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2년 당시 북제주와 남제주에 2개의 교육구가 설치되고, 군수를 당연직으로 하는 교육위원회가 구성되어, 북제주 김시형, 남제주 강은옥이 교육감으로 선출되었다. 1955년 9월 제주읍이 시로 승격되며 새로 조직된 제주시교육감에는, 김시형이 임시 맡다가 1957년 2월 초대 제주시교육감으로 문종성이 선출되었다. 1955년 북제주·남제주 교육감이 각각 연임되나, 시군단위 교육자치제는 초등교육만을 담당하였으므로, 중등교육은 여전히 도단위의 지자체에서 담당하였다. 1961년에 일어난 5·16으로 교육행정이 다시 일반 행정에 예속되게 되었다. 드디어 1964년 1월 도단위로 하는 교육자치제가 출범하여, 여성으로서는 전국 최초로 최정숙 전신성여학교 교장이, 제주도 초대 교육감으로 취임했다. 현재 15대 이석문 교육감까지의 주요 교육활동 및 변천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대 최정숙 교육감(1964.2.4.~1968.2.3.): 과밀학급(학급당 780명)과 2부제 수업, 재일동포 도움 받아 풍금보내기, 도로변 꽃 심기, 학교 밀감과수원 조성 운동 등. 제2대 부대현 교육감(1968.2.4.~1972.2.3.): 쥐와 송충이 잡기
▲ 제주여자중학교 일제 강점기에서는 전남 학무행정에서 시학(장학사) 1명이 제주교육행정을 담당하였다. 미군정은 1946년 8월 제주도를 도제(道制)로 개편하여 교육행정도 격상시켰다. 초등학교 설립을 위해 도지사의 인가를 쉽게 받게하여, 마을의 향사나 공회당 또는 읍면사무소의 창고나 부속건물 등을 이용하여 개교하게 하였다. 제주에 대한 일제의 도제(島制)와 미군정의 도제(道制)에서 보듯, 36년의 일제 강점기에서는 중등학교가 2학교인 반면, 미군정기 3년 사이에 무려 12개의 중학교가 개교하였다. 일제가 식민지교육으로 우민화 정책을 편 반면, 미군정기의 교육은 문맹퇴치에 주안점을 두었다. 이에 따라 성인교육을 위한 공민학교는, 대부분 초등학교에 부설되거나 부락의 향사·공회당·읍면사무소의 창고나 부속건물 등을 이용하여 설립되었다. 제주주정공장공민학교처럼 사원교육을 위해 회사에 설치된 공민학교도 있었다. 1948년 정부수립 이후에도 공민학교는 계속 증설되었으며, 1950년대 초까지 초등학교 수와 대등할 정도로 공민학교가 세워졌다. 1950년대 중반부터 초등학교 의무교육 확대와 문맹률 감소에 따라 공민학교는 점
▲ 서당 훈장과 학동들 [사진=제주도청] 여말선초부터 이어져 온 농촌지역의 교육기관인 서당은, 20세기에 들어와서는 한학 중심 전통서당에서의 훈학과 근대교육 중심 개량서당에서의 훈학이 혼재되었다. 제주도 자료에 의하면 1926년 제도학교인 보통학교 학생수는 6000여 명이고, 전통서당과 개량서당은 2만2000명이며, 1936년 개량서당 69개, 전통서당 90개로 집계 되었다. 개량서당은 숙·서숙·사숙·학숙·학당·학사 등으로 불리며, 한문서당인 재래식 서당과 보통학교의 명칭과 구별되었다. 갑오경장(1894년) 이후 대한제국에 의해 소학교령이 제정된 지 10년인 1905년 대한제국의 국권을 찬탈한 일제는, 조선통감부를 설치하고 교육을 비롯한 모든 권리를 장악하면서 종전의 소학교란 이름을 보통학교로 바꿨다. 이후 보통학교는 1926년 심상소학교로, 1941년 국민학교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일본은 강점기 초기에 1군1교제로 1907년 제주보통학교, 1909년 정의보통학교, 1911년 대정보통학교 3개 학교만을 세웠다. 3·1운동 이후 소위 문화정치를 표방하면서
▲ 제주북초교의 전신인 제주공립보통학교. 사진은 제19회 남학생 졸업기념 사진 촬영 모습이다(1929년). [사진=제주도교육청] 근대의 시작이라는 1876년에 일본과 맺은 강화도조약은 불평등 조약이었지만, 우리나라가 서구열강의 문화를 받아들이는 계기도 되었다. 신문화의 유입은 실학사상·동학사상·개화사상·위정척사 사상으로 이어지고, 외국에 사절단과 유학생 파견 등으로 군사·교육·산업·행정 등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1894년에 일어난 갑오경장 이후 신식학교 형태의 초등교육기관의 설립으로 이어져 소학교가 탄생하는 배경이 되었다. 당시의 조정은 현대적인 교육제도를 수립하기 위하여 여러 제도와 법령을 공포하였는데, 그중 하나가 소학교령이다. 소학교령은 초등교육을 위해 1895년 7월 공포한 법령으로, 이영에 의하여 새로운 소학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학교인 1883년 멜렌돌프 등이 세운 영어학교와 1885년 아펜셀러가 세운 배재학당 등이 개교했다. 1895년 고종은 ‘교육을 국가보전의 근본으로 여기고 임금이 교육에 관심을 기울여
1392년 조선 태조로 즉위한 이성계는 제주에 향교부터 세우도록 했다. 이것은 지방향교로서는 가장 일찍 설립된 예이다. 1394년에 향교에 교수관을 두고 10세 이상의 토관자제들을 교육시키기 시작했고, 그들로 하여금 과거에 응시케 하여, 때로는 중앙인재로 기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는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이 유명하다. 여말선초(麗末鮮初)에도 고려왕조 유신들이 제주에 유배와서 제주교육에 기여한 바, 대표적으로는 제주의 4현이라 부르는 고려 예문관 대제학인 한천(가시리, 청주 한씨 입도조), 고려 공양왕 때 도첨의좌정승을 지낸 김만희(곽지, 김해 김씨 입도조), 고려 조정의 교리이자 대학자 이제현 증손인 이미(외도, 경주 이씨 입도조), 태조 이성계의 계비인 선덕왕후의 4촌동생인 강영(함덕, 신천 강씨 입도조) 등이 있다. 이외에도 양천 허씨 입도조인 허손, 경주 김씨 입도조인 김검룡 등 적지 않은 유민들이 이때를 전후하여 입도, 지역주민을 훈학하며 제주교육의 초석을 다지기도 했다. 제주향교가 설치되어 50여 년이 지난 1450년을 전후하여 월계정사(한림 명월)와 김녕정사(구좌 김녕)가 세워졌다. 제주목사는 월계정사를 서재로 김녕정사를 동재
▲ 제주교육천년사 방송프로 중 첫 회 소개 장면 2016년 초 도교육청 교육국장 재직 시절, KBS 제주방송국에서 ‘제주가 보인다’라는 프로그램에 ‘제주교육 백년사’라는 제목으로 출연할 것을 제의하였다. 백 년 전이라면 짙은 아픔이 배어있는 일제 강점기 시대가 아닌가. 현대교육은 논외로 친다 해도 근대교육에 한정한다면 제주교육은 근현대에 기원을 둔 것처럼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제주교육이 일천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역으로 제의를 하였다. ‘제주교육 천년사’를 이야기 하자고. 이 제의가 받아들여져서 제주교육 천년사를 8부작으로 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었다. 다음은 당시에 소개한 내용들 중에서 간추린 것이다. 교육은 인류가 교육을 말하기 이전부터 인류의 생활 그 자체였고, 교육제도가 확립되기 이전부터 교육활동은 생존과 후계를 위해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전개되어 왔다. 모든 생활이 곧 생존과 후계를 위한 교육과정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정교육에서 비롯된 학동교육은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을 거치면서 국가교육과 세계교육으로 이어진다. 이렇듯 제주교육은
▲ 음험한 기운이 배어있는 김녕 본향당 내부 지난 세월 사이클을 타고 오가다 와흘 본향당에 서너 번 들리기도 했다. 와흘 본향당에는 수령이 수백 년이나 되는 거대한 팽나무들이 신목으로 있어 신령스러움이 가득하다. 신당 주위의 팽나무의 우람한 가지가 담장 밖까지 길게 뻗어있고 형형색색의 옷감과 소지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다. 주위에 심겨져 있는 동백나무는 삼승할망이라 불리는 산신(産神)할망의 상징목이기도 하다. 본향당 입구에는 본풀이를 새긴 비석이 있고, 당 안에는 ‘백조십일도령본향신위’라는 한글 위패가 있다. 한쪽에는 낮은 제단이 잘 꾸며져 있으나 비어 있었다. 다른 한쪽에 있는 조촐한 현무암 제단엔 굵은 촛대들이 줄지어 있어,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 소원을 빌고 있음을 말해준다. 거기에 숨겨진 사연을 안 것은 한참 후의 일이다. 제주 신당의 원조는 송당 본향당이다. 이곳 당신인 금백주는 소로소천국과 결혼하여 아들 18명과 딸 28명을 낳았고, 그들이 낳은 자식들은 제주도 각처로 흩어져 당을 만들고 좌정하였다. 와흘 본향당은 송당 본향당의 열한 번째 아들인 백조도령이, 이곳 서정승 딸과 혼인하여 처신(妻神
▲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철새도래지 <제이누리 DB> 종달리로 향했던 시선을 하도리와 상도리 그리고 저 멀리 송당으로 돌린다. 지미봉 서쪽은 철새도래지가 있어 제주 유일의 탐조관광지로 유명한 하도리 마을이다. 예전에는 별방이라 불리었다. 임진왜란 전 1510년(중종 5년) 장림목사가 이곳에 특별한 방어진지가 필요하여 지어진 이름이 별방진인데, 하도리 마을은 이후에 형성되었다. 하도리는 제주에서 해안선이 6.3km로 가장 긴 마을이자, 백록담에서 가장 먼 마을이고, 해녀가 가장 많은 마을이다. 1932년에 일어난 해녀항쟁도 하도리 해녀의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세화리·종달리·연평리(지금의 우도) 출신의 해녀 등 연인원 1만 7000명이 참가 했던 해녀항쟁은, 제주 최대의 항일운동이었다. 하도리에는 해안을 따라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평야지대도 건천도 오름도 거의 없는 편이다. 하지만 사시사철 샘물이 솟는 용천수가 20여 곳에 있고, 온갖 해초가 널린 깨끗한 바다가 있다. 하도리와 지미봉 사이에 있는 철새도래지는, 원래 바닷물이 들고 나는 물길이었는데, 간척사업으로 상류 쪽은 뭍이, 하류 쪽은 늪지
▲ 성천답관개유적비(星川沓灌漑遺跡碑) 제주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 인물인 채구석은, 1901년 이재수의 난 당시 대정군수였다. 그는 바위를 뚫어 천제연물로 논을 일궈낸 개척자이며, 그의 후손들은 제주도와 합작하여 ‘제주항공’이라는 기업도 세웠다. 천제연 3단 폭포에 세워진 ‘성천답관개유적비(星川沓灌漑遺跡碑)’에는 과학적인 사고와 개척정신이 뛰어난 채구석 군수를 기리고 있다. 당시 토목기술로는 불가능한 상황임에도 1906년부터 3년 동안의 공사 끝에 천제연 도수로 공사를 완공, 황무지를 옥답으로 바꿔 주민들이 쌀 생산을 할 수 있도록 기반조성을 한 역사적 사실 을 기록하고 있다. 천제연 도수로가 시작되는 부분은 단단한 조면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이었다. 물길을 내려면 바위를 뚫어야 했다. 장비라고는 곡괭 이·정·징 등이 고작이었던 시절, 그는 물과 장작불과 소주와 온도 차이를 이용하는 과학적인 공법을 동원했다. 암반 위에 장작불을 뜨겁게 지펴 바위를 달군 다음 독한 소주를 부어 뜨겁게 하고는 찬 물을 부어 급속히 냉각시켜 폭발게 했다. 단단한 바위가 급격한 온도
▲ 우도도항선 뒤로 종달리 지미봉이 보인다. 지미봉 마을인 종달리는 패총이 발견될 만큼 오래된 역사를 지닌 마을이다. 더욱이 종달리에는 제주에서 흔치 않은 논밭지대가 있다. 오래전부터 우리집은 종달리와 관계를 맺고 있다. 지미봉 아래에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논밭이 있기 때문이다. 지금은 갈대로 우거진 황무지이지만 1970년대만 해도 우리논밭을 병작한 농부가 수확한 벼를 마차 가득 실고 고향집에 오곤 했다. 이곳에서 10여 킬로나 떨어진 곳에 살았던 필자의 조상이, 어떻게 논밭을 매입했을까 하는 의구심으로 더욱 애정을 갖게 된 곳이기도 하다. 지미봉 아래에 있는 다음의 안내문이 그 의문을 풀어주는 단서가 되기도 했다. 신착-개 앞바다의 간척사업 옛터: 이 근방은 패총 지역이었다. 종달리는 처음에는 정의현 관내이나 후기에는 제주목에 속한 섬 동쪽 끝의 해촌으로, 우도로 건너는 요충지이자 본도 최대의 소금생산지였다. 광활한 갯벌을 막아 농토로 이용하고자 대정군수를 지낸 채구석(1850-1920, 한림)에 의해 1899년 시도되었다. 그는 ‘신속 곶’으로 둑을 쌓아 논을 만들었으나 지반이 견고하지 못해 해수가 땅
쾌청한 아침을 맞은 필자는 학생들과 함께 야영수련회에 나섰다. 영지는 한라산 자락에 위치한 리조트이고, 음식은 식당에서 해결하였다. 예전의 캠프 화이어 행사는 강당의 휘황찬란한 조명 아래 전문가가 진행하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학교라고 변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야영지에서의 밤은 사람들을 설레게 하는 마력을 지닌 모양이다. 밤하늘의 별을 세며 놀던 옛 정취에도 빠져들게 한다. 학생들도 이밤 무슨 정취에 빠질까. 그들도 자연을 만나면 감정의 골이 높아질 것이다. 야영지에서의 밤은 그렇게 익어간다. 다음 날 아침 6시에 기상한 나는 혼자서 주변산책에 나선다. 리조트 주변에 계곡이 있어 산책하기에는 적격이다. 어쩌다 생을 마감한 까마귀가 보여 적당한 곳에 묻어주고 계곡 따라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러다 만난 것이 원동마을 안내글이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산책을 나섰다 예기치 못한 행운을 얻은 것이다. 폐동이 된 원동마을의 비극을 여러 번 들었는데, 오늘 그 현장에 내가 간 것이다. 애월읍 소길리에 소재한 원동(院洞)마을! 지금은 사라진 마을이고 가슴을 아프게 하는 이름이다. 20가구가 채 안된 원동마을은, 조선시대에 제주목과 대정현
▲ 4.3평화기념관에 유해 발굴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연한 다랑쉬굴 특별관. 최근의 인구증가 현상에서 제주의 변화를 읽듯, 과거의 인구감소 현상에서 역사의 부침을 읽는다. 제주인구 1925년 20만5478명, 1938년 20만3651명, 1944년 21만9548명에서 보듯 급락을 거듭하던 제주인구가 1945년에는 27만6148명, 해방과 4·3을 맞으며 잠시 30만 인구시대를 맞는다. 여기에도 제주섬의 탈출잔혹사는 숨어 있었다. 일제에 의한 제주도 군사시설은 1926년부터 시작되었다. 일제가 제주도를 일본 큐슈와 중국 남부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로 삼았기때문이다. 대정지역에 남아있는 전폭기 격납고 등 일제의 군사시설이 이를 증명한다. 1945년 초 일제는 미군과의 결전에 대비해 제주도 방어에 주력하는 결7호 작전을 수립했다. 당시 제주인구가 23만인데 비해 일본군은 8만여 명이나 주둔하고 있었다. 제주도 전역이 전쟁화되어 엄청난 진지가 구축되었고 제주선인들에게 막대한 노력동원을 강요하였다. 1945년 5월 미군의 공격을 피하여 육지로 피난해 가던 여객선이 폭격되어 280명이 사망한 것을 시발로, 제주 산지항&mi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