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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일에서 큰 ‘덕’, 혜택을 본다이권홍의 '중국, 중국인' ... 중국역사에서 보는 중국인의 처세술(43)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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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1.01.19  10:07: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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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臺灣) 총통 장개석(蔣介石, 1887~1975)이 세상을 뜬 그 해, 둘째아들 장위국(蔣緯國, 1916~1997)의 계급은 중장(中將)이었다. 중장에 앉은 지 14년이나 된 해였다. 국민당(國民黨)의 규정에 따르면 14년 동안 중장에 있다가 상장(上將)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강제로 퇴역하여야 했고 계급도 따라서 취소되어야 했다. 상장은 종신직이었다. 임시총통이 된 장남 장경국(蔣經國, 1901~1988)은 장위국을 승진시킬 생각이 없었다. 장위국은 방법을 생각해냈다.

부친 장개석의 장례식이 끝나고 모친 송미령(宋美齡, 1898~2003)이 미국으로 안거하러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떠나는 그 날, 장 씨 형제는 전송하러 나갔다. 장위국은 특별히 일찍 관저에 도착해 양복 입는 습관을 버리고, 군복으로 갈아입고 모든 훈장을 부착한 후 문을 들어서자마자 송미령에게 군례를 올렸다. 이전에 장개석 집안에서는 장개석, 송미령의 생일 때나 추석, 단오절, 중추절에 전 가족이 모여 축하할 때는 편한 복장을 하였다. 그렇기에 송미령은 장위국의 행동에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무슨 일이 있느냐고 물었다.

장위국은 엄숙하게 답했다.

“얼마 없어 군복 입을 자격을 상실할 것 같아서, 오늘 어머니를 전송하면서 마지막으로 특별히 어머니에게 제가 군복 입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송미령이 캐물었다. “왜?”

장위국은 군에서 강제 퇴역하는 제도를 간단하게 설명하였다.

송미령은 대륙에 있을 때 군대의 일을 물은 일이 없었다. 대만에 갔을 때도 캐묻지 않았다. 강제 퇴역하는 제도에 대해서 처음 듣는 말이었기에 다시 물었다.

“그럼 하경지(何敬之 : 應欽)는 왜 계속해서 군복을 입어?”

장위국이 말했다.

“상장이기 때문입니다. 종신제입니다.”

그제야 송미령이 이해하였다.

그때 장경국이 모습을 드러냈다. 장경국을 보자마자 장위국은 군례를 행했다. 장경국은 눈살 찌푸리며 말했다.

“집에서 뭐 하러 이래?”

장위국은 대답하기도 전에 송미령이 입을 열었다.

“위국이가 군인이 되는 게 아직도 가능하지?”

장경국은 앞에 무슨 문장이 있는지도 모른 채 무심결에 말했다.

“그는 본래가 군인입니다. 출중하게 해냈습니다.”

송미령이 물었다.

“출중하게 군 생활했다면서 어째서 퇴역 수속을 밟도록 신청해야 하는 거야?”

장경국은 그제야 집안일임을 알고는 어쩔 수 없이 말했다.

“위국이의 중장 기한이 됐습니다. 하지만 제가 곧장 상장으로 진급할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그렇게 해서 장위국은 결국 중장에서 상장으로 진급하였다.

   

장위국이 상장으로 진급한 것은 ‘덕’을 본 게 직접적이다. 출신성분이 그것이다. 다른 유형의 ‘덕’도 있다. 말재간, 군복 등이 그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의 ‘덕’을 보는 근원은 직접적으로만 보는 것은 아니다. 어떤 ‘덕’은 그렇게 명백하지는 않지만 위력이 있다. 그래서 간과할 수 없다. 다음이 몇 가지 사례를 보자.

첫째, 몇 대 조상의 ‘덕’을 빌 수도 있다. 중국인은 집안의 족보를 계속 이어가고 출신성분을 중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명인의 후예라 연관시키기를 좋아하고 명인의 후예를 존중하려한다. 유비(劉備)는 분명히 돗자리 짜고 짚신 팔면서 살던 행상인이다. 그런데 나중에 황족의 후예라 하며 황족과 연관시킨 후 황숙(皇叔)이라 존중받고 제갈량, 관우, 장비, 마초(馬超), 황충(黃忠), 조운(趙雲), 강유(姜維), 위연(魏延), 엄안(嚴顔), 왕평(王平), 곽준(霍峻) 등 문무 대신이 그 간판 아래에서 천하를 삼분하지 않았는가. 일반인에게 후손이 있는지 없는지는 개인과 가족 간의 일일 뿐이지만, 명사에게 후손이 없으면 국가의 유감으로 남게 된다.

불효에는 3가지가 있는데 가장 큰 것이 후손이 없는 것이다. 고인을 기념하는 것에는 세 가지가 있다. 살던 집, 묘지, 후예, 그중 후손이 가장 크다. 비록 후손이 그 선조의 공덕과 재능을 잇지는 못하지만 후세사람에게는 혈연의 근본이 전해온 것이 아무 소리도 없는 유물보다 더 옛날을 회고하게 만든다. 중국인은 명사의 후예를 존중한다. 그것이 그 근본인 명사를 존중하는 것이라 생각하기에 그렇다. 일종의 기념이요, 전하여 퍼지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렇지 않으면 어째서 진회(秦檜)의 후손을 찾지 않는단 말인가?

청 왕조 건륭(乾隆)연간에 진대사(秦大士)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악비(岳飛)의 묘를 지나다가 감탄하며 말했다.

“사람들은 송나라 이후에 이름에 회(檜)를 붙이기를 수치스러워하게 되었고 나는 묘 앞에서 성이 진(秦) 씨이라는 게 부끄럽소.”

이처럼 조상과 후손이 큰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명사의 후예는 더욱 관계가 깊다. 공덕이 높고 민족을 위하여 희생한 조상일수록 사람들은 그들의 후손을 존중한다. 그래야만 명사에게 감격하고 있음을 표현할 수 있고 살아있는 자의 유감을 속죄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러하다.

   

둘째, 남편은 이름난 처자에게 이익을 얻는다. 석모용(席慕蓉)의 남편 유해북(劉海北)은 『가유명처석모용(家有名妻席慕蓉)』이라는 문장을 썼다. 조롱하는 듯한 어조로 여자이면서도 명성이 자자한 처에게 무한의 경의와 애정을 표현하였다. 몇 구절을 인용해 그 뜻을 음미해보자.

“늘 일어나는 일을 내게 소개할 때 소개하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깊은 인상을 주기 위하여 내 이름, 직업, 학력, 심지어는 사주팔자까지 소개한 후에 한 마디를 붙인다. ‘바로 유명한 처의 남편이다.’ 나중에는 내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더라고 내 혼인상황은 분명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유명한 처를 둔 나에게 편리한 점은 아나도 없을까? 그렇지 않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상황인지 알 수 있다.

내 유명한 처의 독자들은 대부분 대학과 전문대학에서 공부하고 있거나 아니면 학교를 졸업해 사회에서, 사회 기본이 되는 곳에서 근무하는 청년들이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온가족이 여행을 가기로 돼있어, 유명한 처가 어떤 호텔에 전화를 걸어 방을 예약하였다. 예약 받는 아가씨가 마침 그때 휴가를 갔고 방도 모두 예약돼 있어 빈방이 없었다. 그런데도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고는 차순위 예약으로 남겨두었다. 유명한 처가 자신을 이름을 등록하자 상대방이 곧바로 말했다. ‘편할 실 때 오시면 됩니다. 우리가 반드시 방을 준비해 두겠습니다.’ 얼마나 흐뭇한 일인가.”

셋째, 자신의 본적이나 출생지를 활용하라. 북양정부는 전후로 7명의 총통이 나와 집권하였다. 그들 중 6명은 군인 출신이었으나 유일하게 서세창(徐世昌)은 통솔하는 병사가 한 명도 없었던 문인이다. 학자 출신인 그가 원세계(袁世凱)에게 빌붙는 등 기회를 틈타 인연 관계를 교묘히 이용해 상승일로를 걷다가 마침내 총통이라는 보좌에 앉았다.

서세창은 청 함풍(咸豐) 5년(1856) 9월에 하남(河南) 개봉(開封)에서 태어났다. 성내의 쌍룡항(雙龍巷)이 그의 출생지이며 어린 시절 생활하였던 지역이다. 그의 제1의 본적인 셈이다. 서 씨 족보를 고증한 결과 서세창의 조상은 명 왕조 말기에 절강(浙江) 은현(鄞縣)에서 거주했다고 한다. 그곳이 그의 두 번째 본적이다. 건륭(乾隆) 연간에 서 씨 집안은 북경 댕흥(大興)에서 천진(天津)으로 이주하였다. 서세창은 대흥은 자신의 제3의 본적이요 천진은 제4의 본적이라고 말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많은 본적이 있으면 번거롭다고 여기지만 서세창은 그렇지 않았다. 서세창은 그렇게 많은 본적을 이용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었다. 원세개와는 하남이 동향이라고 논했고 ; 풍국장(馮國璋), 조곤(曹錕) 등과는 직계의 동향이라 했으며 ; 전능훈(錢能訓), 손보기(孫寶琦) 등과는 절강 동향이라며 가까이 했다. 그렇게 사회에 발을 들여놓은 후 여러 방면에서 동향의 도움을 받았다.

   
▲ [원세개-서세창]

[인물 및 용어 소개]

○ 장개석(蔣介石) 가족

   

○ 서세창(徐世昌) : 1855~1939, 자는 복오(卜五), 호는 국인(菊人), 도재(弢齋), 동해(東海), 도재(濤齋), 천진(天津) 사람으로 정치인이다. 진사 출신이며 원세개(袁世凱)의 친구였다. 1918년 10월에 국회에서 대총통(大總統)에 선출되었다. 국학(國學)에 지대한 관심을 가져 스스로 저술활동을 했다. 서법과 문인화에도 조예가 깊었다. 문치총통(文治總統)으로 불렸다. 『청유학안(清儒學案)』, 『퇴경당집(退耕堂集)』, 『수죽촌인집(水竹村人集)』 등이 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원세계(袁世凱) : 1859~1916, 자는 위정(慰亭), 위정(慰廷), 호는 용암(容庵), 세심정주인(洗心亭主人), 하남(河南) 항성(項城) 사람으로 정치가이자 군사가, 북양군벌(北洋軍閥)의 지도자이다. 천진(天津) 소참(小站)에서 신군(新軍)을 창설하였다.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돼 1913년에 2차 혁명을 진압하고 중화민국 대총통에 당선되었다. 1914년에 나라 이름을 중화제국(中華帝國)으로 해 황제라 칭했다. 『원세개전집(袁世凱全集)』이 있다.

○ 전능훈(錢能訓) : 1869~1924, 절강성 가선(嘉善) 사람으로 중화민국 시기의 유명한 정치인이다. 어릴 적에 유교 교육을 받아 경예(經藝)에 능했다. 국무총리를 지냈다.

○ 손보기(孫寶琦) : 1867~1931, 자는 막한(幕韓), 만년의 서명은 맹진노인(孟晉老人), 절강 항주(杭州) 사람이다. 청나라 말기 민국 초기의 중신이며 외교관이다.

   

○ 북양정부(北洋政府) : 1912~1928, 중화민국 전기에 원세개(袁世凱)를 영수로 하는 만청(晚清) 북양군벌(北洋軍閥)이 정치적으로 주도적 지위에 있었던 중국 중앙정부를 가리킨다. 1913년 원세개가 중화민국 대총통에 정식으로 임명된 후 형성되었다. 북양정부 수뇌는 원세개 사후에 환계(皖系)[단파(段派)·안복파(安福派)라고도 한다. 1916년에 단기서(段棋瑞)를 중심으로 서수정(徐樹錚), 장경요(張敬堯) 등이 결성하였다], 직계(直系)[대부분 직예(直隸)성 출신이 지도하였다. 북양군벌이 분열돼 하북성 사람 풍국장(馮國璋)이 등장하면서 형성되었다. 주요 대표인물은 풍국장 이외에 조곤(曹錕), 오패부(吳佩孚), 제섭원(齊燮元), 손전방(孫傳芳) 등이다] 양 대파가 전후로 중앙정부를 장악하였고 제2차 직봉(直奉)전쟁 후 북양정부는 급속도로 세력을 넓힌 봉계(奉系)[북양군벌의 주요 일파 중 하나, 수령 장작림(張作霖)이 봉청(奉天)에서 출생했기에 봉계라 부른다] 장악하였다. 오래지 않아 대규모 중원대전과 10년 국공내전이 발발하였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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