 양씨는 일본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의사 생활을 한건 1년(마취과 의사) 밖에 되지 않는다.

 

그는 국내 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는 음악가다. 일본, 홍콩을 비롯한 아시아는 물론 독일, 영국 등 유럽에서 작곡가, 연주가, 편곡가, 프로듀서로 활동하면서 클래식, 락, 월드뮤직, 재즈 등 다양한 음악 장르를 넘어 시대와 세대를 아우르는 음악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양씨는 한국에서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 공식음악 'Frontier(프론티어)'와 'Prince of Jeju(프린스 오브 제주)'라는 곡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한 영화,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 게임음악 등 다양한 장르에서 폭넓은 활동을 벌이고 있다.

 

특히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영화 '천년학'의 사운드트랙은 그해 영화평론가협회상 음악상을 수상했다. KBS TV 특별기획 다큐멘터리 '차마고도'에 삽입됐던 음악은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영화 TV음악 부분을 수상하는 등 그의 음악은 모두 '명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2012년 2월 열린 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에는 양씨가 직접 편곡한 '아리랑 판타지'를 연주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제주를 찾았다. 7일 오후 제주대학교 아라뮤지홀에서 열린 '재일제주인 양방언의 음악과 인생'이란 주제의 토크 콘서트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공연장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발디딜 틈이 없었다. 450석 자리가 부족해 뒤늦게 온 사람들은 계단에 앉아야만 했다. 콘서트에서 양씨는 어린시절 자라온 이야기와 그의 음악인생을 관객들과 호흡하며 이야기를 풀어냈다.

 


유혹 뿌리치기 어려워, 산으로 작업실 옮겨

 

양씨는 현재 나가노현 해발 1,000미터 산속에서 음악 작업을 하고 있다. 그는 "도시에 살면 친구들이 술마시러 가자고 유혹을 한다. 근데 난 그 유혹을 차마 뿌리치기 힘들다. 그래서 13년전, 좀더 음악에 집중하고 싶어 지금은 나가노현 해발 1,000미터 산속에 살고 있다"고 웃음지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언론인들이 '양방언씨는 산속에서 칩거하며 산다'고 오해를 하시는데, 그렇지는 않다. 아예 산속에서 사는 건 아니고, 가끔 일이 있을때는 도시로 나와서 친구와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도 어린시절 아픔은 있다. 일본에서 자란 양 씨는 조총련 계열인 재일조선인학교를 다녔다. 한국에서 지원하는 학교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고향이 신의주였기 때문에 재일조선인학교 입학이 가능했다. 그는 "조총련 학교에서 음악하기가 어려웠다. 북측 사람들이 서양에서 들어온 문화에 대해서 배타적이었기 때문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좋아하는 서양음악LP판을 친구에게 들어보라고 주기도 했다. 그러나 학교 선생님들은 ' 너 무슨짓이야'라며 '반동분자'라고 낙인찍었다. 그러면서 선생님이 LP판을 깨버렸다. 너무 충격을 받았다"라고 설명했다.
그는 반감을 해소하기 위해 락음악에 매료됐다. 에너지를 어떻게 발산할지 몰랐던 어린시절, 그는 집에서 락음악을 들으면서 분과 화를 풀게 됐다.

 

'반동분자'소리들으며 자라… 아픔 음악으로 해소

 

그는 어린시절 가정환경에 대해서도 입을 뗐다. "어린시절, 우리집이 복잡했다. 아버지 고향은 제주도지만, 어머니는 신의주였다. 그러나 국적은 한국이었다. 그런 특별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항상 제주도 이야기를 매일 했다"며 "아버지가 일이 끝나고 집에서 매일 협재 바다, 바람, 음식이야기를 많이 하셨다. 만번은 들은거 같다"고 웃음지었다.

 

그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국적을 '조선'에서 한국으로 바꿨다. '조선' 국적을 갖고 있을때는 해외나가기가 너무 힘들었다. 불편함 때문에 일본 정부에 문의를 했다. 그랬는데 답변이 '양'씨 성을 버려야 일본국적을 가질 수 있다고 하더라. 난 그래서 '양'씨 성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며 일본의 제안을 거절했다"고 말했다.

 

 

"제주도 홍보대사 하고 싶다"

 

양씨는 1998년 가족들과 처음 제주도를 찾았다. 6월이었다. 그는 "중문의 한 호텔에서 가족들과 함께 산책을 했다. 6월이었는데, 너무 인상이 좋았다"라며 웃음지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그해 'Prince of Jeju'를 작곡했다.

 

양씨는 "1998년 6월 제주에 처음 왔을때 어린시절부터 들어왔던 아버지의 이야기들이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 다. 자연스럽게 곡이 나왔다. 많은 곡을 썼지만, 'Prince of Jeju'는 그림과 같은 곡으로 써졌다. 굉장히 특별한 순간이었다. 어린 시절에 쌓였던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승화됐다"고 말했다.

 

'재일제주인'이란 표현을 '최고'라고 생각하는 양씨는 "제주도든, 비양도든 기회가 주어진다면 홍보대사를 하고 싶다"라며 제주에 대한 애정을 한껏 드러냈다. 그는 또 "앞으로 제주도에서 더 많은 공연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제주도 사람들과 더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며 제주발길을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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