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화'가 아닌 '수어' ... 엄연히 언어체계다

  • 등록 2022.10.27 10:3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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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고병수의 '영화와 만난 의학'(20) 간단한 단어 중심의 표현 ... 수어

상영 시간 전부를 통틀어 대사도 얼마 없고 아주 조용한 영화가 있다. 몇 분 동안 눈을 감고 있으면 영상이 켜져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말없이 흐르는 영화..... 바로 ‘나는 보리(Bori, 2018)’이다.

 

11살 보리(김아송)는 강원도 주문진의 어촌 마을에 산다. 남들처럼 웃기도 잘하고 친구들과도 즐겁게 지내는 평범한 아이지만 한 가지 고민이 있다.

 

집에서 다른 가족들과 격 없이 소통하고 어울리고 싶은 것. 그렇다고 보리가 가족들로부터 외면 받거나 관심을 못 받는 건 아니다. 자기 빼고 엄마, 아빠, 남동생 모두 청력장애를 가지고 있는데 자기만 말하고 들을 수 있고, 그들이 수어로 대화를 하며 즐거워할 때면 자기는 소외 받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학교 가는 길이면 중간에 있는 사당 앞에서 매일 소원을 빈다. ‘나도 귀를 멀게 해서 엄마, 아빠, 동생과 같이 어울리게 해주세요.’

 

청각장애인 가족

 

아빠와 남동생 정우는 선천성 농아 장애를 가지고 있었지만 엄마는 어릴 때 심하게 열병을 앓은 후 다음 날부터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아마 홍역을 앓았던 것이 아닌가 짐작할 수 있다. 아빠는 동네 사람들이 말 못하고, 소리도 못듣는 자기를 보고 손가락질해서 조용히 바닷가에 앉아 낚시하는 것을 좋아했다며, 엄마는 낚시하다가 만났다며 보리에게 자랑한다. 그러면서 보리가 안 들려도 전혀 걱정되지 않고 오히려 같이 수어를 하면서 함께 하니까 좋다는 아빠를 보고 보리는 긴가민가 한다.

 

친구 말대로 리시버를 귀에 꽂고 음악을 최대한 크게 틀고 귀를 상하게 하려고 해봤지만 별로 신통치 않다. 보리는 바닷일 하는 해녀들이 귀가 먹먹하다는 걸 알고는 일부러 바다에 뛰어들어버린다. 겨우 건져졌어도 정말로 청력을 잃었는지 안 들린다고 하는 보리.

 

소리를 못 들으니 좋은 점은 소원대로 가족들과 편하게 수어로 대화하고 함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고, 나쁜 점은 친구들이 말을 못 알아듣는다고 무시하거나 자기에게 말도 안 걸어온다는 것. 그제서야 보리는 깨닫는다. 동생 정우가 축구도 잘하고 활발한 아이지만 학교 수업 때는 못 알아들으니까 잠만 자고, 친구들과 있을 때도 그림자 취급당했다는 것을..... 아무도 말도 못하고 귀가 안 들리는 정우에게 말을 걸거나 상대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화는 위기나 갈등 같은 큰 굴곡이 없이 편안하게 지나가지만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여러 번 느끼게 된다. 일부러 감동을 주려는 것도 아니고 너무 솔직한, 그리고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결국 보리는 귀가 멀지 않았어도 그런 것처럼 속여서 가족과 함께 하고자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될 때, 동생 정우가 청각장애라서 축구팀 주전에서 빼지는 현실, 그런 정우는 수업 때나 친구들 관계에서 계속 소외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리가 귀가 안 들리는 척 하면서 깨달았을 때, 아빠가 귀가 안 들리는 보리가 오히려 더 좋다고 할 때..... 우리가 잘 듣고 볼 때는 못 느꼈던 일들을 보리는 경험하면서 알게 되었다. 이런 것들을 감독은 관객들에게 전달하려 했던 것 아닐까?

 

수어의 원리를 느끼게 해주는 영화

 

영화에서는 수어로 가족들이 대화를 나눌 때 자막에 그 뜻을 전달하기 위해 번역 내용을 써준다. 그런데 이 표현 방법이 좀 독특하다. 완전한 문장이 아니라 간단한 단어 중심의 표현을 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아빠가 “보리야, 내일 할아버지 댁에 가니?” 이렇게 물을 때 자막에는 <보리>, <내일>, <할아버지>, <가?> 이렇게 표시된다. 조사나 어미는 군더더기로 버려도 되고 필요한 상황에서만 약간 표현할 뿐이다. 실제 수어가 전달하는 방식이다.

 

감독이 설명은 안 했지만 눈치 빠른 관객이라면, 수어를 조금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자막이 왜 그렇게 표현됐는지 알아차렸을 것이다. 그 정도로 생각이 깊은 영화다.

 

단오절에 보리가 가족을 놓치고 파출소에 있을 때 나중에야 겨우 부모가 달려와서 보리를 데려가는 장면이 있다. 그때 엄마의 손에는 축제가 열리던 장터에서 산 것 같은 물건이 비닐에 싸여서 들려져 있다.

 

무심한 감독이었다면 그저 구경하다가 빈 손으로 오게 해도 되는데, 아마 이것저것 구경하고 가지고 싶은 것도 샀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일부러 파출소로 달려오는 상황에서도 그것을 들고 오는 장면을 연출한 게 아닌가 짐작된다. 그만큼 등장인물들의 대사나 행동, 소품들마저 섬세함이 엿보이는 영화이다.

 

보리의 청력이 걱정되어서 전문병원에 가서 청력 검사를 하는데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는 결과가 나온다. 정밀 청력 검사는 조용한 방에 들어가서 귀를 완전히 막는 헤드셋을 쓰고 음파를 흘려보내며 하는 것이다. 낮은 음파에서 고음파까지 들려줄 때 어느 영역에서 이상이 있는지를 파악해야 중이나 내이의 문제인지, 청신경의 문제인지 감별할 수 있다. 아무 이상 없이 거짓으로 청력을 잃은 척 하는 보리에게서는 당연히 일관성 있는 결과를 못 얻을 수밖에.....

 

함께 검사한 정우는 인공와우 수술을 권고 받는다. 이것은 청각을 증폭해서 뇌로 전달하는 달팽이관을 인공으로 만들어 끼우는 방법으로 첨단 의학기술이다. 그리고 인공와우가 가능하다는 것은 소리 신호를 뇌로 전달하는 청신경이 살아있다는 뜻이다. 수술에는 3000만 원이 필요하다는데 아빠는 걱정 말라는 듯이 수술을 시키려고 한다. 마음은 알겠는데 고깃배에서 일을 하는 아빠는 그 큰 돈을 어떻게 마련할까?

 

참고로 ‘수화’라고 하지 않고 ‘수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언어체계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이나 언어장애인들은 수어라는 말을 쓰기를 원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고병수는?
= 제주제일고를 나와 서울로 상경, 돈벌이를 하다 다시 대학진학의 꿈을 키우고 연세대 의대에 입학했다. 의대를 나와 세브란스병원에서 가정의학 전공의 과정을 마쳤다. 세브란스병원 연구강사를 거쳐 서울 구로동에서 개원, 7년여 진료실을 꾸리며 홀로 사는 노인들을 찾아 다니며 도왔다. 2008년 고향 제주에 안착, 지금껏 탑동365의원 진료실을 지키고 있다. 열린의사회 일원으로 캄보디아와 필리핀, 스리랑카 등 오지를 찾아 의료봉사도 한다. '온국민 주치의제도'와 '주치의제도 바로 알기' 책을 펴냈다. 한국일차보건의료학회(KAPHC) 회장, 한국장애인보건의료협회(KAHCPD) 부회장, 새로운사회를여는연구원 이사장 등을 맡아 보건의료 선진화 방안과 우리나라의 1차 의료 발전방안을 모색하는 보건정책 전문가다. 2020년 4.15 총선에 정의당 후보로 나와 제주갑 선거구에서 분루를 삼켰지만 총선 직후 곧바로 코로나19 감염이 창궐하던 대구행 의료자원봉사에 나서 숱한 이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했다. 정의당 제주도당위원장을 역임했다.
 

고병수 가정의학과 의사 bj97100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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