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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 고향은 제주야 성산폰디"[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19)] 출가해녀의 노래
진관훈 박사  |  adel@jejut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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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30  10: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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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해녀 [사진=제주대박물관]

“말 ᄆᆞᆯ른 돈, 귀 막은 돈, 눈 어두근 돈이여”

말 모르는 돈, 귀 먹은 돈, 눈 어두운 돈. 해녀 물질은 무엇보다 돈을 벌기 위한 일이다. 야속하게도 돈은 말할 줄 몰라서인지 불러도 아무 대답 없고, 귀가 안 들리는지 오라 해도 모른 체한다. 그런가 하면, 눈이 어두워서 인지 찾아들 줄도 모른다. 이처럼 제주해녀들이 마음대로 돈이 ‘안 모여짐’을 한탄하던 제주 속담이다.

“물에 들 땐 지에집을 일뢈직이 가곡, 돌아올 땐 똥막살이 ᄑᆞᆯ암직이 온다”

물에 들 때에는 기와집을 이룰 듯이 기세 좋게 들어가고, 돌아올 때에는 오막살이라도 팔듯이 기운 없이 온다. 이처럼 의욕만큼 성과를 이루지 못함을 말해주는 제주 속담이다. 해녀들이 큰 전복이나 캘 의욕으로 물질에 뛰어 들지만 결과는 그보다 못할 때를 말한다.

“물천은 공것, 친정집보다 낫다”

해산물은 공것(공짜), 친정집보다 낫다. 해산물은 밭농사하고는 다르다. 밭농사는 씨 뿌리고 김매고 거름하고 상당히 투자해야 거둬들일 수 있지만, 해산물은 자기 혼자 노력만으로도 능히 채취할 수 있다. 친정집도 형편이 어려워 별 도움을 기대하기 어렵다. 제 힘으로 물질해 소득을 얻는 게 백번 낫다. 그래서 바다는 늘 고마운 곳이다.

출가(出稼)는 국내․외 다른 지역 바다에 가서 물질 작업하여 소득을 벌어들이는 경제 활동을 말한다. 이런 해녀의 출가 노동을 ’바깥물질‘이라고 한다. 출가 해녀들은 한반도 연안 곳곳과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동북아시아 일대 여러 지역에 가서 일정기간 물질 작업 하면서 느끼는 고독과 힘든 삶, 향수 등을 ‘출가 해녀의 노래’로 달랬다고 한다.

성산포야 잘이시라 멩(명)년 이 철 춘삼월 나민(면)
살아시민 상봉이여 죽어지민 영 이벨(별)이여
산지 바당의 베 띄여 노난 소섬(우도) 목이 보염구나
선장님이 손을 치난 고동 소리 빵빵 남져

성산 일출 ᄇᆞ려(버려) 두곡(고) 손안도로 가는 구나
완도 지방 넘어가근 신기 도영 넘어 가곡
금당아로 넘어가근 저 큰 바당 다 지나곡
지누리대섬 넘어가근 나라도도 건당ᄒᆞᆫ다
나라도를 넘어가곡 뽕돌바당 지난 본다

돌산을 넘어가근 솔치바당 건너 가민
남헤로다 노양목 사랑도바당 넘어간다
물파랑것도 지나가근 지제장심포 넘어가곡
가닥동끗 지나가민 등바당을 넘어간다
다대끗을 넘어가민 부산 영도이로구나

ᄌᆞᆫ등(허리) 알을 놈을 준덜(들) 요 네(노)야 상책 놈을 주카
베똥(배꼽) 알을 놈을 준덜 요 네착사(노야) 놈을 주랴
젓이라 젓이라 뒤엣 섬이랑 멀저(멀어) 지곡
앞읫 섬이랑 ᄇᆞ디여지라(가까와지라)(해녀 출가길의 뱃노래)

“허리 아래를 남에게 준다 한들 요 노(櫓)야 어찌 남을 줄 수 있겠는가.” 배꼽 아래를 남에게 내어 줄망정 요 노착만큼은 절대 남에게 내줄 수 없다.

한반도 연안에서 일본인 출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근거는 1883년에 7월 25일에 조인된 ‘조선국에 있어서의 일본인민무역규칙’ 제42조이다. 그러나 그 이전부터 일본인 잠수기업자의 밀어(密漁)가 있어 왔다. 특히 제주도 주변에 일본 잠수기업자(潛水器業者)가 일찍부터 출어해 오고 있었다. 일본인들이 제주 바다에 출어하면서부터 제주도민과 충돌하게 되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1884년 9월부터 1891년 11월에 걸쳐 제주도에 출어 금지 조치를 취하였다. 그러나 이 금어(禁漁) 기간 중에도 밀어가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제주도 어장이 급속히 황폐해 갔다.

전복은 연해안에 생산되지 않은 곳이 없고 거의 무진장(無盡藏)이라고 할 만큼 풍부하였으나 일찍 일본 잠수기업자(潛水器業者)의 도래로 남획(濫獲)이 된 결과 지금은 크게 감소하였다. 예전에 토착 잠수부들이 이를 채취해왔으나 지금에는 종일 조업해도 1~2개를 얻는 데 불과하다. 잠수기업자는 약간 깊은 곳에서 조업하기 때문에 다소의 어획이 가능하지만 예전과 같이 큰 이익을 얻기는 힘들다. 특히 본도산은 모양이 거대해서 유명하지만 오늘날에는 대체로 소형이 되었다(『한국수산지』3권, 1910).

이러한 어장 황폐는 제주해녀의 출가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즉 일본인 무역상의 등장으로 해산물의 경제적 가치가 상승하기 시작함에 따라 해녀들의 생산 욕구가 동반 상승한 상황이 되었다. 이처럼 제주 연안 황폐화로 새로운 생산지인 ‘바당밭’을 찾아 해녀들이 바깥물질 나가기 시작했다.

제주해녀 출가는 ‘생산 영역의 확장’을 의미한다. 제주해녀의 도외 이동인 출가는 1895년 부산 앞 영도에서 최초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후 해녀들은 한반도 전역과 일본의 태평양 연안지역, 대련, 청도까지 출어하였다. 1910년대 전반 출가자수는 2만5000명, 1910년 말 부산, 울산지역에 출가한 해녀의 수는 4000 정도였다

돈아 돈아 말 몰른(모르는) 돈아 돈의 전체긋 아니민
육로 천리 수로 천리 만리 강산 어디엥 오리
돈아 돈아 말몰른 돈아 귀 막은 돈아 눈 어둔 돈아
부르겅은(부르거든)에 돌아오라

요 벗들아 ᄒᆞᆫ디(같이) 가게 자 ᄀᆞᆺ디랑 내 몬저(먼저) 강
메역이랑 내 몬저 ᄒᆞ져(하게) 울산 강(가서) 돈 벌어당
가지 늦인 큰 접 사곡 멍에(밭머리) 느린 큰 밧 사곡
제미나게 살아 보게

진도바당 수지끈 물은 청룡 황룡 노는 듯 ᄒᆞᆫ다
청룡 황룡 아니 논물엔 용인 드끼 간 ᄀᆞᆯ라앚암서라(갈라앉다)

부산이라 정거장엔 앞으로 보민 오륙도여
뒤로 보민 소낭밧(소나무밭)이여 어느제민(때면) 저디나 가리
갈 딀 보난 멀어 지고 어느제나 저딜 가리

이야차 ᄒᆞᆫ저 가자 가민 가곡 말민 말쥐(지)
경상도로 씨집(시집)을 가랴
강원도 금강산 금인 중 알안에
우리 즤주(제주) 해녀덜(들)이 돌 끗마다 눈물졈저

1910년대 해녀 출가를 형태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객주(客主) 모집에 의한 방법이 있었다. 그들은 절영도(絶影島)에 정착하며 일본인 무역상 밑에 있으면서, 매년 음력 12월경 제주도 각지에서 해녀를 모집하여 전대금을 건네주고 계약한다. 해녀는 기선으로 가고, 뱃사공과 감독자 역(役) 남자는 어선으로 본토에 도항(渡航)하여 부산에서 합류한 후 출가지(出稼地)로 떠난다. 두 번째 형태는 독립 출가다. 해녀의 남편 2~3명이 공동으로 어선을 매입하여 가족, 친척 등의 해녀를 승선(乘船)시켜 출가지로 가는 방법이다. 전자와 후자의 비율은 6대 4정도로 객주 모집에 의한 경우가 많았다. 해녀 10명에 시중드는 남자 5명일 때, 1어기(漁期) 수입은 대략 870엔 정도이고 지출은 731엔 50전이었다. 차액은 138엔 50전이다. 이것을 균등 분할하면 1인 평균 9엔 23전 정도다(일제강점기 원과 엔(円)의 환율은 1:1).

해녀를 모집하는 조선인 객주(客主) 뒤에는 일본인 무역상(부산을 근거지로 하는 해조(海藻)상인)이 있었고 그들의 중간착취는 가혹했다. 이에 대항하여 제주도 해녀어업조합이 탄생하였다. 이는 비참한 상황에 대한 해녀 구제(救濟와 공동판매(객주의 중간착취를 배제하고 조합이 어획물을 수매해서 중매인을 경매한다든지 어시장에 판매를 위탁하는 제도)를 목적으로 하였다.

1924년 일본과의 직항로(直航路) 개설은 농촌 노동력 이동 증가 못지않게 해녀들의 일본 출가가 급증했다. 일반적으로 제주도 해녀는 기선에 의하여 출가한다. 기선(汽船)에 의한 일본 본토 출가는 쓰시마를 제외하고 모두 대판을 경유하였다. 당시 대판(오사카, 大阪)과 제주도와 특별한 관계에 있었다. 조선우선(朝鮮郵船) 니기기선(尼琦汽船), 녹아도상선(鹿兒島商船) 등이 경쟁적으로 여객을 실어 날랐다. 이 기선들은 도중에 모지, 시모노세키 등지에는 기항 하지 않으면서 가장 값싼 운임으로 도판(渡阪)시켜줬다. 그 다음 목적지까지 해녀들은 기선편이나 철도로 이동시켰다.

돈아 돈아 말 모른 돈아 돈의 전체굿 아니민
노국(露國) 두만강 어디라니 부량(富零) 청진(淸津) 어디라니 부량 청진 오란 보난
이 나그네 ᄂᆞᆯ래(놀러) 들어옵지기 제주 안간 ᄂᆞᆯ래 들어옵지기

우리나 고향은 제주야 성산폰디
오사까(大阪) 동성국(東成區) 십이번지에 사는 구나

바당 끗은 ᄀᆞᆷᄀᆞᆷᄒᆞ고(깜깜하고) 고향 산천 뒤에 두엉
지픈 바당 창창ᄒᆞᆫ ᄆᆞ르(마루) 설은(서러운) 낭군 냉겨 두엉
얼음 ᄀᆞ뜬(같은) 물살에다 무신 일로 이 모양인고

어린 애기 데여 두곡 늙은 부믜(부모) 떼여 두고
정든 낭군 떼여 두곡 돈 아니믄 나 무사 오리

돈아 돈아 말 모른 돈아 귀 막은 돈아 눈 어둑은 돈아
이처록 물질ᄒᆞ멍 ᄒᆞᆫ푼 두푼 버신(번) 돈은
무정ᄒᆞᆫ(한) 정든 님이 술도 먹엉 풍랠(낭비)래라
청로방(靑樓房)의 다 들어 간다

쌀 물은 나민 동의 와당 들 물은 나민 서의 와당
놀지 좋긴 목포 유달산 보긴 좋긴 강원도 금강산
살지 좋긴 공부자 냄펜(남편)네 몸 튼튼ᄒᆞ긴(하긴) 밧 가는 냄펜네

어느제나 나민두어 ᄒᆞᆫ ᄃᆞᆯ(한 달) 죽장(줄곧) 시백인 물질
철창ᄒᆞ영 어정 칠월 동동 팔월 돌아오민
풋짐 설렁(러) 내 고장 가리

* 시백=일을 정해진 날에 맞춤

“우리 고향은 제주 성산포지만, 지금은 오사까(大阪) 동성국(東成區) 12번지에 사는 구나.”

“어렵게 물질하며 한 푼 두 푼 모은 돈을 무정한 정든 님이 술 먹으며 낭비하네. 아까운 돈이 청로방(靑樓房)으로 다 들어간다.”

알려진 바로는, 최초로 김녕 사공 김병선이 해녀를 고용하여 동경 미야케지마 지역에 출가하여 조업하였다고 한다. 그 후 능력을 인정받아 1932년 현재 동경 미야케지마에서 240명 해녀가 고용되어 작업하였다. 이렇게 되자 점차 제주해녀 출가와 도내 잠수 활동으로 제주도 농가에서 이들이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졌다. 해안지역의 경우 해녀 경제 활동이 농가소득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한반도에 출가한 해녀 분포를 보면, 동해안 지역이 가장 조밀하며 북서부 해안지대가 그 다음, 남부해안지역, 북부해안지역 순서로 분포되어 있다. 아마도 해안지형 및 해저(海底)지형, 조류, 풍향 등의 영향을 받은 탓이다. 일본 출가 해녀 분포 현황을 보면 동해안 지역은 없고 태평양 연안에 편재(偏在)되어 있다.

   
▲ 제주해녀의 분포도.

토지가 척박하여 토지 생산성이 낮고 농가부업이 활발하지 않았던 제주에서 해녀노동이야말로 현금화 비율이 가장 높은 부업임에 틀림이 없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해녀들이 많았던 정의면 온평리의 경우, 해녀어업에서 얻어진 수입이 총수입의 절반에 이르고 있다. 게다가 생산물 전부가 판매되었기 때문에 현금화 비율이 높다. 따라서 당시 농촌에 필요한 현금 대부분이 여기에서 충당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제주해녀 출가물질과 도내 잠수 활동으로 얻어진 현금소득이 제주도 농가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점점 높아졌다.

요 바당의 요 물 속은 지픔(깊음) 야픔(얇음) 다 알건만
ᄒᆞᆫ 집 살앙 임의 속 몰란(몰라) 간장 카는(타는) 내(냄새)로구나

어서 오랭(라) 눈을 친다 어서 오랭(오라고) 손을 친다
눈치는 듼 야밤의 가곡(고) 손치는 듼 헤낮(대낮)의 간다
놀지나 좋긴 살장구 복판 밥 먹지 좋긴 부산 여관
밤자리 좋긴 큰 아기 복판 큰 아기 얼골(굴)은 붉어사 좋곡
칠팔월 복성귄 벗어사(벗어야) 좋곡

군대환은 갈랴고 휑고동 트는디
정든님 홀복 잡안 낙루(눈물)만 ᄒᆞ염구나(흘리는 구나)
군대환 떠나믄(면) 연기만 남쥬만(남지만)
임 떠난 방안엔 사진만 남암져(남는다)

   

열 두 살 뒈연(되어)에 술 장시(수) ᄒᆞ난에
풍펜(평판)에 나기는 기생이라 ᄒᆞ는디(하는데)
이내야 ᄆᆞ심(마음)속 벤ᄒᆞ지(변하지) 아니ᄒᆞᆫ디
갈보라 ᄒᆞᆫ 것은 종ᄌᆞ(종자)가 이싱가(있는가)
팔ᄌᆞ(자)가 구박ᄒᆞ믄(하면) 갈보가 뒈는 걸

대천바당 눗 소리는 산지축항만 울리는디
공동묘지 가신 부모 말소린 산에 산천만 울렴구나
일본 동경 가신 님은 돈만 벌레(벌러) 갓건마는
공동묘지 가신 님은 즤ᄉᆞ(제사) 때만 돌아온다

밥을 먹당(다) 남은 것은 개 도새기(돼지) 줘 버리곡
옷을 입당 남은 것은 내불어(놔두면) 두(되)건마는
본 가장(家長) 실픈(싫은) 것은 백년이 원수로구나

보리떡 ᄀᆞ뜬(같은) 년은 일부 종ᄉᆞ(사)를 ᄒᆞ는디
공산(空山)멩월(明月) 날 ᄀᆞ뜬(나 같은) 년은 일부 종ᄉᆞ도 못ᄒᆞ곡
헤천(대낮)영업이 무신(무슨) 일고 헤천영업 내온 놈아 천년만년 원수여

“열 두 살 되어 술장사 하니 소문나길 기생이라 하는데 이내 마음속은 변하지 안했는데, 갈보라 하는 것이 원래부터 종자(種子)가 있는가, 팔자가 안 좋으면 갈보가 되는 걸”

“밥 먹다 남으면 개나 돼지 줘 버리고, 옷을 입다 남은 건 놔두면 되지만 본 가장(家長) 싫으면 버리지도 못한 채 백 년 동안 원수로구나”

제주해녀가 육지나 타 지역으로 출가하려면 관계 당국 허가를 받고 출가증(出嫁證)을 얻어야 했다(이는 도민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위해 1인당 3원씩을 납부했다. 1937년 제주도세요람(濟州島勢要覽)에 의하면, 일본으로의 출가해녀는 1,601명이다. 지역별로는 대마도(對馬島) 700명, 정강(靜崗) 265명, 동경(東京) 215명, 고지(高知) 135명, 장기(長崎) 65명, 녹아도(鹿兒島) 55명, 천엽(千葉) 51명, 덕도(德島) 10명, 도근(島根) 10명 등이다. 이들 중에는 출가 후 당지(當地)에 정착하는 경우도 있다.

이외 블라디보스톡에 물질 갔고 칭다오(靑島)에도 80여명 제주해녀가 물질 갔었다. 이들은 5월에 칭다오로 가서 8월 추석 전에 고향에 돌아왔다. 평균 300원 정도의 수입 올렸다고 한다(당시 소학교 교사 봉급 40원).

 
▲ 진관훈 박사

1929년 당시 제주 도내 해녀 7,300명이 도내 연안에서 채취 활동으로 약 25만원을 벌어들인 데 비해, 일본에 출가물질 갔던 해녀 3,500명이 40만원을 고향에 송금(送金)했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으로 출가한 제주 해녀들의 소득이 매우 높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출가물질 노래를 듣다보면, 제주해녀들의 이런 노고와 성과를 이무도 아무도 안 알아주며, 심지어 무시한다며 신세 한탄하는 내용이 많다. 제주해녀 출가물질에 대한 자부심이나 성취감에 대한 언급은 거의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출가해녀의 소득이 당시 제주경제에 미친 물질적 기여와 현재까지 내려오는 제주해녀의 여성성에 대한 순기능을 고려했을 때 납득하기 어렵다. 향후 이 부분에 대해 대중적 관점을 가지고 더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제주해녀의 ‘역사성’과 ‘제주 근대경제에의 기여도’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마련이 시급하다고 본다.

<참고문헌>

고재환(2001),『제주속담총론』, 민속원.
김영돈 외(1996),『제주의 해녀』, 제주도.
김영돈(2002),『제주도 민요 연구』, 민속원.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
cid=210402&mid=RC00007231&menuName=구술(음성)>민요
좌혜경 외(2015),『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田口禎熹(1933), “제주도의 해녀”,『조선』218호.
藤永壯(1997), “1932년 제주도 해녀의 투쟁”,『제주도의 옛 기록』, 제주시우당서관.
제주도청(1939),『제주도세요람』.
대한제국농상공부수산국 편(1910),『한국수산지 3권』.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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