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규모 장례식이 진행되는 광장에서 군중들의 뒷모습을 보여주며 ‘매드 위민스 볼(The mad women's ball [Le Ball des Folles], 2021)’ 영화는 시작한다. 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이었고, 나라에서 국장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귀족 집안의 큰 딸인 외제니 클레리(루 드 라주)는 영혼들과 대화를 하는 자신을 느끼게 된다. 죽은 할아버지가 나타나서 40년 전 잃어버린 할머니의 약혼 선물인 목걸이를 찾게 해주질 않나.....
외제니의 자유로움을 억압하려는 아버지 몰래 하층민들이 다니는 몽마르뜨르(거기가 하층민들이 다니는 곳?) 어느 찻집에 가서 책을 읽다가 에르네스트라는 시인을 만나서 ‘영혼의 서’라는 시집 한 권을 얻는다.
“내 육체를 본 게 아니라면 당신은 내 영혼을 본 거예요”
에르네스트의 이 한 마디에 체한 가슴이 뚫린 듯, 한 대 맞은 듯한 외제니.
그렇지만 외제니는 미쳤다는 판단 아래 파리의 ‘살페트리에르’ 병원으로 강제로 끌려가게 된다. 거기에서 루이즈라는 환자의 옆 침대에 있게 되며 둘은 친해진다. 루이즈는 히스테리라는 병을 앓으며 자주 발작을 일으켜서 병원으로 오게 된 여인이다. 이 병원에 자주 오는 한 의사가 자기 약혼자인 줄 착각하고 지낸다.
외제니는 정기 검진과 의사 상담을 받게 되는데 의사가 죽은 자와 대화를 하는 것은 정상이 아니라고 하자, “왜 하느님을 믿는 것이나 성모 마리아를 봤다는 것은 이상한 게 아니고 영혼의 존재를 믿는 건 부적절한 거죠?”라며 되묻는다. 의사들은 조금만 이상하면 모두 히스테리병으로 진단해 버리는 상항에서 외제니는 도저히 어찌할 방법이 없다.
유럽 최고의 살페트리에르 병원
살페트리에르 병원은 당시 세계 최고였고, 지금도 프랑스에서 유명한 병원으로 알려져 있다. 병원이 자리한 그곳은 원래 화약공장으로 쓰던 자리였다. 점차 거리의 창녀들, 부랑자들, 정신질환자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바뀌더니 1656년 루이 14세가 병원을 짓게 한 이후 점점 확장하면서 지금에 이른다. 프랑스 혁명 당시까지만 해도 만 명의 환자를 입원시켰다고 할 정도로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병원이었다.
신경과학 분야에서 아직까지도 이름을 떨치는 장 마르텡 샤르코(Jean-Martin Charcot, 1825~893) 박사가 1800년대 중반 살페트리에르 병원에 정신의학과 책임자로 있기도 했다. 당시는 뇌의 기능을 중심으로 정신의학의 문제를 밝히려고 했던 때라 신경의학 전문가인 샤르코 박사가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정신의학과 책임자로 온 것은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그는 주로 최면요법으로 정신질환자들을 치료하고자 했는데, 그 추종자들과 함께 살페트리에르 학파로 불리기도 했다.
이 병원은 프로이트가 신경병리를 연구하기 위해 샤르코 박사 밑에서 공부를 하다가 의견 충돌로 몇 개월 만에 떠나버린 곳, 에이즈로 고생하던 미셀 푸코가 사망한 곳, 1997년 8월 31일 새벽에 영국의 다이애나 전 왕자비가 파리 시내에서 교통사고를 당하고 급히 후송되어 사망한 곳이기도 하다.
영화에서는 샤르코 박사가 환자를 이해하지 못하는 냉혹한 의사로 묘사되지만, 학계에서는 당시 최첨단 정신치료 방법인 최면요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하며 신경의학 분야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의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샤르코 박사와 정신의학의 선구자 피넬
영화에서는 샤르코 박사와 똑같이 분장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그는 의사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 히스테리를 앓는 루이즈를 세워놓고 최면요법을 걸어서 그 증상을 드러내 보이는 시연을 한다. 이 장면은 어느 화가가 그린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의 의학 교육(A Clinical Lesson at the Salpêtrière)’이란 그림을 그대로 옮겨온 것으로 보인다. 교육 장소에 모인 사람들과 샤르코 박사의 연기는 실제와 너무 닮아서 정찬을 먹다가 얻는 별미처럼 느끼게 된다.
살페트리에르 병원을 말하게 되면 또 한 사람을 기억해야 한다. 정신의학의 세계에서 위대한 사람 중 한 명인 필리프 피넬도 이 병원 정신질환자들의 책임자로 근무했다. 의사 초년 시절부터 의학잡지를 통해 정신질환자들의 수용소 감금을 반대하는 글을 실었고, 그들을 비인간적으로 대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가 1793년, 정신병원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비세트르 병원 원장으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환자들이 쇠사슬에 묶여 생활했고, 철창이 달려있어서 외부 사람들이 구경하게끔 되어 있었다. 피넬은 부임하자마자 모든 환자들의 쇠사슬을 풀어주도록 했다. 이것이 유명한 ‘정신질환자들의 족쇄를 풀었다’라고 알려진 사건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1794년에 피넬은 살페트리에르 병원의 책임자가 되어 부임한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 병원은 범죄를 저질렀거나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여성들을 수용하는 곳으로 일 년에 수백 명이 들어오고 그중 2할 이상은 죽어서 나갔다.
그는 감옥과 같았던 곳을 생활할 수 있는 공간으로 개선해 나가게 만들고, 인간적인 대우를 하도록 고쳐나갔다. 피넬이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장례식에서는 과거에 살페드리에르 병원에 있었던 여성들도 많이 참석했고, 그들은 울면서 운구 행렬을 따랐다고 한다.
미친 여성들의 무도회
억지로 수용된 외제니는 모든 사람들이 무섭고 낯설 수밖에 없다. 살기 위해 적응해나가던 그는 병원 책임 간호사인 준비에브 글레이즈(멜라니 로랑)를 만나 죽은 동생에 대해서 얘기하면서 만나게 해주겠다는 제안을 하지만 믿지 않는다. 외제니를 지켜보다가 어느 날인가는 아버지가 갑자기 아프게 된 것을 그가 말해주는 상황을 맞게 되자 조금씩 믿음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샤르코 박사와 의사들은 그가 점점 나빠지고, 다른 환자들에게 영향을 준다고 하며 독방에 가두게 되고..... 어두운 독방과 괴롭힘은 그를 점점 더 피폐하게 만들어버린다. 외제니는 감옥과 같은 이 병원을 어떻게 해야 나갈 수 있을까?
영화의 제목인 ‘매드 위민스 볼(The mad women's ball)’은 ‘미친 여성들의 무도회’란 뜻으로, 살페트리에르 병원에서는 매년 사순절의 넷째 일요일마다 파리의 고위층 인사들이 참석하고 환자들을 위로하는 무도회를 개최하는 전통에서 따온 것이다.
피넬과 같은 선각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신질환자들의 치료라고는 시설에 감금하다시피 하고, ‘수(水)치료’ 혹은 ‘자석요법’이나 2,000년 전 히포크라테스 당시부터 행해져 온 수준 높은 치료(?)인 ‘채혈요법(피를 다량 뽑는 것)’뿐이다. 그나마 현대의학에 가까운 것은 에테르 마취 정도였던 시대, 갇혀 살았던 그들의 모습을 영화는 보여주려고 한다.
감독을 맡은 멜라니 로랑은 우리에게 익숙한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나우 유 시 미’,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연출했으며, ‘매드 위민스 볼'에서는 간호사인 준비에브 역으로 출연하여 훌륭한 연기를 보여준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