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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평화재단, 미국 현지조사서 3만8000장 자료 입수 ... "훌륭한 작전" 평가도

 

제주4.3 당시 미군정과 군 수뇌부가 제주도민을 대상으로 한 초토화작전을 '훌륭한 작전'으로 평가, 양민학살과 과잉진압 등을 용인했던 사실이 드러났다.

 

제주4·3평화재단은 지난해 현지조사팀을 꾸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등에 파견, 6개월간 미 정부와 미군이 작성한 4‧3 관련 기록 3만8000여장을 수집했다고 13일 밝혔다.

 

연합군최고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자료에 따르면 미 군정의 최고책임자인 하지(Hodge) 중장은 남한의 단독선거를 앞둔 1948년 3월 3일 UN임시위원단과 덕수궁에서 가진 회의에서 ‘정치범(political prisoner)’에 대한 정의를 놓고 극심한 논쟁을 벌였던 것으로 나타났다.

 

UN 임시위원단은 당시 남한의 단독선거를 반대하는 세력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선거는 찬성도 반대도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정치범’으로 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하지 중장은 “선거를 반대한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파괴하는 자들을 어떻게 정치범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동기는 정치적일지 모르나 범죄자일 뿐이다”라며 강력하게 맞섰다. 

 

임시위원단은 “우익세력이 그런 행동을 해도 마찬가지냐”고 따졌다. 이에 하지는 “그렇다”고 답했다. 

 

‘정치범’과 ‘범죄자’는 대응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하지 중장의 답변은 5‧10선거를 반대한 제주에서 미군 지휘 아래 한국 군경과 우익단체에 의한 무차별 학살이 저질러지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남한에 진주했던 24군단의 상위기관인 미 극동군사령부(Far East Command, 일명 맥아더사령부) 문서에 의하면 4.3봉기가 일어나고 한 달가량 지난 1948년 5월 제주에는 미군 70명이 주둔하고 있었다.

 

 

1948년 7월2일자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하지 중장의 정치고문 제이콥스(Joseph E. Jacobs)는 제주도민의 80%가 공산주의자와 관계돼 있거나 공포 때문에 그들과 협조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이는 제주 최고지휘관 브라운(Rothell H. Brown) 대령의 보고를 바탕으로 이뤄졌다.

 

 

또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Roberts) 공한철 등 미군 보고서에는 제주도에서 소위 초토화작전을 의미하는 ‘싹쓸이(cleaning-up)’ 등의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미 극동군사령부 문서에 따르면 로버츠 준장은 1949년 1월 28일 “공산주의자들을 싹쓸이하기 위해 제주에 1개 대대를 추가 파병하겠다”는 채병덕 참모총장의 서한에 대해 “최고 수준의 사고(top level thinking)”라고 극찬했다. 

 

극동군사령부 정보요약 보고에서도 미군은 1949년 2월 20일 제주에서 민보단이 76명의 주민들을 창으로 찔러 살해했을 때 “그들에게 ‘주의(brought to the attention)’를 줄 필요가 있다”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 짓고 있다.

 

극동군사령부 문서 1949년 7월 21일자에는 유재흥 대령의 귀순공작과 사면정책에 의해 하산한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몰아세우고 있다.

 

즉 “약 2000명의 공산주의자들(Communists)에 대한 재판이 제주도에서 최근 진행됐다"며 "350명의 사람들이 사형을, 약 1650명이 20년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 4‧3 군사재판 수형자 중 일부가 지난해 한국 법원에 의해 무죄나 다름없는 공소기각과 국가보상 판결을 받은 것과 비교하면, 당시 미군은 ‘공산주의자들’이란 누명을 씌우고 불법적인 재판과 가혹행위를 가해도 용인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미군 최고수뇌부의 이런 인식은 “공산주의자는 통상의 법률적 방법으로 다뤄선 안 된다”던 이승만의 인식(1948년 5월15일자 극동군사령부 문서)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승만은 극동군사령부 정보국 담당자와의 면담에서도 이를 피력했다.

 

 

4.3평화재단은 이번 조사에서 3만8500여장의 기록물을 모두 스캐너로 수집, ‘4.3 아카이브’ 구축의 토대를 마련했다. 

 

이번 미국자료 조사는 2001년 4·3위원회가 실시한 이후 18년 만에 재개됐다. 그때 수집된 자료를 바탕으로 출간된 위원회의 미국자료집은 NARA의 분류체계에 따른 출처를 밝히지 않아 증거자료로서의 가치가 반감됐다. 그러나 이번 조사로 해당 문서들의 출처를 정확히 파악, 증거력을 되살리는 큰 성과를 이뤘다.

 

또 2001년에는 주한 미군정청·주한미군 등 남한에 진주했던 미군정·미군 문서를 대상으로 조사가 이뤄졌으나 이번 현지조사에서는 미 극동군사령부와 연합군최고사령부, 국무부 등 상위기관의 문서들을 중점적으로 조사·수집했다는 점에서도 각별한 의미가 있다.

 

양정심 4·3평화재단 조사연구실장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에서 4·3 관련 자료를 많이 발굴했으나 관리청의 인력 부족으로 비밀해제가 되지 않아 입수하지 못했다”며 “미군 자료에 대해 비밀 해제를 요청하고, 그동안 수집한 기록을 정리해 ‘4·3 미국자료집’을 편찬하겠다”고 말했다. [제이누리=이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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