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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역사·문화의 중심 산지천은 흐른다[연합 포커스] 탐라국부터 수많은 사연 간직…잊혀가는 용천수·자연마을
"물허벅 지고 4∼5번 다녀…젊은 사람들 물 귀한 줄 몰라"
연합뉴스  |  www.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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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9.13  10:5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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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시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제주 옛모습'에 실린 제주시 산지천에서 물을 긷고 빨래를 하는 모습. 이 사진집에는 고 김홍인 선생이 촬영한 3천여 점의 사진 가운데 추려낸 200점이 실려있다. [연합뉴스]

옛 제주도심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산지천은 향수 어린 추억이 담긴 곳이다.

누군가는 산지천 인근에서 은어 낚시를 하던 추억을, 또 다른 이는 산지천 빨래터에서 빨래하고 물을 길어 집으러 나르던 고단했던 옛 삶을 떠올린다.

그뿐만일까.

조상 대대로 일궈 온 삶의 터전이자 탐라국의 중심지였다.

산지천은 제주의 역사와 문화, 수많은 사연을 간직한 채 계속해서 흐르고 있다.'

◇ 제주인의 삶의 터전 산지천
산지천은 한라산 북사면 해발 720m 지점에서 발원해 제주도심을 지나 바다로 빠져나간다.

산지천은 '산지'(山地)라는 말 그대로 '산이 있는 땅에 흐르는 내(川)'라는 뜻이다.

'산저천'(山低川)이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산지천 하류에 있던 '금산(禁山) 아래를 흐르는 내'라는 의미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이외에도 '산짓내', '가락천', '가락귀천' 등으로 불리기도 하고, 지역에 따라 하천의 중류(中流)인 제주시 이도동에서는 '박성내', 상류(上流)인 아라동 쪽에서는 '아랏내'라 불렸다.'

   
▲ 지난 8월 19일 촬영한 제주시 산지천의 모습. [연합뉴스]

인류 문명이 강을 중심으로 형성됐듯 제주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다.

제주 대부분의 하천은 평소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乾川)이지만, 산지천은 하류에 용천수(湧泉水, 땅 밑에서 솟아나는 물)가 풍부해 이곳을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됐다.

예부터 제주도 내의 최대 마을은 바로 '대촌'(大村), 산지천을 중심으로 한 제주시 원도심 일대였다.

먼 옛날 한천이 흐르는 지금의 제주시 용담동 지역에 큰 마을이 형성됐지만, 통일신라 시대에 해당하는 7세기 중반 이전부터 제주의 중심이 이곳 대촌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대촌은 제주성(濟州城) 안에 있다고 해서 '성내'(城內) 또는 성의 안쪽인 '성안'이라고 불렸다.

또 제주목(濟州牧, 조선시대 행정구역상 제주는 제주목·대정현·정의현으로 구분) 안이라는 뜻에서 '목내'(牧內), '목안', '모관'(목안의 현실발음)으로도 불렸다.

주변 마을에서는 '모관 간다' 또는 '성안 간다'고 말하며 제주성 동문과 서문을 통해 드나들었다.

마차를 끌거나 등짐을 지고 들어와 성안에서 농산물과 해산물을 팔고, 대신 옷이나 생활용구를 사서 돌아가곤 했다. 길을 나설 때마다 아들, 딸 또는 동생들이 시내 구경 하고 싶다고 떼를 쓰며 따라나섰을 터였다.

산지천 일대는 제주 사람들의 삶과 함께 탐라국 때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중심을 이루며 이어왔던 셈이다.'

   
▲ 300여 년 전 제주의 풍광을 담은 화첩인 '탐라순력도' 중 '건포배은'의 일부분. 조선 숙종 1702년 제주목사 겸 병마수군절제사로 부임한 이형상이 화공 김남길에게 남기도록 한 '탐라순력도' 건포배은 편에는 제주성 확장 공사 이후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제주도 세계유산본부 제공]

◇ 산지천이 성안에 들어온 사연은
산지천의 중요성을 엿볼 수 있는 각종 사건과 사연은 넘쳐난다.

산지천 하류에 산지항(제주항)을 축조하는 공사가 한창이던 지난 1928년.

항구 동쪽 해안 절벽을 폭파하던 중 2천여 년 전 중국 한대(漢代)의 유물이 다량 발견됐다.

오수전(五銖錢), 화천(貨泉), 대천오십(大泉五十) 등 중국 화폐와 청동으로 만든 거울 등이었다.

오수전은 기원전 118년부터 약 900년에 걸쳐 사용됐는데 한국, 일본, 인도차이나반도 등에 걸쳐 두루 쓰이던 국제적인 무역 화폐였다.

제주가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 등과 교류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이다.

산지천 하류에서 위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고령포'라고 하는 내항도 있었다.

제주목사로 부임한 이원진의 「탐라지」(耽羅誌)에는 '고령전, 옛날에는 고령포라 했다. 구전에 당나라 배가 파선한 곳'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해외 교역이 산지천을 중심으로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 지난 1928년 제주 산지항 축조공사 당시 중국 한나라 때 만든 오수전을 비롯해 화천, 대천오십 같은 중국 화폐가 출토됐다. 사진은 국립제주박물관에 소장된 유적의 모습. [국립제주박물관 제공]

제주성 밖에 있던 산지천이 성안으로 들어오게 된 사연도 흥미롭다.

1555년(명종 10) 발발한 을묘왜란이 발단이 됐다.

제주성은 동쪽에 산지천, 서쪽에 병문천을 자연 해자(垓字, 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성 주위를 둘러 판 못)로 삼고 있었다.

40척의 선단을 이끌고 온 1천여 왜적들은 제주에 상륙하자마자 제주성을 포위했다.

왜적들은 지금의 동문로터리와 사라봉 사이에 있는 높은 언덕에 진을 치고 제주성 안을 훤히 내려다보면서 공격했다.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역습의 기회를 엿보던 김수문 목사는 날랜 용사 70명을 선발, 가장 험준한 계곡인 남수각에서 기습 공격을 시도한 데 이어 기세를 몰아 총공격을 감행해 적을 무찔렀다.

을묘왜란은 제주성의 취약성을 여실히 드러낸 일대 사건이었다.

단순히 방어 차원의 문제만이 아니라 성 밖에 산지천이 자리 잡고 있어 자칫 전쟁이 장기화할 경우 식수 조달 문제가 컸다.

10년 뒤 새로 부임한 곽흘 목사는 성곽 확장 공사를 단행했다.

제주성을 동쪽으로 확장해 동성(東城)을 새로 쌓고 산지천이 성 안으로 흐르게 했다.

새로 성을 쌓아야 할 만큼 산지천은 제주 사람들에게 각별한 의미였다.

이외에도 김정, 송시열 등 산지천 일대에서 유배 생활을 한 많은 유학자의 숨결과 태풍 때마다 범람한 산지천으로 시름했던 백성들의 고통 등 수많은 사연이 넘쳐난다.'

   
▲ 지난 8월 19일 촬영한 제주시 건입동에 있는 제주물사랑홍보관 야외 쉼터 모습. 제주 용천수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금산물, 지장샘, 광대천 등이 있어 시민들을 위한 물생태학습터로 사랑받고 있다. [연합뉴스]

◇ 잊혀가는 자연마을과 용천수
물이 귀했던 만큼 물과 관련한 자연마을, 지명도 산지천 일대에 많았다.

산지천에는 산지물(가락쿳물), 금산물, 지장깍물(지장샘), 망애물, 광대천(광대물) 등 많은 용천수가 솟아났고 주변에 마을이 생겨났다.

지금의 건입동(建入洞)은 일종의 '산지 냇가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산지' 또는 '건들개' 등으로 불렸다. 이때 산지천 서쪽 마을을 '서착의', 동쪽 마을을 '동착의'라 했다.

또 광대천 일대 마을을 '내깍'이라고 했다. '깍'은 '끝' 또는 '밑'이란 뜻의 제주어로 '광대천이라는 냇물의 끝에 있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지장깍물 역시 당시 용천수 근처에 지장보살을 모셨던 신당(神堂)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장보살 밑에 있는 물'이라는 의미가 아닐까 추측해본다.

현재의 일도1동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던 '샛물골'은 제주성 동문의 하천을 정리하기 전 냇물이 마을 사이를 흐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그래서 한자명으로는 '간수동'(間水洞)이다.

동문시장 뒷골목 주변을 일컫는 '구명골'도 있었다. 이곳에 '구명못'이 있었는데 여기서 유래된 듯 보인다.

이 일대는 '구명논'이라고 불리며 논이 꽤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을 매립해 지금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동문재래시장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동문시장은 1960년대 제주시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다. 서문시장이 서쪽으로 들어오는 물산의 집결지였다면 동문시장은 함덕, 신촌 등지에서 들어오는 근교 농업 농산물의 집결지이기도 했다.'

   
▲ 제주시가 발간한 '사진으로 보는 제주 옛모습'에 실린 '물허벅'을 진 소녀. 이 사진집에는 고 김홍인 선생이 촬영한 3천여 점의 사진 가운데 추려낸 200점이 실려있다. [연합뉴스]

산지물 주위에는 조선시대 서당 이름과 연관된 용천수가 있었다.

1736년(영조 12) 제주목사인 노봉 김정이 후학양성을 위해 세운 삼천서당이다. '산지천'과 더불어 '급고천', '감액천' 등 3개의 샘물 '삼천'(三泉)이 있다고 해서 유래됐다.

산지물 남쪽에는 판서정이 있었다. 현재의 동문시장 내부 어시장 인근에 있었던 판서정은 1520년에 유배 온 충암 김정이 사람들이 빗물을 마시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생각해 우물을 파서 깨끗한 물을 마시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사람들은 충암이 형조판서를 지냈으므로 이 우물을 '판시물', '판서물', '판서정'이라고 불렀다.

이곳은 1940년대 허물어졌다고 하고 현재 그 자리에는 표지석만이 지키고 있다.

산지천변의 용천수는 이 일대 자연마을 주민들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제주성안 모든 마을의 것이었고 생명수였다.

이 전통은 수백 년 이어졌다.

관덕정 인근에서 살았던 김효신(80) 할머니는 "어릴 적 물허벅을 지고 30분 정도를 걸어서 산지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밥도 해서 먹고, 국도 해서 먹었다"며 "하루에 4∼5번은 물허벅을 지고 다녀야 했고 빨래하러 가야 하기도 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그는 "요즘처럼 수돗물 틀면 물이 나오던 때가 아니고 물이 워낙에 귀하던 때니까 먹는 물이나 씻는 물이나 풍족하지 않았다. 젊은 사람들은 물 귀한 줄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말했다.

이처럼 귀했던 용천수와 과거의 지명, 마을들은 각종 개발로 사라지면서 우리들의 기억에서 점차 잊혀가고 있다.' [연합뉴스=변지철 기자]

    [※ 이 기사는 '제주시 옛지명'(제주시·제주문화원 저), '일도1동 역사문화지'(제주특별자치도), '제주도 마을 이름의 종합적 연구'(오창명) 등 책자를 참고해 조천석과 경천암을 소개한 것입니다.] [2021.08.29 송고]

   
▲ 지난 8월 19일 촬영한 제주시 산지천의 모습. 산지천은 한라산 북사면 해발 720m 지점에서 발원해 제주도심을 지나 바다로 빠져나간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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