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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4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3. 주원장(朱元璋) : 46명의 비빈을 참살해 순장.

 

명 태조 주원장이 죽은 후, 비빈 46명을 함께 부장하거나 순장하였다. 태조 이전에 죽은 비빈 2명을 태조 능묘의 동서 양측에 부장한 것 이외의 나머지 38명은 순장으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주원장을 매장할 때 ‘미혼진(迷魂陣)’을 펼쳤다고 전해온다. 매장 당일 13개 성문에서 동시에 출관하였다. 이 이야기는 600여 년을 전해져 내려오면서 남경(南京) 민간에 전설처럼 퍼져있다. 남경에 다음과 같은 민요가 전해져왔다. “남경에는 세 가지 괴이한 것이 있다. 용담(龍潭)의 아가씨는 노부인 같고, 무를 반찬으로 삼아 팔고, 13개 성문에서 관을 들고 나가고.” 이처럼 주원장이 죽고 나서 기이하게 매장하였던 이야기는 놀랍게도 남경을 상징하는 얘깃거리가 되었다.

 

물론 황당무계한 말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런데 아니 뗀 굴뚝에서 연기가 날까? 사료에도 기록돼있다. 명 주국정(朱國楨)의 『황명대정기(皇明大政記)』에 기록돼있다. 주원장을 매장하는 그날 “발인했는데 각문하장(各門下葬)”했다고. ‘각문하장(各門下葬)’이란 무엇일까? 일종의 눈가림수다. 비밀 장례를 치르는 과정의 하나다. 능묘의 도굴을 방지하기 위하여 실행하는 전형적인 방법 중 하나다. 그런데 과연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비밀스런 장례 절차에 불과할까? 모두가 주원장의 능묘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있지 않는가? 비밀이 아니다. 그렇다면 수상쩍은 무언가가 있다. 주원장이 죽은 후 매장할 당시 비빈들을 같이 순장하지 않았는가. 13개 성문을 열어 밖으로 옮긴 관에는 과연 누가 있었을까? 순장 때문에 죽임을 당한 후궁 미녀들의 시신을 옮겼던 것이다!

 

주원장을 시봉하라고 순장한 사람은 몇 명일까? 역사서에는 명확한 기록이 없다. 명 말기 모기령(毛奇齡)이 저술한 『동사습유기(彤史拾遺記)』 기록을 보면 “태조는 46명의 비를 효릉(孝陵)에 부장하였다. 그중 순장은 궁녀 10여 인일 따름이다”라고 돼있다.

 

나중에 주윤문(朱允炆)은 순장된 후궁과 궁녀들의 가족을 표창하고 작위를 하사한다. 장봉(張鳳), 이형(李衡), 조복(趙福), 장필(張弼), 왕빈(汪賓), 손서(孫瑞), 왕빈(王斌), 양충(楊忠), 임량(林良), 이성(李成), 장민(張敏), 유정(劉政) 등 모두에게 ‘천호(千户)’, ‘백호(百户)’의 직위를 하사하고 세습하도록 하였다. 그들은 모두 주원장과 함께 순장한 궁녀들의 부형으로 이른바 ‘조천여호(朝天女户)’라 불렀다.

 

이럴 정도였다면 그렇게 순장당한 여인들 모두 염을 해 입관하고 효릉에 부장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순장당한 사람이 ‘13’과 비슷한 명수가 아니던가. 따라서 매장한 당일 13개 성문이 동시에 열리고 관을 밖으로 이송한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당시 남경 백성들은 주원장이 출빈하는 그날 모두 밖으로 나와 구경하였을 것이다. 다만 조정이 길거리에 사람이 다니지 못하도록 ‘청가(淸街)’하였기 때문에 멀리에서 볼 수밖에 없었고. 이송하는 관의 수가 너무 많아 거리에서 서로서로 얘기를 전하면서 결국 “13 성문에서 관을 들고 나왔다”는 말이 생겼을 것이다. 지금은 그런 사실이 남경의 상징이 될 정도로 ‘괴이’한 일이 된 것이고.

 

4. 주체(朱棣) : 30명의 궁녀를 순장

 

명 성조(成祖)와 함께 순장한 비빈의 숫자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대명회전大明會典』에 기록된 16인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 기록된 30여 명이다.

 

후궁들의 순장에는 주로 자진하거나 절식의 방법을 따랐다. 이런 방식에 대하여 중국 정사에는 기록된 바가 거의 없다. 그러나 조선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성조와 함께 순장된 비빈들이 ‘자살’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명 영락(永樂) 22년 10월 무오(戊午), 순장하기 위하여 선발된 30여 명의 비빈들이 전당 밖에서 식사를 마치고 전당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때 “곡성진전각(哭聲震殿閣)”했다고 한다. 얼마나 원통했으면 곡성이 전각을 진동케 했을까. 전당 내에는 30여 개의 작은 ‘목상(木床)’이 놓여있었다. 죽어야하는 비빈들은 명령에 따라 목상 위에 올라섰다. 그녀들의 머리 위에는 이미 자진할 줄이 달려있었다. “머리를 줄 안으로 내밀면 목상을 치웠다. 모두 목매어 죽었다.”

 

조선 역사는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명 성조는 30명의 궁녀를 순장시켰다고.

 

이 30여 명 중에 조선 여인이 둘 있었다. 한 명은 한(韓) 씨이고 다른 한 명은 최(崔) 씨로 봉호는 ‘미인(美人)’이었다. 목을 맬 때가 되자 한 씨가 갑자기 땅바닥에 꿇어 엎드려 그녀들과 ‘결별’하는 인종(仁宗)에게 눈물로 호소하였다.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 노모를 모실 수 있도록 해달라고. 그러나 인종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 여인 둘은 이국타지에서 황천길을 가야했다. 한 씨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는 유모에게 이별을 고했다. “어머니, 저는 갑니다! 어머니 저는 떠납니다!”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발아래 놓인 목상을 치워버렸다. 그렇게 순식간에 30여 명의 여인들을 산채로 목을 매달았던 것이다.

 

 

그렇게 비빈들을 순장시킨 후 후임 황제들은 그녀들과 그녀들의 친척에게 후사하였다. 흔히 행했던 방식은 익호를 추증하고나 그 행위를 표창하는 것이었다. 『명사明史·후비전后妃傳』의 기록에 “태조가 붕어하자 궁녀 여럿이 따라 죽었다. 건문(建文)과 영락(永樂) 때 계속해서 후대하며 구제하였다.……세습 금의위 천백호를 하사하였다. 사람들은 ‘태조조천여호(太祖朝天女户)’라 칭했다. 역대 성조(成祖), 인종, 선종 모두 다 그러하였다.”

 

명 왕조의 황제 중 영종(英宗) 주기진(朱祁鎭)은 아홉 살에 등극하고 서른 살에 세상을 떴다. ‘토목의 변(土木之變)’을 겪고 오이라트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다. 물론 나중에 풀려나 복위되기는 했지만. 아무튼 별다른 공로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압제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임종 전에 다음과 같은 유조를 내렸다. “사람을 순장하는 것을 나는 차마 할 수가 없다. 그런 일은 마땅히 내 대에서 끝내야 한다. 후대에 다시는 행하지 말라.” 이렇게 하여 마침내 잔인무도한 순장제도는 끝을 맺는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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