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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를 아우른 지존, 쿠빌라이이권홍의 '중국, 중국인'(219)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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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9.05.28  17:2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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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충(劉秉忠, 1216~1274), 원래 이름은 간(侃), 자는 중회(仲晦), 형주(邢州, 현 하북 형태〔邢台〕) 사람이다. 인명사전을 빌리면 다음과 같다.

자호는 장춘산인(藏春散人)이다. 승려 때의 법명은 자총(子聰)이다. 박학다식하였고 특히 『주역』과 소옹(邵雍)의 『황극경세(皇極經世)』에 정통하였다. 처음에 요(遼)나라에서 형태절도사부령사(邢台節度使府令史)를 지냈는데 얼마 뒤 사직하고 무안산(武安山)에 숨었다가 금(金)나라에 망하자 승려가 되었다.

내마진후(乃馬眞後) 원년(1240)에 쿠빌라이가 잠저(潛邸)에 있을 때 불러 고문으로 삼았다. 전한 초기 육가(陸賈)가 말한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을 수는 있지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점을 일깨우면서 천하의 대계를 진언하였다.

태종11년(1239) 해운선사(海雲禪師)의 추천으로 쿠빌라이의 막하에 들어가 원나라 제도를 개혁하는 데 공헌하였다. 헌종(憲宗) 때 대리(大理)를 멸망시켰다. 항상 천지는 생명을 키우기를 좋아한다는 말로 황제를 격려해 많은 생명을 구해내었다. 즉위하자 옛 제도와 전범을 모아 조목별로 이해하도록 하였다.

중통(中統) 5년(1264)에 환속해 이름을 고치고 태보(太保)가 돼 중서성(中書省) 일을 관할하였다. 연경(燕京)을 수도로 삼도록 건의하였고 나라 이름도 대원(大元)으로 정하였으며 중통 5년으로 지원(至元) 원년을 삼도록 건의하였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저서에 『장춘집(藏春集)』이 있다.

원 세조 쿠빌라이는 몽골 지역의 한계를 넘어 그의 아들, 손자와 더불어 세 차례나 서정해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방대한 원 제국을 세웠다. 쿠빌라이의 뛰어난 재능과 원대한 계략은 일반 봉건 제왕과는 비견할 수 없을 정도였다.

더욱 쉽지 않은 일은 전란으로 세상이 어수선하고 천하가 분열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담하게 한족 유학자를 중용해 인재의 싱크 탱크를 만들었다는 데에 있다. 그 싱크 탱크는 쿠빌라이를 보좌해 대업을 이룰 수 있게 만들었고 몽골 역사상 영명한 군주로 이름을 떨치게 만들었다.

   

쿠빌라이는 여타 몽골 제왕과도 달랐다. 어릴 적부터 한족 문화와 역사에 관심을 가졌고 흠모하는 마음까지 가지고 있었다. 즉위하기 전에 그는 도처에서 인재들을 불러 모았다. 명사를 초빙해 귀빈의 예로 대하고 스승처럼 존경하였다.

그가 구한 인재들은 모두 중원 지역의 한족 유학자였다. 그들은 한족 문화를 잘 알고 있었다. 쿠빌라이는 한족의 지혜로 한족을 통치하는 참모로 삼았던 것이다.

책사 요추(姚樞)는 현인을 갈구하고 덕망이 높고 어진 사람을 예의와 겸손으로 대하는 쿠빌라이의 태도에 감동받아 처음 만나자마자 『치도서(治道書)』 수천 자를 써서 올렸다. 먼저 고대 제왕의 천하를 얻은 길을 얘기하고 수신(修身), 역학(力學), 존현(尊賢), 친친(親親), 외천(畏天), 애민(愛民), 호선(好善), 원녕(遠佞) 등 8조 세목을 열거하며 쿠빌라이에게 어떻게 하면 위대한 제왕이 되는지를 알려주었다.

또 30조의 방안을 열거하면서 그 중 너그러워야 하고 엄격하여야 하는 길을 이야기했다. 그야말로 제왕의 강령이나 다름없었다. 쿠빌라이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행동할 때마다 요추를 불러 대사를 논의하였다.

쿠빌라이가 가장 신임해 중책을 맡겨 대사를 함께 도모한 이가 유병충이다. 그는 일찍이 운중 남당사에 은거하면서 불도를 닦고 있었다. 자총이라는 법명을 가지고 있었고 박학다식하였다. 천문, 음률, 역법에 능했고 각종 기문이술에 능통해 쿠빌라이가 중용하였다. 유병충은 30여 년 동안 쿠빌라이와 함께하면서 군기대사에 참여하였다. 정책과 방략을 짜 보좌하면서 쿠빌라이가 황제의 자리에 앉아 중국 천하를 통일할 수 있도록 공헌하였다.

유병충은 막사에서 쿠빌라이와 함께 밤낮으로 중국 역사와 유가 학설을 해설하기도 하고 글을 올려 진정하면서 여러 가지 책략을 내놓았다고 전해온다. 서로 간의 정이 마치 형제와도 같이 두터웠다하기도 하고. 그는 또 유가의 음양문화를 가지고 지형에 맞게 축성토록 해 개평(開平)에 성을 축조하기도 하였다. 나중에 또 쿠빌라이를 위하여 연경(燕京), 즉 중도(中都)를 세웠다. 중도는 이후의 원 왕조의 대도(大都)로 원, 명, 청 세 왕조의 수도가 되었다.

   

쿠빌라이가 칭제한 후 유병충은 그를 위하여 중원 전체를 고려해 개국의 제도를 제정하였다. 장복(章服, 관디)을 마련하고 조의(朝儀)를 거행하며 봉록을 정하고 관제를 제정하였다. 심지어 쿠빌라이가 국호를 ‘大元’으로 정할 수 있도록 조언하였다.

유병충은 유가 경전 『주역(周易)』 중의 “크도다 건원이여, 만물이 바탕으로 비롯하나니 이에 천도를 통관하도다〔대재건원(大哉乾元),만물자치(萬物資治),내통천(乃統天)〕”에서 따왔다. 유병충은 생전에 태보(太保)를 역임하였고 사후에 태부(太傅)로 추숭되었다. 이는 원 왕조의 최고 관직으로 삼공(三公)이다. 이로 보면 쿠빌라이가 얼마나 그를 존중했는지를 알 수 있다.

쿠빌라이가 신임한 한족 중에 경조(京兆)〔일반적으로 한(漢)대 이후에는 섬서(陝西) 장안(長安)에서 동쪽으로 화현(華縣)에 이르는 지역을 말하며 장안을 비롯한 12개의 현이 속해 있었다. 명청(明淸) 이후에는 순천부(順天府), 즉 지금의 북경을 경조라고 하였다〕 선무사(宣撫使 염희헌(廉希憲)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쿠빌라이를 따라 남정북벌에 참여하였다. 염희헌은 경사를 읽기를 좋아해 손에서 책을 떼지 않았다. 특히 『맹자』를 좋아해 쿠빌라이가 ‘염맹자’라 부르기도 하였다. 당시 경조는 관중 지역으로 쿠빌라이의 봉지였다. 농서(隴西)〔지금의 감숙(甘肅) 임조부에서 공창부의 서쪽에 걸친 곳으로 서역에 가깝다〕와 파촉(巴蜀)의 요충지로 몽골 여타 친왕의 봉지가 주위를 감싸고 있었다.

백성도 다민족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장 다스리기 어려운 지역 중 하나였다. 염희헌은 쿠빌라이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취임하자마자 가난한 집을 찾아가 생활의 어려움을 알아보는 동시에 토호의 횡포를 막았다. 간악한 이들을 벌했으며 폐정을 개혁해 점차 안정되기 시작하였다. 질서를 찾기 시작하고 백성의 삶이 풍요로워지면서 쿠빌라이의 뒷걱정을 덜게 해 외적인 발전에 전력할 수 있도록 하였다.

형 몽케는 재위 기간 동안 쿠빌라이에게 남송(南宋) 방면의 전투에 온힘을 기울이도록 하였다. 쿠빌라이는 한족 지역에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고 자신의 정치 세력을 결집시켜 미래에 중원을 통치할 준비를 하였다. 그는 책사 장덕휘(張德輝)의 건의를 받아들여 몽골인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을 하였다. 자신이 직접 공자 제례를 주관하였던 것이다.

쿠빌라이는 처음에는 도대체 왜 공자에게 제를 올리는지를 알 수 없었다. 장덕휘는 쿠빌라이에게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공자는 만세 제왕의 스승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는 제왕은 모두 공자에게 제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공묘(孔廟)를 지극히 휘황찬란하며 장엄하게 축조하고 때에 맞춰 제사를 지냈습니다. 제왕들이 공자를 존중하든 안 하든 성인 본인에게는 아무런 손익이 없습니다. 그러나 제왕의 정치 수준이 높은지 낮은지를 알 수 있는 척도입니다.” 쿠빌라이가 듣고는 띠로 막힌 것 같던 마음이 한순간에 뚫리는 듯했다. 단숨에 선포한다. “지금부터 공자에 대한 제례는 폐지하거나 연기해서는 안 된다.”

   

쿠빌라이는 칭제하기 이전부터 공자 제례를 집전하였다. 이로써 자신의 제왕에 뜻이 있음을 중원에 알리는 한편 한족 지식인들에게 자신의 고심을 알리고 불만을 무마하려하였다. 그때부터 쿠빌라이의 싱크 탱크는 도광양회(韜光養晦)의 책략을 마련해 몽케의 의심을 받지 않도록 만든다.

중원 지역에 둔전제(屯田制)를 실시하면서 암중으로 자신의 세력을 넓혀 나갔다. 그러다가 몽케가 의심하기 시작하자 요추 등의 계략을 받아들여 가속을 몽케에게 보내 인질로 삼게 하고 자신도 직접 몽케를 진현하면서 몽케의 심임을 편취하였다.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는 절묘한 상책은 모두 그의 싱크 탱크가 제공한 것이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몽케가 서로군(西路軍) 전선에서 돌연사하자 몽골에는 군주가 없는 상태가 된다. 카라코룸을 지키고 있던 아릭부케가 즉위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그때 쿠빌라이는 동로군(東路軍)을 이끌고 대대적으로 남송 정벌에 나선 상태였다.

백척간두시기에 쿠빌라이의 참모 학경(郝經)은 유명한 『반사의(班師議)』를 올려 급히 남송과 화의할 것을 건의한다. 군대를 귀환시켜 아릭부케가 황제 자리를 선점할 수 없도록 하여야한다고.

쿠빌라이는 확연 대각해 군대를 배치하고 자신은 친위대를 통솔해 북상한다. 참모들의 건의에 따라 몽골인이 칸을 옹립할 때 쿠릴타이를 개최하는 관례에 따라 스스로 즉위의 예를 거행하고 천하에 자신이 이미 몽골 대칸이 됐다고 선포하였다. 이를 중국 정사에서는 원 세조라 칭한다.

   

쿠빌라이는 장장 31년을 황제의 자리에 있었다. 향년 80세, 많은 일을 한 황제였다. 그의 자질은 물론 몽골의 강인함에서 왔다. 그러면서도 유념해 둬야 할 것은 그가 영재를 중용하고 책사와 함께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영재와 더불어 정사를 논하면서 대제국의 기틀을 만들었고 번영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이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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