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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는 제주에서 세한도만 남기지 않았다8년3개월 제주유배 중 생긴 숱한 제자들
제주사 인물이야기  |  jnuri@jnuri.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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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2.06.25  10:3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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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적소(謫所)이지만 명사(名士)를 찾는 제주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을 터이고 이에 따른 추사에 얽힌 많은 일화들이 전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상전벽해의 변화와 구전자들이 유명(幽明)을 달리함과 함께 숱한 전설은 사라져버렸고 추사가 머물다간 이곳 제주에는 다소의 억측이 섞인 기담(奇談) 몇 토막, 그리고 제주 향토사가의 문적에 실려진 간략한 추사관련 기사가 남아있을 뿐이다.

 제주 대정현에서의 추사의 유배기간은 1840년(헌종 6년) 9월부터 1848년 12월까지 만 8년 3개월, 햇수로는 9년 동안이었다. 처음에는 대정성 동문밖 막은골 교리(校吏) 송계순(宋啓純)의 집에 위리안치되었다. 후일 강대유의 집으로 옮겼는데 현재 ‘추사적거지 기념관’이 있는 곳이다. 또한 유배에서 풀려나기 전에는 물(식수) 때문에 안덕면 창천리(倉川里)로 옮겼다고 구전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추사의 유배에 관련된 제주유생들과의 종유(從遊)의 흔적은 이후 편찬된 향토지 등에 간략히 등재되어 전한다.

 대정읍 상모리 출신인 정재(正齋) 고병오(高炳五ㆍ1899~1972)가 편찬한 '원대정군지(元大靜郡誌)'에는 추사의 적려 유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대정읍 안성리에 있다. 집주인은 강효검이다. 공이 처음 왔을 때 안부를 묻는 이가 있으면 일어나 공손히 읍(揖)하여 대답하였다. 나랏일을 묻는 이가 있으면 눈물을 줄줄 흘렸다. 매일 서화로써 스스로를 즐겼다. 그런 까닭으로 마을과 고을의 서당에는 추사의 글이 퍼진 것이 많았다(102쪽)’.

 또한 심재(心齋) 김석익(金錫翼ㆍ1885~1956)의 '심재집(心齋集)' 파한록(破閒錄)에는 ‘후학들이 많이 따라서 배웠는데 시에는 이한진, 글씨에는 박계첨, 난초에는 강도혼이 모두 공의 범주에서 나왔다. 또한 강기석, 이기조, 김구오가 있는데 한때의 이름난 선비들이 많아 다 기록할 수 없다(320쪽)’, ‘김병욱 또한 추사의 필법을 본받아 필명이 크게 드러났다(290쪽)’고 하여 당시 적소에 드나들며 추사와 종유(從遊)하였던 제주의 유생들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한진(李漢震ㆍ1818~1881)의 호는 매계(梅溪). 조천읍 신촌리 태생으로 안달삼(安達三), 김희정(金羲正), 이계징(李啓徵), 고영흔(高永昕) 등 제주의 석학들을 문하에서 배출시켰다. 박계첨(朴癸瞻ㆍ1824~1850)은 일명 규안(奎安)으로 자가 계첨이며 이름은 혜백(蕙百), 호는 자기(慈杞), 애월읍 곽지리에서 태어났다. 강도혼(譜籍에는 道淳), 김구오와 함께 추사의 삼대문인(三代門人)으로 알려졌다. 강도혼(姜道渾ㆍ1816~?)의 자는 여천(汝天), 호는 선다(仙茶)이고 적소(謫所)의 집주인 강대유 차남이다. 조천읍 조천리 출신의 혁암(革菴) 김형식(金瀅植ㆍ1886~1927)이 쓴 그의 행장에는 ‘추사가 강도혼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도혼의 난초는 이미 구백구십구분의 묘경에 이르렀다. 만약 일분만 더 나아간다면 내가 마땅히 양보해야 할 것이다('革菴散稿' 337쪽)’라는 내용과 ‘추사가 유배에서 풀려나 서울로 돌아가자 추사를 만나러 바다를 건너다 일본에 표류하여 글과 그림으로 생활하다 몇 해 지나 고향으로 돌아왔다(337쪽)’는 내용이 보여 그와 추사와의 관계가 각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강기석(姜琦奭ㆍ1822~1878)의 자는 공규(公圭), 애월면 금덕리 유수암마을에서 생장하였다. 대정현 창천리에 머물고 있던 추사를 찾아가 한 겨울을 배웠다고 전한다. 그가 추사에게 받아온 글을 벽에 붙여두었는데 그 글에서 광채가 났다는 전설이 최근까지도 이 마을의 원로들의 입에서 구전되어 전해오고 있고 추사의 칠언절구 ‘섬아이에게 보여주다(示島童)’에 아울러 쓴 서문에 이러한 내용이 씌어 있다. 이기조(李基肇ㆍ1826~?)는 현 제주시 오라리 사람으로 ‘추사에게서 시를 배워 같은 무리에서 존중을 받았다('破閒錄'329쪽)’고 전한다. 김구오(金九五ㆍ1822~1900)의 자는 일이(一彛), 호는 소재(蘇齋). 제주 성안사람으로 19세 때에 김정희가 그 필법을 보고 칭찬하여 말하기를, “좁은 골목의 누추한 곳에 하늘의 맑고도 오묘한 조화가 있으니 … 불이 타오르다 물에 도달할 때(운이 막히어 통하지 않을 때)에도 또한 더욱 힘쓰고 힘써 하늘이 준 재주를 저버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增補耽羅誌' 379쪽)”라고 하였다.

 추사는 적거 중 많은 글씨를 남겼으며 대정향교 동재(東齋)의 의문당(疑問堂), 제주목관아의 좌인각(左寅閣), 영혜사(永惠祠ㆍ1871년 고종 8 철폐), 송죽사(松竹祠ㆍ1871년 고종 8 철폐), 조천읍 조천리의 연북정(戀北亭) 등의 제액이 모두 그의 글씨이다. 또 제주의 의녀(義女) 김만덕(金萬德ㆍ1739~1812)의 유덕을 찬양한 ‘은광연세(恩光衍世ㆍ은혜로운 빛은 길이 빛나리)’란 현판서를 김만덕의 양자 김종주(金鍾周)에게 손수 써 주었다 한다.

 추사의 방환(放還), 그 이후의 세대와 세태의 변천으로 그와의 거리가 더욱 희미해져버렸지만 그의 자취는 원악도(遠惡島) 제주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린 것이 아니었다. 추사는 제주유배기간 중 세한도(歲寒圖)만을 남긴 것이 아니었다.

글=백종진/제주문화원 문화기획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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