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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회의 '영화로 읽는 한국사회' - SE7EN (6)

기독교의 ‘7가지 죄(seven deadly sins)’를 범한 자들을 정죄하는 연쇄살인마 존 도의 행각은 정점을 향해 치닫는다. 그 와중에 ‘분노(wrath)의 죄’를 지은 자에 대한 정죄가 그 모습을 드러낸다. 분노의 죄악을 범한 죄인으로 선발된 인물은 다름 아닌 존 도를 추적하는 밀스 형사다. 밀스에게 가해지는 형벌의 정도는 실로 가혹하다.

 

 

일벌백계식의 처벌에 걸린 자들은 참으로 운수가 사납다. 세상에 화 한번 안 내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화를 한번 냈다고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이 집행된다면 참으로 기가 막힐 일이다. 나쁜 놈 옆에 있으면 벼락 맞는 법이다. 존 도(케빈 스페이시)가 선발한 ‘7가지 죄악을 저지른 죄인’들은 각각 죄악별 최악의 죄인이 아니라, 단순히 그의 주변에서 그의 눈에 띈 사람들일 뿐이다.

 

밀스(브래드 피트) 형사는 서머셋(모건 프리먼) 형사와 함께 존 도의 빈 아파트를 급습한다. 존 도는 그 현장에 신문기자로 위장하고 나타나 허탕을 치고 나오는 밀스 형사의 사진을 찍는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진 밀스 형사는 이 가짜 신문기자를 밀치고 불같이 화를 낸다. 순간적으로 ‘분노의 죄’를 범한다.

 

존 도에게는 자기를 쫓는 밀스 형사를 ‘죽여도 좋은’ 그럴듯한 명분이 생긴 셈이다. 분노의 죄를 지은 밀스 형사에게 가해지는 형량은 가혹하다. 어쩌면 사형보다도 더욱 가혹한 형벌이 내려진다. 존 도는 밀스 형사가 가장 사랑하는 아내의 목을 잘라 택배기사를 통해 그에게 배달하는 최악의 형벌을 내린다. ‘분노’라는 것이 이토록 가혹한 처벌을 받아야 할 정도로 극악한 죄악인지 다소 의아해진다.

 

 

신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분노를 인간이 저질러서는 안 될 7가지 죄악의 하나로 분류해 놓은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여러 고대 사상가의 의견을 바탕으로 답을 찾아보자. 첫째, 토마스 아퀴나스는 분노란 절대적으로 옳은 신神만이 할 수 있는 것이지, 불완전한 인간이 감히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봤다. 분노란 결국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오만과 망상에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느끼는 정당한 것으로 믿지만 대개의 분노는 그리 정당하다는 근거가 희박한 것들이다.

 

둘째, 아리스토텔레스는 불의를 바로잡거나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힘을 분노라고 생각했지만, 로마의 사상가 세네카는 분노를 ‘광기’와 같은 것으로 보았다. 광기는 파괴의 힘이지 건설의 힘은 아니다. 세네카는 로마의 힘을 분노를 통제하는 절제력에서 찾았다. 심지어 전쟁터에서도 분노를 통제할 수 있는 절제력을 갖춘 로마 병사들은 멋대로 흥분하고 분노하는 야만족들을 쉽게 제압할 수 있었다고 기록한다.

 

수많은 침략과 이민족들에 의한 지배, 그리고 부정하고 부패한 독재권력에 저항해온 우리는 ‘불의’에 대한 분노와 저항을 정의로운 것으로 여기고, 분노하지 않는 것을 불의한 것으로 여기는 전통이 있다. 여기저기서 ‘분노하라’고 부추기는 듯한 문화 속에서 살아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에 충실한 듯하다.

 

 

계급과 계급 사이에, 노인과 젊은이 사이에, 이념 사이에, 심지어 남녀 사이에도 분노가 가득하다. 자신들은 신처럼 절대선善이고 상대방이나 상대의 주장은 절대악惡인 양 분노한다. 광화문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은 분노로 이글대는 후손들의 모습을 1년 365일 굽어봐야 하니 민망한 일이다.

 

아리스토텔레스도 옳지만 세네카도 옳다. 국난극복과 독립, 건국과 민주화 투쟁의 여정 속에서 분노는 우리의 힘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제는 로마처럼 ‘분노의 통제’가 우리의 힘이 돼야 하는 단계로 접어들어야 하는 건 아닐까. 분노를 통제할 줄 몰랐던 게르만과 갈리아의 야만족들은 분노를 통제하고 규율 잡힌 군기에 충실했던 로마 군단에게 속수무책으로 무너져갔으니 말이다. [본사 제휴 The Scoop=김상회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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