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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전쟁, 나의 전쟁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1917 (6)
김상회 정치학 박사  |  sahngwhekim535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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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20.09.18  10:3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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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린모어 장군은 영국군 전방부대에 긴급 명령을 전달할 ‘요원’으로 스코필드 하사와 블레이크 일병을 지목한다. 그가 다소 ‘얼빵’해 보이는 블레이크 일병을 뽑은 이유는 단 하나, 그의 형이 전방부대에 있어서다. 블레이크 일병에게 임무 완수는 사랑하는 형을 구하는 일인 셈이다. 이보다 더 확실한 ‘동기부여’는 없다. 국가든 회사든 그들이 나와 가족을 지켜줄 수 있을 때 헌신할 뿐이다.

   
▲ 모든 전쟁은 나라 간의 전쟁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개인 간의 전쟁’이다. [일러스트=게티이미지뱅크]

1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서부전선에서 에린모어 장군은 영국군 전방부대에 총공격계획 중지를 긴급히 전달하기 위해 수많은 격전을 헤치고 살아남은 스코필드 하사를 선택한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병사, 블레이크 일병을 스코필드 하사에게 붙여준다. 현명하다면 현명하고, 간교하다면 간교한 인선이다. 블레이크 일병이 선택된 이유는 단 한가지다. 그가 유난히 애국심이나 책임감이 강해서도 아니고, 일당백의 전투력이나 기민성을 갖춰서도 아니다. 단지 그의 친형이 최전방 부대의 지휘관이기 때문이다.

블레이크 일병의 입장에서는 ‘임무’의 완수가 곧 사랑하는 형의 목숨을 구하는 일이다. 자신이 임무완수에 실패하면 그것은 곧 형의 죽음을 의미한다. 제아무리 흐리멍덩한 병사라도 이런 상황이 되면 눈에 불을 켜고 ‘슈퍼 솔저’가 될 수밖에 없다. 블레이크 일병은 나라를 구하거나 파시즘을 격퇴하거나 1600명의 영국병사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형을 구하기 위해 목숨 걸고 적진을 돌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난 집에 자신의 갓난아이가 있으면 아이 엄마는 중무장한 소방대원 10명도 감히 접근 못할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아이를 구해오는 ‘원더우먼’이 된다. 조금은 ‘얼빵’해 보이는 블레이크 일병에게 굳이 중차대한 임무를 맡긴 건 영악한 에린모어 장군의 노림수인 셈이다. 임무에 대한 이보다 더 확실한 동기부여가 또 있을까. 블레이크 일병은 불타는 애국애족의 군인정신이 아니라 자신의 형을 구해야 한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절박함으로 적진을 돌파한다.

   
▲ 스코필드 하사의 임무는 죽은 블레이크 일병 대신 그의 형을 구하는 일이다. [사진=더스쿠프 포토]

그렇게 전방부대를 향해 가던 블레이크 일병은 추락한 독일 전투기의 조종사를 도와주다가 오히려 독일군 조종사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다. 참으로 허망하다. 죽어가는 블레이크 일병은 스코필드 하사에게 자신의 형을 꼭 만나서 자신의 이야기를 전해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자신을 대신해서 형을 구해달라는 유언이다.

그 순간부터 스코필드 하사의 ‘임무’는 블레이크 일병을 대신해 블레이크 일병의 형을 구하는 일이 된다. 그때까지만 해도 심드렁해서 마지못해 적진을 돌파하던 스코필드 하사는 절실해진다. 역시 개인적인 동기가 대의명분을 압도한다.

영화가 담고 있는 1차 세계대전을 포함해서 모든 전쟁은 나라 간의 전쟁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모두 ‘개인 간의 전쟁’이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발생하고 1년이 채 안 돼 조선 각지에서 2만3000여명의 ‘의병’들이 규합했다. 당시 ‘관군’이 10만여명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규모다. 또한 무기도 신통치 못한 ‘의병’들의 전투력이 정규군인 관군을 뛰어넘는 ‘미스터리’를 남긴다. 이 ‘미스터리’를 푸는 열쇠는 의외로 간단하다. 의병들은 모두 ‘향토군’이다. 

왜군에게 전선이 뚫리는 순간 곧바로 ‘나의 가문, 나의 부모, 나의 처자식’이 왜군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노예로 끌려가거나 능욕을 당한다. 그들은 허구한 날 당파 싸움질이나 하고 세금이나 쥐어짜는 임금의 종묘사직이나 양반네들의 조정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것이 아니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과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모든 것을 버렸을 뿐이다.

   
▲ 애국심에는 ‘나라가 자신과 가족을 지켜줄 수 있을 때’라는 조건이 따른다. [사진=연합뉴스]

미국 후버연구소 역사학자 빅터 데이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은 그의 명저 「살육과 문명(Carnage and Culture)」에서 100만 페르시아 대군을 10만의 그리스 군대가 물리친 ‘비밀’을 밝힌다. 페르시아 군대는 모두 황제의 노예들이었지만 그리스 군은 자유민들이었다. 페

르시아 군인들은 이겨도 계속 노예로 남고, 진다 한들 또다른 주인의 노예가 될 뿐이다. 목숨 걸고 싸울 이유가 없다. 반면 그리스 군인들은 전쟁에서 패하면 자유민인 가족들이 모두 페르시아의 노예가 된다. 자신의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할 것이 있다. 이들이 치른 전쟁 역시 모두 ‘나라의 전쟁’이 아닌 ‘나의 전쟁’이었을 뿐이다.

국가와 회사는 구성원에게 항상 ‘애국심’과 ‘애사심’을 요구한다. 그러나 구성원들이 진정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것은 ‘가족’일 뿐이다. 자신이 속한 국가나 회사가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지켜줄 수 있을 때 그들은 국가와 회사를 위해 헌신할 뿐이다.

가족을 지킬 수 있다면 국가의 기밀이든 회사의 기밀이든 마구잡이로 팔아넘기는 뉴스가 간혹 들린다. 존 F. 케네디의 명연설이라고 배운 ‘국가가 나를 위해 무엇을 해 줄 것인가를 생각하기 전에, 내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지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이 무척이나 공허하게 들리는 오늘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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