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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나 불엉 담배나 먹자[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16)] 디딤불미노래
진관훈 박사  |  adel@jejutp.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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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10.08  17:4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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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전래 농기구는 농경 과정에 따라 파종구(播種具), 육성구(育成具), 수확구(收穫具), 운반구(運搬具), 탈곡구(脫穀具), 도정구(搗精具), 저장구(貯藏具) 및 기타로 분류한다. 철재 농기구는 파종구나 육성구가 많다. 제주 지역 토양은 자갈이 많고 토심(土深)이 얕다. 그래서 ‘보섭(보습)’이 넓으면 잘 긁어지지 않으므로 제주 농기구는 대체로 뾰족하다. 이처럼 제주에서는 농토를 갈고 경작하는 데 효율적인 농기구로 뾰족하고 가는 연장이 발달하였다. 소를 이용하는 쟁기 역시 보습과 볏이 작아 돌이 많은 땅을 일구기에 적합하도록 만들어졌다.

김매고 작물 솎아 주는 육성 농기구로 ‘ᄀᆞᆯ갱이’ 가 있다. ᄀᆞᆯ갱이는 자갈밭용과 점토질인 질왓용 두 종류가 있다. 자갈밭용은 끝이 가느다란 모양으로 돌 틈의 풀 뽑기에 편리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곡식이나 풀을 베고 나무를 치는 데 사용하였던 낫이 있다. 이를 제주에서는 ‘호미’라 부른다.

이와 함께 개간 용구로 코끼리 이빨형의 쌍따비와 주걱형의 웨(외)따비, 뾰족형의 벤줄레가 있다. 따비는 주로 황무지를 개간할 때 사용하던 농기구다. 자갈 함량이 많은 한림, 애월 지역에서는 ‘웨따비’, 화산회토 뜬 땅인 구좌, 성읍지역은 ‘쌍따비‘를 이용했다. 벤줄레는 땅을 일굴 때 땅 속에 묻혀 있는 돌을 캘 때 주로 사용된다. 장지에서 산담에 쓰일 돌을 캘 때도 쓰인다. 이 외 도치(도끼), 목괭이, 섭괭이, 쟁기의 보섭(보습)등이 있다. 도치는 나무를 찍어 베거나 쪼개는데 사용했다(네이버 지식백과,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불미(풀무)나 불엉 담배나 먹자
아-하에헤요 떳다 떳다 홍애산이 떳다
요 불미는 웬 불미요 이 불미랑 불어보소
서른 여덟 닛바디가 허우덩싹 떳다 떳다 홍애산이 떳다

엿날 엿적(옛적) 조상님네 요 일 ᄒᆞ멍(하며) 살았던가
요 일 안해도 살건마는 힘을 내영(내어) 불어보소
요 놀레(노래) 들엉(들어) 좀(잠)을 깨소 어야차 두야차 상사랑이로다

* 허우덩싹=입을 벌려서 웃는 모습. 늿바디=잇바디=이가 죽 박힌 열(列)의 생김새

육지와의 교역과 왕래가 쉽지 않았던 옛 제주에선 달군 쇠를 두들겨 만든 간단한 농기구로 오랫동안 힘들게 땅을 일궈왔다. 녹인 쇳물로 쟁기를 만드는 불미공예는 약 300년 전 도입되었다고 추정된다(제주일보, 2014.10.06.).

제주일보 좌동철기자의 조사에 의하면, “불미공예는 송세만(1699~1791)에 의해 한경면 조수리에서 덕수리로 전래됐다. 그는 도내 일원을 답사한 결과, 거푸집과 용광로를 만드는데 적합한 점토가 덕수리에 가장 많은 것을 알아냈다. 모래와 진흙이 골고루 섞인 덕수리의 ‘참흙’은 열을 가할수록 더욱 단단하지는 특성이 있다.”

이처럼 제주에서 불미공예는 솥, 보습, 볏 등을 주조하는데 필요한 ‘뎅이’와 ‘둑’을 만들 수 있는 점흙이 나오는 덕천리, 낙천리, 덕수리 등지에서 전승되어 왔다. 제주도는 예로부터 본토와의 교역이 불편했기 때문에 생활필수품이나 농기구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해 왔다. 덕수리 불미공예가 대표적이다. 덕수리는 쟁기에 쓰이는 보습과 무쇠솥 등 농기구와 생활용구를 만들어 제주도 전역에 유통시켰다.

덕수리가 지금까지 불미공예의 고장으로 명맥을 유지하게 된 이유는 덕수리 토질이 불미공예와 가장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 지역은 흙의 입자가 가늘어서 덕수리 진흙과 1200℃ 쇳물이 만나 최상의 주물 작업이 가능했다. 예전에는 여기에서 만들어진 무쇠솥이나 보섭이나 볏 등을 가지고 제주전역을 돌아다니며 팔았다. 혹은 덕수리로 농기구를 사러오기도 했다고 한다.

제주에서는 불미를 ‘불마당질’이라고 했다. 불미는 점토와 보리까끄라기(보리수염)를 반죽해 틀을 만들어 3일간 바싹 말린 후 1000~1200도 가마에서 5시간 구워내 거푸집을 만든다. 이어 숯을 피우고 바람을 불어넣어 용광로 온도를 1500도까지 올리면 주철(무쇠)이 녹아 쇳물이 나오게 된다. 벌건 쇳물을 거푸집에 집어넣으면 비로소 무쇠솥이 나온다. 쇳물이 골고루 들어가지 않으면 솥뚜껑에 구멍이 나기 십상이어서 강도 높은 노동력과 정신집중이 필요한 작업이다(제주일보, 2014.10.06.).

낮에는 낭고지 가고 밤이 되면 요 솟(솥) 불 솜앙(때어)
독 안 앞으로 내리는 물은 무쉐(무쇠) 녹은 냇물이요
젯대장이 저 걸음보소 꼬박 꼬박 졸지 말앙 요 놀레 들엉 좀(잠)을 깨소
여든 여덟 늿바디가 허우덩싹 대자 오치 불미 놀레
석자 오치 화시겟대 자 두치 양짓머리
석자 오치 양짓무클(보섭) 어깨소리 울어 가면
새벽 ᄃᆞᆯ(달)이 떠오른다 불로 익은 요 내몸이
날이 샌들 지칠소냐 여야차 두야차 상사랑이로다
꼬박꼬박 졸지 말앙 목소리도 잘도 좋다
떳구나 떳구나 홍애산이 떳다
잘 뒈면(되면)은 ᄉᆞ망(소망, 다행)이여 아니 뒈면은 헛수고여
댕이(뎅이)보라 어떵 뒈염시니(어떻게 되고 있느냐)(디딤불미노래)

* 낭고지가고=낮에는 나무하러 산에 가고. 요솟불솜앙=가마솥에 불을 때어. 젯대장=둑에서 녹인 쇳물을 뽑아다가 불미 마당 가득 즐비하게 늘어놓은 여러 댕이에 붓는 사람. 양지(양주)머리=쟁기(따비)의 손잡이, 내륙 지방과 달리 양손을 이용함. 그리고 소의 방향을 가름하는 가린석으로 좌우 방향을 조종하도록 하였음. 댕이(뎅이)=미리 만들어 놓은 ‘뎅이’에 무쇠 녹인 쇳물을 부어넣음. 벤줄래는 전체적으로 T자형이며 무클(몽클)과 양주(짓)머리, 발받침 등으로 구성됨.

제주의 불미공예는 괭이갈이에 알맞은 ‘똑딱불미’ 형태의 불미공예가 가내수공업 형태로 곳곳에서 전승되어 왔다. 쟁기갈이에 알맞은 보습이나 볏을 주조하기 위한 고도의 풀무 형태인 ‘토불미’나 ‘창탁불미’는 훨씬 뒤에 이루어졌다. 풀무질이 잘 되어야만 쇳물의 질이 좋고 제품이 잘 만들어지기 때문에 불미 공예라는 명칭이 붙여졌다.

제주도 불미공예는 손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켜 쇠를 녹이거나 달구는 손풀무와 땅바닥에 골을 파서 중간에 굴대를 박고 그 위에 널빤지를 걸쳐놓아 한쪽에 세 사람씩 서서 널빤지를 널뛰기하듯 디뎌가며 바람을 일으키는 골풀무가 있다. 손풀무는 다시 똑딱불미와 토불미로 구분한다. 똑딱불미에서는 달군 쇠를 두들겨 주로 칼이나 호미 등을 만든다. 토불미에서는 둑(용광로)에서 녹인 쇳물을 미리 만들어진 주물틀에 부어넣어 주로 솥, 볏, 쟁기날 등을 만든다. 골풀무를 청탁불미(또는 디딤불미, 발판불미)라 하는데 그 규모와 만들어지는 제품은 토불미와 같고 바람을 일으키는 방법이 다르다.

불미공예로 만들어지는 철제품은 그 제작과정에서 두 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주로 솥, 보습, 볏 등을 만들기 위해 미리 만들어 놓은 ‘뎅이’에 무쇠를 녹인 쇳물을 부어넣는 방법이다. 다른 하나는 달궈낸 쇠에 매질을 가하여 칼, 호미, 낫, 괭이 등을 만드는 방법이다.

전자의 방법은 거의 ‘청탁불미’와 ‘토불미’에서 후자는 주로 똑딱불미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보습만은 전자의 방법으로 ‘똑딱불미’에서도 주조되었다. 이때는 물론 몇 안 되는 보습을 불미공예는 주철(무쇠)로 솥과 쟁기 날을 제작하는 공예기술이다.

똑딱불미노래는 무쇠를 불에 달구기 위해 혼자 바람을 내어 불을 지피면서 부르는 노래이다. 가사 내용은 어려서 부모를 잃고 올 데 갈 데 없어 불미작업을 배웠다는 서러운 일생이 서사적으로 전개된다.

“한 살 적에 아버님 죽고 두 살적에 어머님 죽어 세 살적에 할아버님 죽고 네 살적엔 할머님 죽어 오갈 데 없어서 불미질이나 배웠습니다.”

사연이 기구한 삶에 대한 신세 한탄과 더불어 이를 해학적으로 처리하는 서민들의 의식을 엿볼 수 있는 노래다. 인생은 내리막길에서 훨씬 성숙해진다. 이 노래는 대정 기생 3명이 불미 작업하는 곳에 와서 노래를 불리기도 하고, 춤을 추면서 일하던 일군들에게 흥을 돋우었다고 한다.

ᄒᆞᆫ(한) ᄉᆞᆯ(살)적에 아버님 죽언 두 ᄉᆞᆯ(살)적에 어머님 죽언
푸르륵 탁탁 푸르륵 탁탁
세 ᄉᆞᆯ적엔 할아버님 죽언 네 ᄉᆞᆯ적엔 할머님 죽언
올 디 갈 디 엇언보난(오갈 데 없어서) 불미질이나 배왓수다(배웠습니다)

늦엇슬적(늦어슬쩍) 쉐(쇠)만 골란 양단 어깨 수문장 뒈언(되언)
봉애(무태장어) 눈을 부릅뜨고 삼각쉐를 오므리고
늦어 슬쩍 쉐만 골랑 느직나직 걸쳐 놓앙
석자 오치 불미널에 두자 오치 사지게에
불미 불엉 조배낭긔(나무) 유년목을 벌려지카
일월송송 ᄒᆞᆫ(한)밤중에 밤중 새별 완연 ᄒᆞ(하)다

덕수리의 골풀무는 땅바닥에 장방형으로 골을 파서 중간에 굴대를 박고 그 위에 골에 맞는 널빤지를 걸쳐 놓아 한쪽에 세 사람씩 혹은 6인 1조가 되어 널빤지의 두 끝을 널뛰기 하듯 디뎌가며 바람을 일으키는 방법이다.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고 뜨거운 쇳물을 붓는 불미는 위험한 작업이라 철저히 분업화 됐다. 작업에는 20여 명의 일꾼이 참여했다. 불미마당 주인인 원대장, 일을 총괄하는 알대장, 황토로 솥 틀을 만드는 바슴대장, 용광로에서 쇠를 녹이는 둑대장, 쇳물을 받아다가 구멍에 넣는 젯대장, 보섭(쟁기) 틀을 만드는 질먹대장, 허드렛일을 하는 일꾼 등 역할이 세분화됐다. 덕수리 불미 공예 구성 인원은 원대장 1명, 알대장 1명, 젯대장 3명, 둑대장 1명, 질먹대장 1명, 불미대장 6명, 일꾼 4명 등 24명 정도다.

저 동방에 ᄉᆞᆯ(살)펴보난(니) 동산새별 둥글둥글
남방국에 ᄉᆞᆯ펴보난 북두칠성 국자로다

침밧놀이 불미놀레(노래) 우리 동창 벗님 약골
오롬(오름) 골라 ᄂᆞ리는(내리는) 물에 골데 설쉐 썩은 물이여
독안 앞에 ᄂᆞ리는 물은 무쉐 녹은 쉣물이여

요 내 위로 ᄂᆞ리는 물은 오장육부 ᄌᆞᆽ은(잦은) 물이여
올 디 갈 디(오갈데) 엇어부난(없어서) 불미질이나 배왓수다(똑딱불미노래)

덕수리 디딤불미 시작은 1945년 전후 이루어졌다. 당시 홍기화의 외삼촌 송영호는 부산에 가서 디딤불미 장비를 사왔으나 일제의 철공출로 불미작업을 할 수 없었다. 해방이 되자 마을 이장 등이 덕수리 마을을 위해서는 이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기고 장비를 사다 불미작업을 부흥시켰다고 한다.

한편 우리나라를 일본의 식량조달기지로 삼으려던 일제는 그들의 목적달성을 위하여 일본 농기구 보급에 큰 관심을 기울였다. 1928년 제주도내 철물상은 3개소다. 이곳에서 연간 6100원 매상을 올렸다. 해방 후 9개소 농기구 공장이 있었고 이곳에서 평균 2만개 농기구를 생산했다.

덕수리의 옛 명칭은 ‘새당’이다. 과거에 ‘새당솥’ 또는 ‘새당보섭’이라면 제주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했다. 그래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예전 아버지가 덕수국민학교 근무 때 2년 정도 거기서 살았다. 그때 일화 하나, 기억은 안 나지만 수백 번 정도 들은 얘기다. 아직 걷지 못하고 기어 다니던 어릴 때다. 전해들은 바에 의하면, 어느 날 물애기였던 내가 마당에서 여물을 먹고 있던 소 강알(사타구니) 밑에 앉아 소들과 함께 말린 무 껍질, 썩은 고구마 등을 먹고 있었다. 아마 어머닌 다른 볼일을 보고 있었을 거고 누나 역시 아주 어렸을 때라 어린 동생을 제지하지 못했던 거 같다. 그 걸 주인집 아주머니(당시 교장선생님 사모님)가 발견했는데, 처음엔 너무 놀라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런데 그 상황이 편안해 보였다고 한다. 어린 애기나 소나 송아지 모두. 갑자기 소리치면 소가 놀라 내가 다칠 가 겁나 그 사모님은 조용히 어머닐 불렸고 급히 온 어머닌 그 장면을 본 순간 기절하셨다. 그래도 그 사모님은 침착하게, 소가 놀라지 않도록 조심스레 애기에게 다가가 이름을 부르며 이리 오라 했더니, 내가 먹던 무 껍질을 양손에 쥔 채 엉금엉금 기어 나오더란다. 그 사모님과 교장선생님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버지나 어머니를 만나면 꼭 내 안부를 묻고 용돈을 전해 주셨다. 그분들은 내가 아주 먹성이 좋고 음식을 탐한다고 생각하신 건 아니신지 조금 궁금하다. 지금은 모르겠지만 예전 덕수리는 이씨와 김씨가 많았다. 그 교장선생님은 그 근방(사계나 모슬포까지) 이씨 집안 종손이었으며 당시 남군 교육계에서 가장 존경받으시던 분이다.

 
▲ 진관훈 박사

한창 때 이곳엔 불미마당이 16곳 있었다. 육지 상인들은 사계포구에 배를 대고 직접 사갈 정도로 내구성과 품질이 우수했다. 그러나 1945년 전후로 기계의 힘으로 바람을 일으키게 되면서 더 이상 설 자리를 잃게 됐다. 불미공예는 1986년 4월 제주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었다. 초기 ‘송영화’ 옹이 보유자였다. 2008년 3월 4일 그가 별세하자 현재 윤문수가 맡고 있다. 덕수리 불미 공예 전수자들은 해마다 10월에 서귀포시 안덕면 덕수리 제주 조각공원에서 ‘불미질’을 재현하고 있다.

<참고문헌>

김동섭(2004),『제주도전래농기구』, 민속원.
김영돈(2002),『제주도 민요 연구』, 민속원.
제주일보, 2014년 10월 6일 기사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
id=210402&mid=RC00089858&menuName=구술(음성)>민요
좌혜경 외(2015),『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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