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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9)] 망건노래

 

갓 사러 갔다가 망건 산다. 갓 사러 갔는데 갓이 없어 대신 망건을 샀거나, 아니면 가는 도중 마음이 바뀌어 갓 대신 망건 샀거나, 뭘 사러 갔는지 깜박하고 비슷한 거 샀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주머니 사정에 맞춰 망건 샀거나. 나이, 성별, 지역에 따라 다르겠다.

 

조선시대 선비들은 잠잘 때 제외하고 일상생활에서 늘 망건을 착용했다. 잠자리 들 때서야 상투 풀고 망건 벗어 두었다가 아침에 세수 한 후 다시 동여맸다. 이처럼 몸 가까이 두는 망건을 귀하게 여겼다. 사용하지 않을 땐 둘둘 말아 망건통에 넣어 보관하였다. 망건통 역시 소중하게 여겨 최대한 좋은 재료로 제작하였다. 이때 신분이 높고 낮음이나 부(富)의 정도에 따라 망건통을 나무로 만들거나 그 위에 상어껍질을 비롯한 고급재료로 장식했다(한국민속대백과사전).

 

망건과 탕건은 조선시대 선비들이 착용하던 관모(冠帽)이다. 그 당시 관모공예품 대부분은 제주여성들의 손기술과 땀으로 만들어졌다. 망건은 갓 쓰기 위해 상투 틀 때 머리털을 위로 걷어 올리려고 이마에 두르는 띠를 말한다. 처음 명주실을 엮어 만들었으나 나중에 말총(馬尾)을 곱게 엮거나 곱소리(코끼리 꼬리털)이나 머리카락으로 만들었다. 보통 말총을 직사각형으로 엮어 만든다.

 

망건 짜는 작업은 제주시 동쪽 지역인 함덕, 조천 등지에서 많이 이루어졌다. 때문에 망건을 짜며 부르던 민요는 함덕, 조천, 신촌, 와흘, 북촌 등 조천읍 지역에서 주로 전승되고 있다. 이 민요는 다른 노동요와 달리 창(唱)민요적인 흥겨움을 가지고 있다. 망건노래는 말총을 이용하여 망건 결으면서 부르는 노래로 여성들의 섬세한 정서가 잘 표출되고 있다. 5일에 한 번, 한 달이면 여섯 번(육장), 오일장이 서는 날마다(시백) 그동안 결은 망건을 내다 팔아 집도 사고 옷도 사고 식량을 샀다.

 

“갈매기 물 먹어 가듯 갈맥갈맥 걸려나 져라/미역일랑 잎 넓어 가듯 미적미적 잎 넓어 가듯/한 달 육장(市場)때 정한 망건 모레 장에 장보러 가자/어느 굽이 내 아니 울리 어느 마디 내 아니 울리/젊은 부모 명 짧은 몸에 내야 아니 낳았다면 할 걸/요 망건아 내 망건아 한 간에는 집 믿는 망간/정의 좁쌀 내 믿는 망건/일천 시름 내 믿는 망건/요 망건아 결어나지라 한 달 육 장 때 정한 망건/장 또 장에 때 정한 망건/저 산으로 가니 더욱 높은 당산(堂山)메더라/콩, 팥에도 눈이나 있다 눈 없는 건 좀머귀나무더라”

 

고마기(갈매기)랑 물 먹어 가듯 골막골막 걸려나 지라
메역(미역)이랑 입 넘어 가듯 혼 돌 육장(여섯장) 시백인 맹긴(망건)
모리 장에 장(오일장) 보레 가게

 

어느 곱이(굽이) 나 아니 울리 어느 모디(마디) 나 아니 울리
설룬 부뮈(부모) 멩(수명) 쪼른(짧은)몸에 내사 아니 낳데민 호컬(할걸)

 

요 망긴(망건)아 나 망긴아 혼 간에는 옷 믿은 망긴
정의(㫌義)좁쏠(좁쌀) 나 믿은 망긴 함덕(咸德)집석 나 믿은 망긴
일천 시름 나 믿은 망긴

 

요 맹긴아 몿아나(결어나) 지라 혼 돌(달) 육 장 시백인 맹긴
장 또 장의 시백(때 정한)인 맹긴

 

이 메(산) 노판(높아) 저 메로 가난 더구 노픈(높은) 당산(堂山)메라라
콩 폿(팥)에도 눈이나 싯나(있나) 눈 웃인(없인)건 논둑(좀머귀나무)이어라

 

* 시백(시벡)=일을 정해진 날짜에 맞추어 맞물리다.

 

망건은 갓을 쓸 때 머리털이 흐트러지지 않도록 이마로부터 뒷머리 쪽으로 둘러치는 띠다. 너비 7cm 쯤 되는 너부죽한 머리띠 모양이다. 이마와 머리 뒤로 두르고 끄나풀로 졸라맸다. 우선 망건을 두르고 나서 탕건과 갓을 쓴다. 따라서 망건은 관모라기보다 머리장식의 하나로 볼 수 있다(제주특별자치도, 멀티미디어 제주민속관광 대사전).

 

「오주연문장전산교(五洲衍文長箋散橋」에 망건 결어 쓰는 제도가 명나라 태조 때 비롯되었으며 도사(道士)가 명주실로 망건을 결었다고 한다.『지봉유설』에는 중국, 한국, 유구(琉球) 사람만 망건을 썼다고 적혀 있다.

 

우리나라 망건은 명나라에서 전래되었다.『세종실록』2년 경자조에 말총으로 결은 망건을 명나라 사신에게 선물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러나 이후 재료나 용도 및 형태가 서로 달라졌다. 망건에는 관자(貫子)를 다는데 관자는 신분을 나타낸다. 벼슬에 따라 구분이 엄격했다.

 

망건의 윗부분을 망건당(말총으로 고를 맺어 두름), 아랫부분을 망건편자(망건을 졸라매기 위해 말총으로 띠처럼 굵게 짬)라 한다. 망건에 달아 상투에 동여매는 줄이 망건당줄이다. 편자(不帶)의 귀 뒤에 관자(貫子)를 달고, 좌우 당줄을 맞바꾸어 관자에 꿰어 뒤로 가져다 엇걸어 매고, 두 끝을 앞으로 가져와 동여맨다. 관자는 관품(官品)에 따라 재료 및 새김 장식이 다르다. 정1품은 조각이 없으나 질 좋은 작은 옥관자(도리옥), 정2품은 소형 금관자(도리령), 종2품은 조각한 대형 금관자, 정3품은 대형 옥관자를 쓴다. 이외에 대모, 마노, 호박, 골(骨), 각(角) 등으로 만든다.

 

망건은 맨 위에 갓이나 관을 쓰며, 관자 재료로 품계를 구별한다. 후대 와서 전면 중앙에 풍잠(風簪)을 부착하여 장식했다. 풍잠은 바람 불어도 갓이 뒤로 넘어가지 않게 하는 구실을 한다. 상류층은 그 재료로 대모(玳瑁), 마노(瑪瑙), 호박(琥珀) 등을 사용했고 일반인들은 골, 각을 사용했다

 

망건의 재료는 말총이다. 말총으로 겯는 방법은 우리나라에서 창안되어 역으로 중국에 수출되었다. 본래 명주실로 겯던 망건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토착화되면서 16세기 후반 무렵 말총으로 만든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처럼 망건은 중국에서 유래했으나 한국에서 말총 망건으로 더욱 세련되게 제작되어 중국으로 역수출되었다. 단순히 망건 재료인 말총이 제주에 많아 그랬을까. 그 보다 명주실을 말총으로 대체해 업그레이드된 망건을 제작한 산업적 발상이 경이롭다.

 

그 와중에 허생은 제주도 말총을 사재기(매점매석)하여 망건 값을 열 배 치솟게 한 후, 비싸게 되팔아 많은 이윤을 남겼다. 박지원(朴趾源)의 허생전(許生傳) 속 일화다. 박지원의 허생전에서는 제주도가 경유지에 불과하다. 다른 허구의 무인도에 이상국(理想國)을 건설한다. 하지만 채만식의 리메이크 작에서는 제주도에 이상국을 세운다. 그래서 제주는 여전히 파라다이스다

 

망건을 결을 때 나무로 된 망건골에 걸어 작업한다. 제품은 끓는 물에 삶아 헝클어지지 않게 고정시킨다. 망건 역시 갓양태, 갓모자, 탕건과 더불어 제주여성들의 소중한 소득원이었다. “친정어머니가 망건 팔아 시집올 때 해 준 한산모시 열두 폭 치마를 부엌 찬장에 걸어 두기만 하고, 막상 입지는 못한 채 오며 가며 시집살이 설운 눈물 닦느라 한산모시 치마 다 없앴다. 그런데 문어 같은 서방은 나를 보기만 하면 껴안으려 달려들더라.”

 

“얼굴 박박 얽은 놈아 밥상 받고 불평마라/니네 각시 애기 업고 큰길 쪽으로 달리더라/형님 형님 사촌형님 시집살이 어떤 가요/아이고 야야 말도 말고 무슨 말을 하고 있니/이아고 야야 요 망건이냐 고추 당추 맵다 한들 시집살이보다 더 매울소냐/장닭 같은 시아버지에 암탉 같은 시어머니에 문어 같은 서방님에 코생이 같은 시누이에 못 살겠다 못 살겠다/나 요 시집 못 살겠다 우리 어머니 망건 팔아 시집가라 차려 주니/한산 모시 열두 폭 치마 살레(부엌 찬장) 아래 걸어두고 해준 치마 오며 가며 눈물 닦으며 다 없어지더라”

 

이년이년 이여동호라 이년 망건 못아나(결여나)지라
이년이년 이여동호라 이년 망건 못아나지라
혼 돌 죽장(내내) 시벡인 맹긴 돌막 돌막 돌아나지라
양지(얼굴) 박박 얽은 놈아 밥상 받앙(받고) 타령 마라
이년이년 이여동 호라 망건 혼재나 혼못아나 간다
느네 각시 애기 업언 혼질(한길)러레 돌암서라(달리다)
성님(형님) 성님 소춘(사촌) 성님 씨녁살이 어떱데가
아이고 야야 말도 말고 미신(무슨)말을 호염시니(하고 있니)
이아고 야야 요 망건이냐 고초(고추) 당초(당추) 맵다 헌들
씨녁살이(시집살이)보다 더 매울소냐
장독(닭)곹은 시아방에 암톡 곹은(같은) 시어멍에
물꾸럭(문어)곹은 서방님에 고셍이(코생이) 곹은 시누이에
못 살커라 못 살커라 나 요 씨집 못 살커라
우리 어멍 망근(망건) 폴안(팔아) 씨집 가렌 촐려(차려) 주난
한산 모시 열두 폭 치마 살레(찬장) 아래 걸어둠서
허여준 치마 오멍 가멍(오며 가며) 눈물 씰멍(닦으며) 다 썩엄더라(썩고 있더라)(망건노래)

 

* 고셍이=제주어로 코생이, 표준어로 용치 놀래기

 

구한말 제주여성들은 망건 결어 얻은 소득으로 집이나 옷, 식량, 기타 일상용품 등을 구입했다. 단순히 소소한 현금수입에 그치지 않고 집이나 밭 등 집안 재산을 증식시킬 만큼 상당한 소득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812호가 망건제작에 종사했으며, 연간 59,000개 정도 생산했다. 이처럼 말총공예는 제주해녀 출가물질로 큰 수입을 벌어들이기 전까지 크게는 제주경제, 작게는 제주농촌 가계의 주축으로 큰 역할을 했다.

 

18세기 이후 양반의 수가 늘고 신분제도가 해이해짐에 따라 한동안 망건수요가 많아져 민간에서 수공업으로 대량 제작되었다. 게다가 18세기 말 금난전권(禁難廛權)이 폐지되자 망건과 관자를 전문적으로 유통하는 망건전(網巾廛)이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1895년 단발령(斷髮令) 이후 더 이상 망건을 쓸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일제강점기 거치며 망건 제작이 급속도로 감소하자 망건 제작 기술이 사라질 위기에 처하였다. 이에 1980년 망건장(망건을 만드는 기술이나 그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을 국가무형문화재 제66호로 지정하였다. 처음 임덕수를 보유자로 인정하여 명맥을 잇게 하였다. 그의 사후인 1987년 제주도 이수여를 보유자로 인정하였다. 그가 연로하자 2009년에 그의 딸인 강전향을 보유자로 인정하여 그 기술을 전승하고 있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

 

<참고문헌>

 

국립민속박물관, 한국민속대백과사전.
김영돈(2002),『제주도 민요 연구』, 민속원.
조선총독부(1929), 󰡔생활상태조사 2 제주도󰡕.
정경희(2006), ‘제주의 관모공예’,『제주도지』제7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
cid=210402&mid=RC00011341&menuName=구술(음성)>민요
제주특별자치도, 멀티미디어 제주민속관광 대사전.
좌혜경 외(2015), 「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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