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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욱의 [제주역사나들이](18) ... 제주역사나들이 2차 화북 탐방코스 (3편)

■ 금돈지

 

 

화북촌의 포구는 그 안에 두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서쪽은 금돈지 또는 새성창이고, 동쪽의 것은 엉물 머릿개 또는 묵은 성창이다.

 

제주어로 포구는 '개', '성창', '돈지' 등으로 불렀다.

 

이중 성창은 선창의 표음인듯 하다.

 

'돈지'는 군대가 주둔한 곳의 의미인 '둔지'에서 나왔다는 설이 있고, 제주어로 바다에 면한 땅의 의미인 '돈지' 그대로 쓴거라는 설이 있다.

 

나는 후자가 맞다고 보는데, 위미쪽에 돈지할망당이 있고 제주항에 돈지머리포구라는 지명이 있는 것을 그 근거로 본다.

 

■김석윤가옥

 

 

1913년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진 김석윤가옥은 안커리(안채)와 이문간(대문이 달린 바깥채)은 기와 지붕으로, 밖커리(바깥채)와 목커리(별채)는 초가 지붕의 독특한 양식으로 지어진 가옥이다. 필자가 어릴때 살던 집도 안채는 기와집, 바깥채는 초가 형태였다.

 

1978년도에 제주도 민속자료 4-1로 지정되었다.

 

기와집은 옛날에 제주에선 관청과 무근성 일대를 제외하고는 드물어서 이곳에 위치한 김석윤가옥은 그 가치가 특별하다.

 

■청풍대

 

 

관리들과 주민들이 주변의 경치를 즐겼다고 전해지는 화북의 청풍대이다. 과연 옛날 주민들이 관리들과 같이 한가로이 나무 밑에서 휴식할 여유가 있었지는 의문이다.

 

이곳과는 별도로 제주목 도성지도에 오현단 남측 동치성 상부에도 '청풍대'가 표기 되어 있다.( 지금은 복원된 제이각이 위치하고 있는데 청풍대 자리에 제이각이 있었던건지, 제이각을 청풍대라고 달리 불렸던건지 정확한 자료를 찾기가 힘들다.)

 

■화북진성

 

 

18세기 초 제주 목사 이형상의 탐라순력도에 그려진 화북일대를 보면 당시 화북진성의 북쪽이 바다에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다.

 

 

 

 

화북진성이 현재 위치에 거의 온전한 채로 남아 있다는 사실은 실로 고마운일이다. 아쉬운 것은 탐라순력도에 보듯이 성곽상단에 여장(방어시 병사들이 몸을 숨기고 활이나 총을 쏠 수 있게한 요철모양의 담)이 있어야 하는데 어느 세월엔가 없어진것 같아 안타깝다. 이는 최근 복원한 제주성지도 마찬가지인데 복원의 경우 철저히 고증을 하여 만들어야 함에도 그냥 높은 담으로 밖에 안되어 있다. 이는 역사학자 이영권 선생도 지적한 바 있다.

 

■해신사

 

 

토속신앙을 유교식으로 변신시켜 유교적 통치이념하에 제사를 지내려고 지었다. 한때 토속신앙적인 형태로 제를 지내다가 현대에 다시 유교적인 형식으로 제를 지낸다고 한다.

 

 

 

 

■별도 연대

 

 

 

별도 연대는 동쪽으로는 원당봉수, 서쪽으로는 사라봉수와 연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연대는 봉수대의 하위개념으로 규모가 봉수대 보단 작았을 것이다. 안내문에도 '높이 및 너비가 각각 10척(3미터)이다'라고 써있는데 고증을 거쳐 지금 복원한 것을 보면 무지 크다.  원래 3미터 였던게 고증을 거쳐 10미터 이상으로 만들었다. 그럴거면 고증은 왜하는지. 원래 작았던 것도 고증을 했다고 하면서 크게 만든 건 무슨 연유일까.

 

크게 해봤자 만리장성의 깜도 안되는데 원래보다 엉뚱하게 크게 복원하고는 누군가는 뿌듯해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크게 만든 덕에 환해장성과 제주 바다를 바라보는 풍광은 끝내준다.

 

덕분에 안내문에 고증을 거쳤다는 문구를 안 읽은걸로 해서 타협을 볼까한다.

 

■환해장성

 

 

 

 

1270년 10월 진도 주둔 삼별초에서 이문경을 제주로 파견하여 제주를 근거지로 삼을 계획을 세운다. 이를 눈치챈 고려 조정은 그해 9월 미리 김수 장군을 보내 제주를 방어케 하는데 달랑 200여명의 군사를 보낸다. 그 후 고여림을 70여명의 군사와 함께 보낸다.

 

김수는 삼별초에 대비하여 도민을 동원에 환해장성 축조를 시작한다.

 

삼별초의 이문경은 동제원(지금의 오현고 앞 일대)에 주둔하고 있던 김수의 관군을 박살내고, 제주 지배에 들어간다. 처음엔 제주도민들이 수탈만 일삼는 고려관리에 대한 반감으로 삼별초를 도왔다고 한다.

 

그러나 삼별초가 1271년 진도에서 깨지고 김통정이 제주로 오면서 제주도민은 다시 더욱 더 고초를 겪었다. 이 환해장성을 비롯한 각종 군사시설 확충, 무기 및 선박제조, 군량미조달 등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오죽하면 배가 고파서 자기가 눈 똥을 먹으려고 돌아보니 남이 주워 먹었다라는 비참한 말이 전해져 내려왔을까. 제주의 민심은 당연히 삼별초에 등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결국 1273년 3월 1만여명의 여몽연합군을 이끌고 입도한 김방경에 의해 4월28일 항파두리성이 함락되고 6월 김통정이 붉은 오름에서 자결하는 것으로 제주에서의 삼별초의 난이 끝난다.

 

삼별초는 외세에 끝까지 저항한 자주세력일까 아니면 제주인에게 고통과 희생만을 안겨준 외부 침입세력일까.  그후 목호의 난때도 제주도민들은 고려정부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을 당하는 고통을 겪는다.

 

제주에서 척박한 삶을 이어가던 민초들에게 외부 지배세력이란 단지 대대로 착취와 수탈을 일삼는 존재라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옛날엔 이런 올레마다 개구장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놀았다. 골목에서의 아이들이 웃음소리가 이제는 어느 마을에서건 보기 힘든 풍경이 되어 버렸다. 그 많은 아이들은 어디로 갔을까.

 

 

 

초가지붕 대신 슬레이트를 얹고 있어도 나즈막한 지붕과 남아있는 돌담은 옛 마을의 풍경을 잘 간직하고 있다.

 

 

■삼사석

 

 

 

삼성혈에서 나온 3선인이 살곳을 정할때 쏜 화살을 맞은 돌이라고 한다.

 

그런데 화살을 쏘아 정한 곳이 제주읍의 일도리, 이도리, 삼도리라 알려져 있는데 어째 화북에 이 돌이 있을까. 왜 여기에 삼사석이 있는지 속 시원히 알려주면 좋겠다.

 

암튼 화살이 돌에 꽂힐 정도면 엄청난 괴력의 삼성 선인인듯 하다.

 

삼사석 버스정류장에서 버스타고 출발지인 국립제주박물관으로 돌아가는걸로 나들이를 마친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김승욱은?
=제주에서 나고 자랐다. 오현고를 나와 서울대 공대 건축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육군 ROTC 장교로 군복무를 마치고 삼성물산 주택부문에서 일했다.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에서 건축공부를 더 한 뒤 에이스케이 건축 대표이사를 거쳐 제주로 귀향, 현재 본향건축 대표를 맡고 있다. 제주대 건축공학과에서 건축시공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주말이면 고향 제주의 벗들과 제주의 역사공부를 곁들여 돌담·밭담·자연의 숨결을 더듬고자 ‘역사나들이’ 기행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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