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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31)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노자(老子)는 도교의 시조다. 그의 사상은 중국 이천 년 동안 영향을 끼쳤고 지금까지도 끄떡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유교학파의 지성선사(至聖先師) 공부자(孔夫子)도 그에게 가르침을 구했다고 전해온다. 그렇다면 노자는 출중한 능력의 소유자였음이 분명하다. 사실, 중국 역사에서 노자는 많은 역사적 미스터리를 남겼다. 특히 그가 출관(出關)했다는데, 그 사실을 캐보자.

 

역사 기록을 보면 노자는 만년에 청우(靑牛)를 타고 천하를 유람했다고 한다. 도교학설을 강설하면서 철리를 논했고 서역(西域)을 개화시켰다고 한다.

 

먼저 청우란 무엇인지를 알아보자. 원명은 ‘판각청우(板角靑牛)’다.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둥근 뿔이 아니라 판과 같이 생긴 뿔을 가진 청색 소다. 과연 그럴까? 청우란 상고(上古)의 상서로운 동물 ‘시(兕)’다. 이름과 모양이 ‘우(牛)’일뿐 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兕’는 소처럼 생겼고 검푸르며 판각(일설에는 이마에 난 독각이라 하기도 한다)이라 하였다. 천하가 태평성대일 때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태상노군(太上老君)이 타고 다니는 동물이다. 물론 전설이다.

 

아무튼 노자가 서쪽으로 가는 도중 함곡관(函谷關, 하남 영보〔靈寶〕)에서 관령 윤희(尹喜)의 부탁을 받고 써준 책이 중국사상사의 천고의 명편, 5천 자에 이르는 『도덕경(道德經)』이라고 한다.

 

하나씩 살펴보자. 노자(약 기원전 580년~500년), 성은 이(李), 이름은 이(耳), 자는 백양(伯陽), 노담(老聃)이라고도 한다. 중국 고대 위대한 철학가요 사상가이다. 도가학파의 창시자이다.

 

노자는 일찍이 주(周)나라 국도 낙읍(洛邑)에서 장실사(藏室史, 현재의 국가도서관 관장 급)를 역임하였고 박학다식했다고 하고 ; 공자가 주유천하할 때 낙읍에서 노자를 배방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공자문례(孔子問禮)’가 그것이다.

 

 

노자가 주질(盩厔, 현 주지〔周至〕)을 보니 의산방수(依山傍水, 산을 의지하고 물 가까이에 있음), 봉만기복(峰巒起伏, 산등성이와 산봉우리가 굴곡을 이룸)하고 풍광이 유달리 아름다우니 머물기 좋다 여기고 초옥을 지어 수행하고 설경(說經)하였다. 그 유적이 지금도 존재하는 누관대(樓觀臺)이다. 노자는 우화(羽化)한 후 누관대에서 8킬로미터 떨어진 서루관(西樓觀)에 안장됐다고 한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곳을 도교의 발원지로 삼고 있다.

 

‘누관대’는 주지누관대(周至樓觀臺)이다. 사전 풀이를 보자 : 중국 섬서성 주지(周至)현의 동남쪽에서 15㎞ 떨어진 종남산(終南山)에 있는 도가 사원이다. 도교 시조인 노자가 도를 닦고 연단하던 곳으로 중국 최초의 도관이라고도 한다. 처음 명칭은 초루관(草樓觀)이었으나 주나라 목왕(穆王)이 누관궁(樓觀宮)으로 개명한 뒤 당나라 고조(高祖) 때 종성궁(宗聖宮)으로, 현종(玄宗) 때 종성관(宗聖觀)으로 다시 바뀌었다.

 

주요 건축물은 설경대(說經臺), 산문(山門), 상선지(上善池), 영관전(靈官殿), 장경각(藏經閣), 연단로(煉丹爐), 앙천지(仰天池), 서진정(栖眞亭) 등이 있다. 상선지는 산문 앞에 있는 연못으로 돌에 새긴 용머리에서 맑은 물을 뿜어낸다. 주 건물인 설경대는 노자가 도를 전파하던 곳으로 윤희(尹喜)에게 『도덕경(道德經)』을 전한 곳이라고 전한다. 직사각형의 대전은 남향이며, 아름다운 그림을 조각한 대들보와 기둥, 처마 서까래 끝에 부연을 달아 네 귀가 높이 들리게 한 비첨교각(飛檐翹角)이 아름답다. 전면에는 명나라 때인 1460년에 주조된 쇠종과 1583년에 주조된 철제 향로가 있다.

 

설경대 남쪽의 연단로는 높이 3.6m, 너비 2.7m의 직사각형 석실로, 노자가 연단하던 곳이라고 한다. 설경대 동남쪽으로 7㎞ 떨어진 곳에 있는 앙천지는 노자가 철을 제련하면서 담금질하던 연못으로 면적은 약 50㎡이다. 서진정은 벽돌로 쌓아 올린 팔괘 형태의 층집으로 노자가 수신하던 곳이라고 한다. 이밖에 설경대 주변에 누관대탑(樓觀臺塔), 화녀천(化女泉), 서루관(西樓觀) 등이 있으며, 구양순(歐陽詢), 소식(蘇軾), 미불(米芾) 등 당대를 풍미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남아 있다.

 

이와 다른 설도 있다. 노자가 함곡관을 넘은 후 청우를 타고 계속 서행했다고 한다. 그 후 행적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고. 계속 서행하여서 인도까지 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또 감숙 임조(臨洮)에 머물면서 은자들을 위하여 내단 연단 방법을 가르쳤고 양생 수도하며 지내다가 임조의 초연대(超然臺)에서 ‘비승(飛升)’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서쪽으로 가지 않고 동쪽으로 돌아갔다는 설도 있다. 『장자莊子·천도편天道篇』 내용을 보면 노자가 주 왕조에 사직한 후 ‘귀거(歸居)’했다고 돼있다. 노자의 고향이 현재 하남성 녹읍(鹿邑)현이기에 ‘동귀(東歸)’했다고도 한다. 노자가 ‘동귀’했다는 사적은 『장자』, 『한비자(韓非子)』, 『여씨춘추(吕氏春秋)』, 그리고 유가 저작 『예기(禮記)·증자문(曾子問)』 에 기재돼있다.

 

사료를 보면 노자가 은퇴 후 ‘동귀’했다는 설은 문헌 기록을 근거로 하고 있지만 다른 설들은 새로운 증거를 제공해야만 증명할 수 있다.

 

물론 역사서 기록에 보면, 노자가 서행하다 함곡관을 넘으려 할 때 관령 윤희의 강구로 중국사상사의 거작 5천 자 『도덕경』을 남겼다고 돼있다. 그리고 청우를 타고 계속 서행해 소식이 알 길이 없다고 돼있다. 이 기록은 고고학자와 역사학자들의 흥미를 끌었지만 지금까지도 명확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유사(流沙)를 넘어 인도로 건너가 전교했는데 석가모니 같은 대제자를 배출했다고 강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역시 도교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하여 다른 종교를 폄하하면서 날조된 것일 따름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득도 후 임조에서 승천했다는 말은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억지다. 극력 반대하는 이들은 당시 치안이 좋지 않았는데 도중에 강도를 만나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만도 천만다행일 거라고 꼬집기도 한다.

 

여러 가지 설 가운데 역사학자들이 동의하는 동일한 관점이 하나 있다. 노자와 공자는 기본적으로 동시대 사람이라는 것이다. 어떤 학자는 노자 나이가 공자보다 대략 30~40세 많다고 고증하기도 하였다. 그 고증에 따르면 공자가 30세 전후 때에 노자에게 몇 번이나 ‘예(禮)’에 대하여 가르침을 청하였다고 한다. 그게 맞는다면 노자와 공자는 사제지간이 되는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공자는 사회에 뛰어들어 출세하려고 노력하였던 인물이다. 줄곧 입신양명하려 하였다. 관리의 이론을 연구하였고 주례(周禮)로 돌아가자고 제창하였다. “周監於二代,郁郁乎文哉!(주감어이대,욱욱호문재!)吾從周(오종주)”(『논어(論語)·학이(學而)』)라 하였지 않았는가. 무슨 뜻인가? “주나라가 두 왕조를 거울로 삼았나니, 찬란하다, 문화여! 나는 주를 따르리라.” 나중에 제자들이 집성한 『논어』에 “君君臣臣(군군신신)”의 도리가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설령 공자가 노자를 스승으로 삼았다는 이 설을 인정한다고 하여도, 노자는 공자의 학설이나 관점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너무 간섭한다고 보았다. 남아있는 기록을 보자.

 

『사기(史記)』 기록을 간단히 정리해보자. 한번은 공자가 수도(당시 노자는 주 천자의 국가도서관 관장이었다)로 가 노자에게 ‘禮’를 물었다. 그런데 당시 주 왕조는 이미 혼란에 빠져있었다. 제후들이 다투고 있었고 예악은 붕괴된 상태였다. 공자는 질서를 회복하는 데에 흥성하였던 시기의 주를 원형으로 삼았다. 노자가 나이가 많고 학문이 높으며 식견이 넓으니 공자가 예의 가르침을 청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자기 관점을 제후들이 받아주지 않은 데에 원망하고 답답해했다.

 

노자는 그에게 나무라듯 말했다. “당신 말한 그런 것들은 관련 인물이나 뼈들 모두 이미 썩어 버리고 그들이 하였던 말만 남아있지 않은가. 그리고 자중하는 사람은 뜻을 얻었을 때는 제후의 수행원이나 관리가 되고 ; 뜻을 얻지 못하면 곳곳을 떠다니며 고개 숙이고 꼬리를 말지 않더이까. 나는 이렇게 들었소. 뛰어난 상인은 자신의 재화를 깊이 감추어 겉으로 들어나지 않게 하고 ; 고상한 도덕을 지닌 사람은 바보(대지약우〔大智若愚〕,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는 뜻으로 현인은 재능을 뽐내지 않아 어리석어 보인다는 의미)처럼 보인다 하지 않으오. 그대여, 자신의 교만과 과도한 욕망을 떨쳐버리시게 ; 득의양양한 얼굴색과 색탐의 욕념을 버리시게. 그런 것들은 당신에게 무익하기 그지없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이것뿐이오.” 한심하다는 듯 총괄적으로 시작하고 나중에는 직접적으로 공자를 비평하며 비꼬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노자의 비판을 듣고서도 공자는 그리 화를 내지 않고 학생들에게 감탄하며 말했다고 한다. “이전에는 용(龍)이 있다는 소리만 듣고 본적이 없었는데, 지금 노자를 보니 무엇이 용인지를 알겠다. 노자라는 분이야말로 용이라 할 것이야!”

 

당시 공자는 배움에 열심이었고 관리가 돼 성공한 인사에 속했다. 예의를 추구하였던 주 왕조에서 노자가 그렇게 공자를 대했다는 것은 의외이며 보기 드문 일이다. 그렇다면 노자는 왜 그렇게 예의 없게 공자를 대하였을까? 아마 학문의 차이에서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사상의 차이가 처세 방법의 차이를 만든 것이고. 달리 말하면 세계관의 차이로 방법론과 행동관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예의를 갖추지 않는 듯이 보이는 노자의 언행이 나왔던 것일 따름이다.

 

노자의 세계관은 ‘무위이치(無爲而治)’이다. 초월적 사상이라 하겠다. 반면 공자의 세계관은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듦(入世)”을 추구하였다. 그렇게 해서 인식 방면에 심한 차이를 보인 것이다. 어쩌면 노자는 공자 사상을 바꾸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공자가 바꾸지 않자 노자가 그렇게 비평했을 수도 있다. 다소 예의 없이 말을 건넸을 것이고. 노자의 계승자라 불리는 장자는 그의 『천운天運』에서 아주 교묘하게 그 일에 대해 생동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다만 노자보다는 공자를 폄하하는 경향을 보인다.

 

당시 노자와 공자는 물과 불처럼 병존할 수 없는 처지였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노자는 소심해 공적인 것으로 개인적인 원한을 풀었다는 것이다. 공자가 자신과 다른 학문의 길을 걸었던 소정묘(少正卯)를 주살하자 자신의 안위가 걱정(공자학파의 근원이 깊고 제자들도 천하에 퍼져 있었기 때문에)돼 급히 서쪽으로 떠났다고 한다. 심지어 사막을 넘어 서역까지 도망간 것이라고, 죽음을 피하기 위해. 현대 저명한 학자인 장태염(章太炎)이 제기한 내용이나, 불행하게도 아무런 증거가 없다.

 

 

마지막으로 소정묘(少正卯)는 누구인가? 사전의 내용이다.

 

묘(卯, ?~BC496)가 이름, 소정(少正)은 관직명이다. 공자에게 주살당한 인물로 중국 공산정권의 비공(批孔 : 반공자운동) 때 주목받았다. 그 주살사건은 『사기史記』의 「공자세가편孔子世家篇」, 『공자가어孔子家語』의 「시주편始誅篇」, 『순자荀子』의 「유좌편宥坐篇」 등에 기록돼있다. 기록에 따르면 노나라 정공(定公) 14년(BC496)에 공자는 사구(司寇, 사법장관〔司法長官〕)가 된 지 7일째 되는 날 정치를 문란케 한 소정묘를 죽이고 그 시체를 3일간 궁정에 내걸었다고 한다.

 

제자 자공(子貢)은 소정묘를 인망이 높은 사람으로 생각해 공자를 힐난하자 공자는 도둑 이외의 대악(大惡) 다섯 가지를 들어 소정묘는 5대악을 범했고 도당(徒黨)을 짜 대중을 현혹해 체제에 반항하는 조직을 만든 ‘소인(小人)의 걸웅(桀雄)’이므로 주살함이 당연하다 대답하였다.

 

청(淸)나라 말기의 양계초(梁啓超)는 “그것은 공자의 일대오점(一大汚點)이지만 사실이 아닐 것이다”라고 논평하였으나, 근년의 양영국(楊榮國) 등은 소정묘는 당시 신흥지주계급을 대표하는 정치가(법가사상〔法家思想〕)이며 공자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는 구체제의 회복을 기도한 보수사상가임을 예증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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