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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2)

로맨스 소설가 멜빈 유달(잭 니콜슨 역)은 지독한 강박증과 결벽증을 지닌 채 뉴욕시의 고급 아파트에서 참으로 ‘싸가지’ 없고 별나게 살아간다. 그러던 중 멜빈 유달(잭 니콜슨)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게이 화가 비숍이 집안에 침입한 강도에게 거의 죽을 만큼 폭행을 당하고 병원에 실려간다. 사고를 수습하러 온 비숍의 에이전트는 능수능란하게 사고의 뒷수습을 한다.

 

 

사고 수습과정에서 비숍이 애지중지 키우던 강아지 베델의 처리가 실로 난감하다. 비숍의 에이전트는 궁리 끝에 옆집에 사는 유달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비숍이 퇴원할 때까지 이웃으로서 강아지 베델을 돌봐줄 것을 부탁한다. 

 

그 에이전트는 아마도 유달의 악명을 전달받지 못했던 모양이다. 알았다면 언감생심 유달이 혐오해 마지 않는 ‘게이’의 강아지를 당분간 맡아달라는 부탁은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강아지를 아파트 창밖으로 내던지지만 않아도 감지덕지할 일이다. 그런데 사람을 기피하고 병적으로 청결에 강박증이 있는 유달은 자그마한 털뭉치 강아지 베델을 잠깐 굽어보다 뜻밖에도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인다.

 

그렇게 유달과 강아지의 한시적인 동거가 시작된다. 마주치는 사람마다 독설을 퍼부어대는 유달의 성격으로 보아선 강아지가 사료 한 알이라도 흘리고, 집안에 털 한 올만 날려도 욕설과 불벼락이 떨어질 법한데, 기묘하게도 유달은 강아지에겐 대단히 관대하다. 강아지 베델도 병원에 실려간 주인 비숍은 까맣게 잊고 유달과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만신창이가 됐지만 그나마 거동할 수 있을 만큼 회복한 비숍이 아파트로 돌아오고, 유달이 강아지와 헤어져야 할 시간도 돌아온다. 그토록 괴팍한 유달이건만 강아지와의 이별은 못내 아쉬워 끙끙댄다. 

 

다시 텅 비어버린 듯한 집에서 강아지의 빈 밥그릇을 망연히 굽어보기도 하고, 혼자 피아노를 치면서 눈물을 보인다. 이를 악물고 웃으며 눈물짓는 잭 니콜슨의 연기가 가히 일품이다. 조용필의 노랫말처럼 ‘아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유달은 사람에게는 정을 주지 못하지만 개에게는 정을 준다. 유달이 보기에는 아마도 사람이 개보다 못한 모양이다.

 

 

사람은 정을 줄 만한 상대가 못 된다. ‘개가 사람보다 낫다’는 사상은 역사 속에서 꽤나 뿌리 깊고 면면히 내려온다. ‘개처럼만 살자’는 의미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의 견유(犬儒)학파는 키니코스(Cynicos) 학파와 같은 이름이다. Cynic은 그리스어 개(canine)에서 비롯된 말이다. 

 

견유학파의 대표로 여겨지는 디오게네스는 개집 같은 통 속에서 잠을 자고 익히지 않은 고기를 먹고 말 그대로 ‘개처럼’ 살아서 ‘개 같은 철학자’라는 칭호를 얻었다고 한다. 디오게네스가 보기에는 인간들이 개를 모델로 삼아 ‘개처럼만 살았으면’ 싶었던 듯하다. 그만큼 그의 눈에 비치는 인간들이 하는 모든 짓거리들이 참으로 가관이었던 모양이다. 

 

그를 찾아온 알렉산더 대왕을 개처럼 통 속에 누워서 쳐다보며 ‘햇빛을 가리지 말라’고 ‘짖었던’ 참으로 개 같은 인물이다. 천하의 알렉산더 대왕을 그렇게 대할 수 있는 것은 개와 디오게네스밖에 없다. 인간들은 알렉산더 대왕을 보면 꼬리를 내리겠지만, 개들은 겨우 알렉산더 대왕쯤에 꼬리 내리지 않는다. 디오게네스는 각고의 수행 끝에 마침내 개의 경지에 올랐던 모양이다. ‘개처럼 살자’는 키니코스(cynicos)는 근현대에 내려와 인간들의 모든 행태를 비웃고 조롱하는 ‘냉소주의(cynicism)’로 발전한다.

 

모든 인간을 혐오하고 기피하고, 세상을 냉소하고 조롱하며 살던 유달의 변화는 우연히 잠깐 함께하게 된 이웃의 작은 강아지 베델에서 시작된다. 강아지 베델의 출연 분량은 단역급이지만 영화 속에서 차지하는 의미는 거의 주연급이다. 디오게네스에게 개가 스승이라면 유달에게도 개가 인생의 깨우침을 주고 새사람으로 태어나게 해준 스승이었던 셈이다.

 

플라톤에 따르면 믿고 사랑했던 인간들에게 느끼는 배신과 실망이 반복되다 보면 결국 인간 전체를 싸잡아서 혐오하는 ‘인간혐오증’으로 발전하고, 세상을 조롱하고 냉소하게 된다고 한다. ‘인간혐오증’이 선천적인 게 아니라면, 유달 역시 믿었던 사람들로부터 받은 상처가 인간 자체를 혐오하고 멀리하게 만들었던 모양이다.

 

 

유달은 사람들에게 치여 닫혔던 마음을 이웃집 강아지 베델과의 만남을 통해 조금씩 열어나간다. 천하의 괴팍한 악당 유달이 혼자 피아노 치면서 눈물 흘리게 만들다니 이 강아지의 힘은 실로 위대하다.

 

얼마 전 한 보도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가구의 25% 정도가 반려견을 ‘모시고’ 산다고 한다. 반려견을 모시고 사는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삭막하고 살벌한 현대사회에서 ‘개만도 못한’ 인간들에게 치이고 다친 영혼과 마음을 적어도 인간보다는 나은 존재인 개를 통해 치유받으려는 생각도 있는 듯하다. 사람은 멀수록 좋고 개는 가까울수록 좋다.

 

교회가 우후죽순처럼 늘어가는 현상은 그만큼 정신적으로 공허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할 수 있다면, 반려견이 폭발적으로 증가한다는 것도 어쩌면 많은 사람들이 사람으로 인해 고통받고 상처받고 있다는 증거일 수도 있겠다. 반려견이 늘어만 가는 사회의 끝은 어디가 될지 조금은 불안하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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