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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럭삼춘 볼락누이-민요로 보는 제주사회와 경제(6)] 양태노래

 

 

‘빛과 바람이 통과하는 신기한 모자’,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갓’을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某감독님은 오마이 갓이라 했다). 양태(凉太)는 갓의 둘레로 둥글고 넙적한 부분을 말한다. 죽사(竹絲)를 사용하여 만들며 갓의 종류와 시대에 따라 양태 크기가 다르다. ‘입첨’이라고도 한다. 양태노래는 대나무를 이용하여 갓 테두리인 양태를 결으며 부르던 노래다. 관망 수공예 작업하며 부르는 관망요(冠網謠)로 분류된다.

 

“식구가 많아 자식들 먹여 살리려고, 눈이 빠지게 해봐도 살 길은 막막하고,
빨리 양태 결어서 우리 집 식구들과 술 먹는 서방 술값 줘야 할 텐데.
아이들아 저기 가만히 앉아 있어라 모자를 결어야 생활할 수 있단다.
어서 어서 결어야 우리 집 살 길이 생겨난다.
어느 때면 우리도 부자 되어 요놈이 모자 안 결어도 살아갈 수 있으려나.
언제면 이 모자 결어 우리 집 생활이 넉넉해질까”

 

일반적으로 가내수공업은 대부분 여성의 계절노동을 중심으로 생산되었으며 농업과 어업, 축산업, 임업 등 1차 산물을 가공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제주지역 역시 제주여성의 노동력과 손기술 그리고 제주산 말총을 결합해 경쟁력 있는 관모 수공업으로 성장했다. 다산 정약용의『탐진어가(耽津漁歌)』에 아래 대목이 있다.

 

추자도 배 고달도에 머무는 데
탐라 죽모첨이 한배에 가득이라,
비록 많은 돈 되니 좋은 장사라 하겠지만
고래 같은 파도 어디서 일지 모르니 마음 어찌 편할까
.

 

죽모첨(竹帽簷, 갓의 양)은 제주 말총으로 만든 갓을 말한다. 제주에서 생산되는 갓을 ‘마미립(馬尾笠)’이라 했다. 이 갓은 강진과 해남으로 운반되어 전국으로 퍼졌다. ‘많은 돈이 된다’ 는 제주에서 나오는 갓을 싣고 육지에 나와 팔면 많은 이윤이 발생한다는 의미이다. 다산이 『탐진어가』를 쓴 1800년대 초반은 전국적으로 상품 거래가 활발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 시전상인인 송상(松商)들이 제주에서 올라온 갓 재료인 양태를 매집(買集)하려고 강진(康津)과 해남(海南)까지 내려왔다.

 

고정종(高禎鍾)의 『제주도편람(濟州島便覽)』을 보면 “제주도의 수공업은 유치한 수준 단계로 제주도의 자원, 즉 자연환경을 이용한 약간의 자원을 가공하는 수공업제품 예를 들면, 죽제품, 조선모자, 탕건, 양태 등이 주를 이루었고 이외에 주로 자급적 성격을 지닌 약간의 면직물 제품이 존재했었다”고 한다. 구한말 제주사회는 농업과 수산업, 임업과 축산업 등을 주산업으로 하면서 제주지역 자연환경에서 생산되는 자원, 예를 들면 말총 등을 가공하는 수공업 제품들 즉 죽제품, 조선모자, 탕건, 망건, 양태 등과 같은 관모공예가 여성 노동력 위주의 생산 활동으로 광범위하게 존재했다.

 

망건, 탕건, 갓으로 대표되는 조선 관모는 말총과 대나무로 제작했다. 제주도가 관모를 제작하는 데 필수적인 말총과 대나무 재료의 특산지이다. 그러나 양태를 제작하는 양죽은 일부분만 제주에서 생산되었기 때문에 나머지는 담양이나 진주, 하동에서 나는 분죽(粉竹)을 장삿배로 들여왔다.

 

“한라산에는 전부터 분죽이 숲을 이루었는데, 잎은 크고 줄기는 뾰족하여 노죽(蘆竹)이라 이름 하였다. 옛 부터 씨를 맺지 않았는데, 4월 이후로 온 산의 대나무가 갑자기 다 열매를 맺어 모양이 구맥과 같았다. 이때 제주도의 세 고을이 몹시 가물어 보리농사가 흉작이었으므로 백성들이 바야흐로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이것을 따서 전죽(饘粥, 된 죽과 묽은 죽이라는 뜻으로서 죽을 총칭함)을 만들어 먹고 살아난 자가 많았는데, 도신이 장문한 것이다(濟州生竹實 漢拏山 舊有粉竹成藪 葉大莖尖 名曰蘆竹 自古無結子 四月以後 遍山之竹 忽皆結實 狀如瞿麥 時本島三邑亢旱 來牟失稔 民方阻飢 至是摘取 作饘粥 食而賴活者多 道臣以聞)” [경종실록 권제13, 1장 뒤쪽, 경종 3년 7월 4일(신사)](네이버 지식백과,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양태는 주로 삼양, 화북, 신촌, 와흘 등지에서 만들어졌다. 이곳은 제주의 관문인 화북포(조천포, 별도포)와 제주항(산저포, 건입포, 산지항)과 인접했기 때문에 양태 재료인 분죽(솜대)을 들여오고 완성된 관모 제품을 육지로 내다 파는 데 용이했다.

 

우리나라의 갓은 주로 제주도와 통영, 거제도에서 결어왔다. 통영이나 거제도에서는 남성들이 갓 양태나 갓 모자 겯기를 주로 담당했다. 제주도의 갓 겯기는 모두 여성 몫이다. 갓 일은 제주사회의 중요한 현금 소득원이었다.

 

“어서 어서 양태 많이 만들어 시장에 팔아야 큰 집도 사고, 늙은 부모 공양하고, 어린 동생 부양하고, 일가친척 ‘고적(부조떡)’하고, 이웃사촌 부조하고, 쌀 받아다 밥 해 먹고, 고기 사다 반찬도 해 먹는다.”

 

 

* 동침=갓양태를 겯기 시작할 때에 날이 되는 대오리를 실로 한바퀴 엮어 놓은 다음, 양태판이라는 둥그런 널빤지로 된 갓양태를 겯는 연장 한가운데 네모지게 뚫린 곳으로 내려뜨리는 실의 끄트머리

 

* 고적= 일가에 경조사가 생겼을 때 친척끼리 만들어 가는 부조떡이나 쌀

 

“각단 밭에 불붙어 가듯 요 양태야 몾아나(결여나) 지라/결려지라 결려지라 한 코 두 코 신랑 코여/요놈의 양태 결려지라 한 코 두 코 그물코여/내일 모레 장날이여 쉬지 말고 서둘러라/나 동침아 돌아가라 서울 사람 술잔 돌 듯 어서 빨리 돌아가라/이 양태로 큰 집 사고 늙은 부모 공양하고 어린 동생 부양하고 일가친척 부조떡하고 이웃사촌 부조하게/요 양태야 돌아가라 한 둘 육 장 때 정한 양태/어서 어서 돌아가라 요 양태를 빨리 해야 쌀도 나고 밥도 난다 인정 없는 요 양태야 사정없는 요 양태야/오른쪽으로 팽팽, 왼쪽으로 팽팽 돌아가라/요 양태야 몾아나 지라 요 양태를 해야 쌀 받아다가 밥 해먹고 고기 사다가 반찬도 하고/팽팽 팽팽 돌아가라 요 양태야 돌아가라”

 

양태는 대나무 중에서도 솜대(참대)로 만든다. 대나무를 머리카락과 같이 가늘게 쪼개어 겯는데 결을 때는 지름이 양태만한 둥근 양태 판을 써서 결으며 그 중심에 총모자만한 원을 비워둔다. ‘양태 판이’는 벚나무나 느티나무의 널빤지로 만들어진 직경 28cm쯤의 정단형이다. ‘텅에(대로써 결은 양태 판이를 받치는 바구니)’ 위에 얹어 갓양태를 곁는다. 갓양태의 제작은 먼저 실처럼 가느다란 대오리를 만들고 그 다음 그 대오리로 갓양태를 겯는다. 대오리를 만드는 일은 우선 대마디와 마디 사이를 톱으로 동강치고 두어 차례 쪼개고 나서 불필요한 속 부분은 떼어 낸다. 겉껍질만 솥에 넣고 재에 섞어 아홉 시간 삶는다. 삶은 '속튼대'를 도화지 두께 정도로 얄팍하게 훑어 다듬고, 0.5mm 정도 간격으로 칼금 내어 한 가닥씩 잡아당기면 실오라기처럼 가느다랗게 쪼개어 진다. 그 다음 '쌀'이라는 날대를 실로 엮는 일, 나선형으로 겯는 일, '빗대'를 비스듬히 꽂는 일을 거쳐 갓 양태를 겯는다.

 

“늴 모리 장날이여 쉬지 말앙 혼저 호라.” 이렇게 만든 양태는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제주도 오일장은 면(面)이나 읍내(邑內)의 중심이 되는 마을, 주로 면사무소나 읍사무소 소재지 마을에서 정기적으로 개장(開場)했다. 오일장을 통하여 농산물, 해산물 등을 생산한 농어민들과 그 가족이 직접 거래에 참가하여 생산물을 판매하고 생필품을 구매했다. 1·6일, 2·7일, 3·8일, 4·9일, 5·10일 중 어느 한 날에 개장하여 인근 지역 간에 중복되지 않도록 장이 서는 일자를 조정했다. 장날이면 주변 마을에서 각종 생산물들을 짊어지고 사람들이 아침부터 장터로 모여들었는데 시장 손님 대부분이 여성이었다. 농어가에서 생산되는 모든 생산물, 잉여 농수산물들이 장터로 몰려들었다. 시장에서는 마을에서 구입할 수 없던 생활필수품, 예를 들면 고무신, 의복, 옷감, 농기구, 소금 등을 구입했다.

 

1920년대까지만 해도 도내 1만3700호가 양태 겯기에 종사했다. 이들은 1년에 135만개를 생산했고 약 40만5000원의 소득을 얻었다. 그러나 갓일은 갑오경장을 고비로 단발령 이후 소비가 줄어 점차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이와 다른 주장도 있다. 1895년 단발령 이후 이전까지 양반과 선비들의 전용물이던 말총 공예품들을 일반 서민들도 착용하게 되면서 소비가 늘어나 오히려 제작이 활발하였다(정경희, 2006)는 주장이다. 충분히 설득력 있어 보인다.

 

2009년 제주특별자치도는 조선시대 갓 공예의 중심지였던 이미지를 부각시켜 문화관광자원으로 활용하고 무형문화재의 맥이 끊이지 않도록 보호·전승하기 위해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 4거리 인근에 갓 전시관을 개관했다. 중요무형문화재 갓일 제4호인 제주의 장순자 장인이 위탁받아 관리하고 있다.

 

장순자 장인의 어머니 고정생 장인은 1964년 중요무형문화재 제4호 ‘제1대 양태장’으로 지정을 받았다. 장순자 장인의 외할머니(강군일)는 당시 제주 갓일(양태)의 손꼽히는 명인이었고 어머니(고정생) 역시 6살 때부터 갓일을 배웠다. “죽더라도 손은 두고 가라”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나온 말이라고 한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사람’ 달성하기 아주 어려운 명인의 결정체(結晶體)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참고자료>

 

고정종(1930),『제주도 편람』.
김순자(2006),『와치와 바치』, 도서출판 각.
김영돈(2002),『제주도 민요연구』, 민속원.
정경희(2006), ‘제주의 관모공예’,『제주도지』제7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연구원〉제주학아카이브〉유형별정보〉구술(음성)〉민요
(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cid=210402&mid=RC00089911&menuName=구술(음성" target="_blank">http://www.jst.re.kr/digitalArchive.do?cid=210402)(http://www.jst.re.kr/digitalArchiveDetail.do?cid=210402&mid=RC00089911&menuName=구술(음성) > 민요)
좌혜경 외(2015), 「제주민요사전」, 제주발전연구원.
주희춘(2008),『제주 고대항로를 추적한다』, 주류성출판사.

 

☞진관훈은? = 서귀포 출생, 동국대 경제학 박사(1999), 공주대 사회복지학 박사(2011), 제주특별자치도 경제특보 역임, 현 제주테크노파크 수석연구원, 제주대학교 출강. 저서로는 『근대제주의 경제변동』(2004), 『국제자유도시의 경제학』(2004), 『사회적 자본과 복지거버넌스』 (2013), 『오달진 근대제주』(2019)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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