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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여야 한다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49)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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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3.02  08:5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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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시대에 조조(曹操)는 북상해 새외에 있는 오환(烏桓)¹을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남방의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당시에 원정을 감행하는 것은 무척 위험하였다. 많은 장수들이 원정하지 말 것을 권하였으나 조조는 군대를 거느리고 출격해 오환을 무너뜨리고 기본적으로 북방을 통일하는 대업을 완성하였다. 개선한 이후에 조조는 당초에 누가 북벌에 동의하지 않았는지 조사하라고 명했다.

반대하였던 사람들은 중벌을 받을까 두려움에 떨었다. 그런데 웬걸 생각지도 않게 조조는 그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모든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북벌은 이미 대승을 거뒀는데 어째서 반대한 사람에게 오히려 상을 내린다는 말인가.

조조가 말했다.

“북벌의 일은 분명 대단히 위험하였다. 내가 비록 요행히 승리를 거뒀지만 그것은 하늘이 도운 덕분이지, 내 결정이 뛰어나다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는다. 여러 사람들의 반대는 옳은 것이었다. 만전을 기하자는 계책에서 나온 조언이기에 상을 내린 것이다. 나는 모두가 이후에도 나와 다른 의견을 거리낌 없이 개진하기를 바란다.”

이후 사람들은 조조를 위하여 전심전력으로 충성하였다.

조조는 여러 의견을 배제하고 대승을 거뒀으면서도 교만하지 않았다. 자신만의 이치를 가지고 충언한 부하들을 충분히 인정하였다. 이것이 지혜다. 영웅의 도량이다.

공을 세우면 자기에게 돌리고 문제가 발생하면 부하에게 돌리는 것, 어디서 많이 보는 현상이지 않은가.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을 품고 있는 인물이어야만이 조조처럼 그렇게 할 수 있을 따름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부하에게 배울만한 것을 긍정하는 것, 그래서 조조는 일세를 풍미하였다.

   

송(宋) 태조 조광윤(趙匡胤, 927~976)은 조그마한 일로 주한(周翰, 생평 미상)에게 화가 나 곤장을 치려하였다. 주한이 태조에게 말했다.

“신은 재기(才氣) 하나로 천하의 명예를 얻었습니다. 장형을 받았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신의 명성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태조는 크게 웃으면서 주한을 풀어주라고 명했다.

자고이래로 큰 인물은 모두 이처럼 도량이 컸다. 자기 성질에 못 이겨 일을 그르치지 않았다.

서존재(徐存齋)²가 한림원에서 절강중부(浙江中部)에 파견돼 독학(督學)을 역임할 때에 나이가 30세에 지나지 않았다. 수재(秀才) 한 명이 문장 중에,

“안연은 공자의 탁월함을 괴로워하였다.(顔苦孔之卓)”³

라는 구절을 인용하자 서존재는 그에게 ‘두찬(杜撰)’[저술(著述)에 전거(典據)나 출처가 확실하지 않은 문자를 쓰거나 오류가 많음]이란 평어를 쓰고 4등을 주었다.

청년은 왜 그런지 문제를 제기하면서 시험지를 들고 서존재에게 가르침을 구했다.

“태종사의 견해, 깨우침은 당연히 정확합니다. 그런데 ‘고공지탁’ 이 구절은 양자(揚子) 『법언(法言)』에 나온 말입니다. 실제 제가 ‘두찬’한 것이 아닙니다.”

서존재가 책을 걷어 보고는 급히 일어나면서 말했다.

“나는 너무 어릴 때에 뜻을 이루었소. 너무 일찍 관직에 앉아있다 보니 학문을 게을리 하게 되었던 모양이오. 오늘에서야 그대에서 가르침을 받게 되었소이다.”

그렇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그 수재의 문장을 1등으로 고쳤다. 이 일이 세상에 알려지자 사람들은 서존재의 도량이 넓다고 칭송하였다.

용감하게 자신의 잘못을 고쳤다는 데에서 독학 서존재의 사람됨과 기량, 식견을 능히 알 수 있다.

다른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명(明)나라 신종 만력(萬曆) 초년에 어떤 수재(秀才)가 ‘원모장(怨慕章)’이란 제목으로 문장을 지었다.

문장 중에, “순(舜)의 부친이 되는 자도, 순의 모친이 되는 자도”라는 구절이 있어 당시 시험관이 4등을 주고 ‘불통’이라는 2글자를 평어로 달았다.

그 수재는 직접 시험관에게 그 말은 『예기·단궁(檀弓)』편에 나온다고 진술하였다. 결과는? 시험관은 부끄럽고 분한 나머지 성내며 말했다.

“너 혼자서만 『예기·단궁』을 읽었다는 말이냐!”

욕지걸이하며 그 수재의 문장을 5등으로 내려버렸다.

   

사람 사이의 도량에 큰 차이가 나는 것이 어찌 관리뿐이겠는가?

금(金) 왕조 네 번째 태자 김올술(金兀術)은 한 사병의 아내를 사랑하게 되자 몰래 그 사병을 죽이고 그의 아내를 차지하였다. 그는 그 여인을 대단히 총애하였다. 다른 처첩은 모두 푸대접받을 정도였다.

어느 날, 김올술이 낮에 잠자고 있었는데 손에 날카로운 칼을 들고 자신의 목숨을 뺏으려하는 애첩을 보았다. 김올술은 크게 놀라 뛰듯 벌떡 일어나 애첩에게 왜 그러냐고 물었다. 애첩이 답했다.

“나는 내 남편의 원수를 갚을 것이요!”

김올술은 그제야 자신이 잘못했음을 깨닫고 손을 휘휘 저으며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애첩을 내보내었다.

당일 김올술은 연회를 베풀어 아직 결혼하지 않은 장병들을 불러 모았다. 연회석상에서 김올술은 애첩을 불러내어 말했다.

“내가 너를 죽이려 해도 너는 지은 죄가 없고 ; 너를 내 곁에 두려 해도 그 또한 불가능하게 됐다. 오늘 네 자유에 맡기겠다. 저 많은 장병 중에서 한 명을 골라라. 그를 따라가면 되지 않겠느냐.”

애첩은 좌석에 앉은 장병 한 명 한 명을 진지하게 관찰하다가 장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김올술은 곧바로 애첩을 그 장수에게 하사하였다.

앞에서 말한 시험관의 도량은 서존재보다 못할 뿐만 아니라 멀리 변방에서 온 김올술보다도 못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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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올술(金兀術) :

완안종필(完顔宗弼, ?~1148), 여진(女眞) 사람, 여진 이름은 알철(斡啜), 또는 올술(兀術), 알출(斡出), 황알출(晃斡出), 하얼빈 아성(阿城) 해구하반(海溝河畔)에서 태어났다. 금(金) 태조 완안아골타(完顔阿骨打)의 넷째아들로 금나라 명장이요 개국공신이다.

김올술은 처음에 완안종망(完颜宗望)을 쫓아 요(遼)나라 천조제(天祚帝)를 원앙락(鴛鴦濼)까지 추격하였다. 천회(天會) 3년(1125), 군대를 따라 송(宋)나라를 공격해 탕음(湯陰)을 함락시키고 동경(東京) 공격에 참가하였다. 천회 6년(1128), 군대를 거느리고 산동(山東)을 공략해 송나라 군대 수만을 패퇴시키면서 청주(青州), 임구(臨朐) 등을 함락시켰다. 천회 7년(1129), 다시 송나라를 공격해 대명부(大名府), 화주(和州)에서 격파하였다. 이후 줄곧 금나라 주전파 대표로 여러 차례 남침을 이끌었다. 송나라 군대와 황천탕(黄天蕩), 부평(富平), 상원(尚原), 회수(淮水) 등지에서 격전을 벌였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천권(天眷) 2년(1139)에 금나라와 송나라가 강화하였다. 이듬해 김올술은 금나라 주화파 대신 완안창(完顔昌) 등을 주살하고 강화를 파기한 후 재차 대거 남침을 감행하였다. 순창(順昌), 영창(潁昌), 자고진(柘皋鎭) 등지에서 대패하자 개봉(開封)으로 후퇴해 방어하였다. 황통(皇統) 원년(1141), 송나라 재상 진회(秦檜)가 대장 악비(岳飛)를 제거하자 송나라에게 신하를 자처하라 협박하면서 황통강화(皇統講和)를 맺자며 태부(太傅)를 공격하였다. 이듬해 김올술은 금나라로 돌아가 군권 대권을 장악하였다. 황통 8년(1148), 김올술은 상경(上京) 회녕부(會寧府)에서 병으로 죽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1) 오환(烏桓, 烏丸), 한대(漢代) 역사서에 나타나는 북방민족이다. 선비(鮮卑)와 더불어 동호(東胡)라고 총칭된 것으로 미루어 몽골인종에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흥안령(興安嶺)에서 요하(遼河) 상류인 노합하(老哈河) 유역의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 하던 민족이다. 수렵 위주로 농경생활을 같이 했다. 한족과는 현재의 하북성 장가구(張家口) 근처에서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207년 조조(曹操)의 공격을 받고 부족연맹 조직은 해체되었다. 그 뒤 중국으로 이주하는 자가 속출해 북위(北魏)의 화북(華北) 통일 뒤에는 점차로 한족(漢族)에 융합되었다.

2) 서존재(徐存齋, 생졸 미상) 명(明) 왕조 대학사(大學士), 내각수보대신(內閣首輔大臣)이다. 20세 때 전시(殿試)에서 탐과(探花, 진사进士, 3등)에 급제해 일찍부터 관직에 나갔다.

3) 안연(颜回)은 공자(孔子)를 학문의 목표로 삼았는데 공자의 덕행을 배우는 데에는 탁월했지만 그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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