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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도시의 정수, 북경의 고건축(2)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24)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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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7.02  09:2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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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북경에는 온통 현대식 건물이 들어서있다. 오래된 건축물들은 거의 ‘철거’되는 운명에 처해있다. 철거하고 새로 건축하는 와중에 북경사람들은 옛 성벽이 어떤 모양이었는지 거의 알지 못한다. 북경 성벽은 대부분 철거되고 오직 3채의 문루(門樓)인 : 정양문(正陽門), 동편문(東便門), 덕승문(德勝門)만 남아있다.

   
   

북경에는 “덕승문이 먼저 생기고서야 북경성이 생겼다”는 속담이 전해져온다. 이는 덕승문의 전후관계를 알려 주고 있다. 원나라 말기, 대장군 서달(徐達)이 군대를 이끌고 원 왕조의 대도(大都, 북경)를 함락시켰다. 원 순제(順帝)는 황급히 대도 성의 북문인 건덕문(健德門)으로 빠져 나가면서 원 왕조는 막을 내린다.

서달은 건덕문을 덕승문이라 고쳤다. 득승문(得勝門)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어쩌면 명나라 군대가 승리를 얻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바로 홍무(洪武) 원년(1368) 일이다. 영락(永樂) 18년(1420) 북경 성을 개수할 때 대도 성의 성벽을 남쪽으로 2킬로미터로 옮기고 다른 성문과 옹성(甕城)을 세워 덕승문이라 했다. 이렇게 본다면 덕승문의 명명은 북경 성보다 52년이나 앞선다.

북경 성이 완공되었을 때 각기 용도가 있는 9개의 성문이 있었다. 봉건왕조 시대 황제는 특별히 옥천산(玉泉山)의 샘물을 마셨다. 황제에게 물을 길어다 주는 물차는 서직문(西直門)을 통해 들어갔다. 궁정에 매탄을 운송하고 제공하는 매탄 수레는 부성문(阜成門)을 통했다. 정양문은 황제가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어가가 드나들었다.

조양문(朝陽門)은 양식, 동직문(東直門)은 땔감, 숭문문(崇文門)은 술, 선무문(宣武門)은 죄수, 안정문(安定門)은 전차가 드나들었다. 전장에 나가 승리를 거두어 개선할 때 덕승문으로 들어왔다. 청나라 사병들이 덕승문으로 들어올 때 ‘득승가(得勝歌)’를 소리 높여 불렀다고 전해온다. 베이징 토박이들이 말에 따르면 그 득승가가 팔각고(八角鼓, 탄현〔彈弦〕)의 전신이라 한다.

역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명 정통(正統) 14년(1449) 8월 오이라트(Oirat, 瓦剌) 군대가 북경을 공격할 때 병부상서 우겸(于謙)이 대군을 이끌고 안정문으로 출격해 적을 맞았다. ‘철경원수(鐵頸元帥)’라는 칭호를 가진 에센(Esen, 也先)의 동생을 일격에 쓰러뜨리고 오이라트 군대에 참패를 안겨줬다. 우겸이 승리를 거둔 후 개선한다. 이것이 우겸이 북경을 보위한 첫 번째 대승으로 역사적으로 유명한 전투다.

이후 숭정(崇禎) 17년(1644), 황제 주유검(朱由檢)의 명령아래 이부우시랑 이건태(李建泰)는 안정문으로 출병해 산서(山西)로 나가 이자성(李自成)의 봉기군을 맞아 싸웠다. 군대가 막 탁주(涿州)에 다다랐을 때 틈왕(闖王, 이자성)의 부대와 맞닥뜨렸다. 군대는 싸워보지도 못하고 소문만 듣고 퇴각해 자멸한다. 이자성의 대군은 승기를 틈타 추격해 한달음에 북경 성에 이르렀다. 주유검은 대세가 이미 기울었다는 것을 알고 매산(煤山)에서 목매달아 자살하였다. 이렇게 본다면 덕승문은 실제로는 승리도 있었고 패배도 있었던 셈이다.

북경 성내에 있었던 9개의 문에는 모두 성루와 전루(箭樓)가 있었다. 그런데 덕승문의 전루는 남다르다. 정양문을 얘기하면 전루 아래 문동(門洞)과 성문이 있지만 덕승문의 전루는 문동과 성문이 없다. 이는 북경에서 문동과 성문이 없는 유일무이한 전루다.

덕승문은 500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명나라 가정(嘉靖) 연간과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에 수리를 거쳤다. 민국 초년에도 보수됐는데 재정이 모자라 반쪽 성대만 수리하고 작업을 중지하였다. 민국 13년에 북양(北洋) 정부는 아예 성루를 헐어버리고 목재를 팔아 그 돈으로 정부 관원에게 임금으로 나눠주었다.

   

고궁 신무문(神武門)에서 어화원(御花園)으로 들어갈 때 원내를 휘감아 도는 돌로 꾸며진 통로를 걸으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풍광을 음미할 수 있다. 고궁 어화원의 꽃 돌길은 ‘석자화(石子畵)’라고도 한다. 균형 잡힌 오색 돌로 생생한 그림과 같이 수놓아있다. 그중 화훼, 인물, 옛날 기물, 건축, 비금주수(飛禽走獸) 및 길상 도안 등 700여 폭이나 된다. 색채가 화려하며 풍부하고 다채롭다.

‘석자화’는 벽돌 조각품으로 화문을 만들거나 기와 같은 것으로 문양을 만들어 중간에 돌을 박아놓았다. 칠교도(七巧圖), 가지각색의 문양, 옛날 기물 등 각종 도안을 깔아놓았다. 칠교도는 직사각형, 정사각형, 마름모, 사다리꼴 등의 윤곽 중간에 화조, 식물 도안을 박았다. 연꽃 원앙, 쌍봉 화훼, 백로 연화, 삼송우학(三松友鶴), 대나무에서 우는 봉황 등 천태만상으로 뒤섞여있다.

가지각색의 문양은 석류, 사과, 불수감, 오이, 박쥐, 경쇠 등을 윤곽으로 삼아 이로관기(二老觀棋), 오자탈연(五子奪蓮), 어초경독(魚樵耕讀), 서우망월(犀牛望月), 공일출행(紅日出海), 사자 비단 공굴리기, 어가락(漁家樂) 등의 모양으로 돌을 박았는데 인물 형상이 생동감이 넘치고 정취가 넘쳐난다. 옛날 기물로는 각양각색인데 화병, 분재, 화고(花觚), 책, 암석정원 등 옛 정취가 풍겨나는 물건들을 진열해 소박하고 예스러운 조형을 이루어 세밀하게 수놓았다.

믿기 힘든 것 중 하나가 그 궁정 심처에 민간 생활을 반영하는 이야기 그림이 있다는 것이다. 비속할 정도로 통속적이기는 하나 유머가 있고 해학적이다. 그중 ‘파식부도(怕媳婦圖)’는 몇몇 부부를 표현하고 있다.

어떤 남자는 걸상 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에는 호롱불을 이고 있는데 부인은 그 위에 올라서있다. 어떤 남자는 빨래판 위에 무릎을 꿇고 머리에는 걸상을 이고 있는데 처는 옆에서 몽둥이를 들고 꾸짖고 있다. 여러 상황을 보면 실물과 똑같이 생동감이 넘친다. 패기 넘치는 여인들의 의기가 남자들의 위엄을 무너뜨리고 있다고나 할까.

『십팔학사등영주도十八學士登瀛州圖』도 있다. 당 태종이 문과를 열어 천하의 명사들을 끌어 모으는 정경을 묘사하고 있다. 한 학사가 말고삐를 잡고 유유자적 가고 있고 소동이 짐을 지고 뒤를 따르고 있다.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게 천천히 걷고 있다. 인물은 반 척이 좀 못되지만 표정이 각기 다른 게 행동거지가 살아있는 듯하다.

당시 솜씨 좋은 공예가들이 독특하고 절묘하게 구상했음이 분명하다. 울고 있는 수탉과 목단을 가지고 ‘공명부귀’를 표현하였고 여지, 용안 열매, 호두로 ‘연중삼원(連中三元)’을 기탁했으며 열린 석류로 ‘다자다손’을 표현하였고 5마리의 박쥐로 ‘수(壽)’자를 감돌며 원형 장식 문양의 도안을 구성하면서 ‘오복임문(五福臨門)’을 상징하도록 하였다.

   

이화원(頤和園)의 곤명호(昆明湖) 동쪽 십칠공교(十七孔橋) 옆에는 동으로 만든 진짜 소 크기의 동우(銅牛)가 드러누워 고개를 들고 먼 곳을 응시하고 있다. 200여 년 전 건륭(乾隆) 황제가 이화원을 중수하면서 주조한 것이라고 전해온다.

고대 중국인은 동을 금과 같이 보는 관점이 있었다. 그래서 동우를 금우(金牛)로 여긴 사람이 적지 않았다. 건륭황제는 장인에게 소의 몸에 ‘금우명(金牛銘)’을 새기도록 하였다. 1900년에 8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략하였을 때 서양인들이 곤명호에 금으로 된 소가 있다는 말을 듣고 이화원을 수색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나 그 소가 크고 무거워 움직일 수 없었다. 자세히 살펴보니 황동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칼로 몇 번 잘라보고는 화를 내며 떠났다고 전한다.

왜 곤명호에 그렇게 동으로 소를 만들어 세웠을까? 호수 옆 동으로 만든 소는 물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북경 성에는 금(金), 목(木), 수(水), 화(火), 토(土)를 다스리는 물건이 있다고 전한다. 대종사(大鍾寺)의 ‘종왕(鍾王)’이라 부르는 큰 종은 금을 다스리는 것이고, 경산(景山)은 토를, 곤명호는 곧 수를 다스린다고 한다. 동으로 만든 소는 홍수의 표지라 보기도 한다. 북경의 지세는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다. 곤명호는 북경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어 자금성(紫禁城)보다 10미터가 높다. 비가 많은 계절에 곤명호 수위와 소의 기초와의 거리를 자세히 관찰했다고 한다. 그것을 근거로 자금성의 홍수를 막았고.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가장 재미있는 설은 전설 속의 인물 ‘견우’를 상징한다는 주장이다. 곤명호의 서쪽 제방 옥대교(玉帶橋) 부근에 뽕나무를 심은 ‘경직원(耕織園)’이라는 마을이 있다. 2백 년 전 그곳 사람들은 뽕나무로 양잠을 했는데 매우 번성하였다. 곤명호 동쪽에 동으로 만든 소가 있으니 전자는 직녀요 후자는 견우를 상징한다고 보는 것이다.

역사가 오랜 도시 북경에 대한 이야기들은 많고도 많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점점 줄고 있다. 어쩌면 현대화된 결과이리라. 그렇지만 사라져 가는 이야기들을 어떻게 되살릴 것인가는 역시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민해야할 문제일 것이다.

과거 없이 현재가 없고 현재가 없이 미래가 없는 법이니.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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