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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제주인]구덕 죽세공 장인 김희창 옹, 그가 들려주는 구덕이야기
군살 박힌 손에 남은 죽공예의 혼…그의 손길에서 명맥 이어져

 

한국전쟁이 거의 끝나갈 무렵인 1953년. 집안 사정이 여의치 않았던 그는 중학교 진학을 포기했다. 먹고 살 길을 만들어야 했다. 13살 나이에 아버지와 대나무를 베고 다듬어 ‘구덕’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구덕 만들기가 어느덧 60년. 이제는 그의 손길을 통해야만 새롭게 만들어지는 구덕을 만날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죽세공(竹細工) 장인 김희창(73).

 

‘구덕’은 제주의 전통 대바구니(대나무 바구니)다. 지금은 그 모습을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플라스틱 바구니와 종이상자 등에 밀려 사라져 가고 있다. 그가 그 명맥을 지금도 이어가고 있다.

 

제주 서귀포시 호근동 김씨의 집안 마루 구석. 김씨가 구덕을 만드는 작업실이다. 그의 직업은 ‘농업’. 감귤 밭을 일구고 있지만 여름이나 겨울엔 구덕을 끼고 산다.

 

현재 제주에서는 그를 제외한 구덕 죽세공 찾기가 힘들다. "현존 유일 구덕 죽세공"이란 게 주위의 전언.

 

 

13살에 시작한 일…집안을 일구는 원동력

 

김씨는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혼란기에 어머니를 여의었다. 그의 나의 11세 때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찢어지듯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인해 일을 해야 했다. 서귀포시 남원읍 하례리에서 호근동으로 이사를 갔다. 거기서 구덕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됐다. 당시 호근동에는 40여 명의 죽세공이 있었다.

 

“먹고 살기 위해 구덕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11살 때 돌아가셨고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아버지와 같이 일을 했다. 그 시절에는 농사도 안 됐다. 특히 제주도에서 쌀을 구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이걸(구덕을) 죽세공들 어깨 너머로 배웠다. 만든 구덕은 등에 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돈이 없으면 쌀·고구마(감자)·보리와 바꾸는 물물교환으로 삶을 이어갔다. 재물차롱(재물을 담는 구덕) 하나면 감자 한 가득이었다. 인건비로 충당하기도 했다. 김을 매주면 재물차롱 하나면 됐다. 지금 여자 일당이 5만~6만원이니까 상당히 비싼 것이다. 지금 재물차롱 1개에 5만~6만원이면 비싸다고 하겠지”

 

하지만 아버지도 그가 17살 때 세상을 떠났다. 공부는 꿈도 못 꿨고 집안은 그가 책임져야 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군 복무 3년을 제외하고 지금까지다. 그 만큼 당시에는 돈이 됐다는 것이다.

 

“옛날 제주도에는 그릇은 귀한 것이었다. 서귀포시 대정읍 덕수리에서는 항아리 같은 것을 굽고 장터에서 팔았다. 그래서 제주도 사람들은 구덕을 그릇 대용으로도 썼다. 제사 때에는 떡을 해서 나르고, 산에 들에 갈 때 점심 담고 담았다. 아기는 애기구덕에서 재웠다. 해녀들이 물질 갈 때, 잔칫집에 갈 때, 빨래하러 갈 때, 물을 담으러 갈 때, 낚시 갈 때 등 모두 구덕을 썼다”

 

 

그는 하루 재물 차롱 2개를 만든다. 한창 때에는 아침 5시에 시작해 밤 11시까지 작업을 해야만 했다. 그래야 물량을 맞출 수 있었다. 그는 1950년대 말부터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 있는 구덕공장에서 일을 했다. 김씨는 기술이 좋아 일당으로 1500원을 받았다.

 

“만드는 대로 잘 팔려 나갔다. 제주 사람은 구덕만 사용했으니까. 잘 만들던지 못 만들던지 다 썼다. 물론 가격은 달랐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구덕을 많이 찾지 않는다. 선물용으로 찾는 사람이 간혹 있다. 크기가 작은 것들은 장식용으로 나간다. 외국에 나갔다가 잠시 들른 친척들을 위해 선물로 주는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잘 만들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나는 젊을 때부터 시작해 손에 익숙하니….”

 

그는 그렇게 구덕을 만들어 집안을 일구었다. 구덕을 만드는 기술로 아이들을 키우고 결혼도 하고 재산도 모았다.

 

“이것 아니었으면 이만큼 못살았을 수도 있다. 그때는 이것으로 밥먹고 살았지만 이것 하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땅도 사고 결혼도 했다. 지금은 찾는 사람이 줄어 농사에 집중하지만 농삿일 쉴 때에는 이걸 만든다. 주업과 부업이 바뀐 것이지 뭐”

 

굳은 살 박힌 두 손…명맥은 이어가지만

 

그는 농사를 짓다가 농기계를 잘못 다뤄 왼쪽 중지를 잃었다. 그래도 그는 구덕 만드는 일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집안에는 언제나 구덕을 만드는 재료가 준비 돼 있다.

 

하지만 아직 그의 후계자는 없다. 이제는 사양 일감이기에 이 일을 하면서는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할 것 같다는 판단 때문이다. 사실 후계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유일한 구덕 장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니 구덕공장은 사라졌다. 플라스틱 세숫대야를 샀는데 구덕보다 좋아보였다. 물도 담을 수 있었으니까. 그때부터 구덕이 값어치가 떨어졌다.”

 

“생각해봐라. 구덕 만드는 걸 배우려면 3년은 족히 걸린다. 솜씨가 되려면 5년 이상은 배워야 한다. 게다가 잘 만들지 못하면 팔리지도 않는다. 잘 만들어도 돈이 안 되는데 지금 배워서 얼마나 잘 만들 수 있겠나. 5~6년 전에 제주도에서 문화재로 등록해주겠다고 하면서 후계자를 키울 것을 요청했다. ‘매달 70만원의 보조금도 나온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 돈 안 받는다’고 했다. 후계자가 그 정도의 월급으로 뭘 할 것이냐. 솔직히 말해 41살인 작은 아들이 30살 때쯤에 후계자 하겠다고 했다. ‘할 줄도 모른 놈이 뭘 하겠다는 것이냐. 돈도 안 되는데. 그만 둬라.’며 허락하지 않았다. 지금도 도에서나 박물관에서나 여러 번 찾아오지만 내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아마 구덕을 손으로 만드는 사람은 나 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13살 때 시작할 때 60~80대의 할아버지와 같이 했으니까 살아 있으면 130~140세쯤 됐을 것 아니냐. 있을 수가 없다. 간혹 70~80세쯤 된 사람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늙어서 하겠나.”

 

 

그는 이젠 힘이 부친다고 한다. 그는 군살이 박힌 9개의 손가락을 보여주며 늙어가는 나이를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젠 힘들다. 여름에는 괜찮은데 겨울에는 손발이 시리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것 같다. 이상하게 지난해까지 그렇지 않았는데 올해부터는 손발이 시리다. 눈도 어둡다. 잘못하면 대(대나무)가 뒤집어 들어갈 때도 있다.” 그의 구덕인생 60년의 안타까움이다.

 

 

 

 

 

 

 

구덕=대나무를 쪼개 다듬어서 엮어 만든 바구니다. 제주에서 예부터 주로 여자들이 물건을 넣어 등에 지고 다니던 운반용 바구니다. 그 크기와 모양, 사용하는 방법 등에 이름이 붙여진다.

 

김희창씨의 말을 빌면 ▶아이들 점심도시락 용으로 만든 두 주먹 크기의 구덕은 ‘동고령착’ ▶제사 때 떡을 담고 다니는 ‘재물차롱’ ▶재물차롱보다 깊이가 깊고 크기가 큰 것은 ‘질구덕’. 해녀구덕으로도 사용하고 빨래를 담아 빨래터에 가기도 했다 ▶메고 다니는 것은 ‘멜구덕’ ▶갓난 아기를 넣어 흔들어 재누는 ‘애기구덕’ ▶허벅을 담아 물을 길어 나르던 ‘물구덕’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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