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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회] 향사당의 굴곡진 역사 ... 수령 견제 -> 보좌 -> 좌수의 거처로 사용

 

제주목관아에서 남쪽으로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향사당에 들어갈 기회가 생겼다. 필자가 속한 문학단체에서 주최한 시 낭송회에 참석하였다. 복원된 팔삭 지붕과 처마 그리고 마루와 천장이 퍽이나 정겨웠다. 하지만 유감도 있었다. 다음 안내의 글에서 찾아보자.

 

향사당 안내의 글

 

향사당은 제주고을의 한량들이 봄, 가을 2회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당면 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하여 논하던 곳이다. 향사당은 애초 가락천 서쪽에 지었던 것을 조선 숙종 17년 (1691년) 절제사 이우항 당시 판관 김동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짓고 향사당이라 이름하였다. 정조 21년(1797년) 방어사 유사모는 그 이름을 향사당이라 고쳐 불렀다.

 

위의 안내문에는 향사당이 3회 등장하는 데, 한자가 다른 향사당이다. 한자로 병기하는 관심과 지원이 필요한데도, 관에서 그대로 방치한다는 느낌이다. 아래의 글에서 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향사당(鄕射堂)은 봄과 가을에 사람들이 모여 향사음례(鄕射飮禮), 즉 활쏘기와 함께 주연을 베풀던 곳이다. 주연을 열어 고을의 당면 과제를 논의하거나 민심의 동향을 살피기도 했다.

 

향사당은 지방의 자치기관인 향청(鄕廳)으로, 우두머리인 좌수와 좌별감, 우별감 등 3인이 상시 근무하던 청사였다. 향사당의 사(射)는 공자가 ‘확상의 들판에서 활을 쏘아 현인을 얻는다.’라고 말한 데서 유래되었다.

 

어느 날 공자께서 산동성 곡부현 궐리 서쪽에 있는 확상이란 곳에서 활쏘기를 할 때, 제자 자로에게 활을 쏠 사람을 맞이하도록 했다. 단, 싸움에 진 장수와 나라를 망친 대부, 제 부모를 두고 남의 후계가 된 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다. 상벌을 분명히 해야 나라가 흥하는 근간이 된다는 의미로 향사당의 고귀함과 엄격함을 강 조한 것이다.

 

향사당은 원래 고려 말과 조선 초 향리의 유력인사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자치기구인 유향소(留鄕所)에서 유래한다. 벼슬에서 은퇴한 관료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향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세운 기구였다.

 

그러나 유향소에 다니는 은퇴 정치인들은 고을 수령을 능멸하거나 반대로 수령과 한 패가 되어 양민을 괴롭히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태종과 세종 시기에 유향소는 폐지와 부활이 반복되곤 했다.

 

제주 향사당은 당초 오현단 인근 가락천 서쪽에 있었으나 1691년(숙종 17년) 제주판관 김동이 찰미헌 인근으로 자리를 옮겨, 지금의 제주시 삼도2동 주민센터 맞은편에 들어섰다. 1797년(정조 21년) 유사모 제주목사는 향사당의 射를 社로 바꿔 새롭게 현판을 제액했다. 1835년(헌종 원년) 제주목사 박장복과 제주판관 김영이 새로 개축했다.

 

조선 초기 전국의 향사당은 관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설치되었으나, 후기 들어 관아 부근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제주 향사당 역시 같은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수령을 견제하던 기능에서 점차 수령을 보좌하는 역할로 변해 향청의 기능이 격하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향청의 우두머리인 좌수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건물 모양은 일자형으로 팔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조선시대 유교문화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1975년 제주도유형문화제 제6호로 지정되었다. 1835년(헌종 1년) 2월에 보수된 향사당은 1981년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되었지만, 오랜 세월 속에 부침을 거듭했다.

 

 

제주 최초의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가 이곳에서 개교했다. 1909년 10월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마르셀 라쿠루 신부는 향사당을 교사로 활용해 제주 최초의 신식 여자교육기관인 제주사립신성 여학교를 설립하였다.

 

여성들이 ‘새벽하늘을 밝히는 샛별’이 되도록 학교명을 신성(晨星)으로 지었다. 라쿠르 신부(1871-1929)는 1901년 이재수 난으로 사망한 300여 명의 천주교인을 매장할 황사평 안 장지를 홍종우 목사로부터 양도받기도 했다. 그는 학교운영을 위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한국인 수녀 2명을 초빙했다.

 

1914년 1회 졸업생 6명, 2회 6명, 3회 16명을 배출했다. 포교활동 일환으로 교육사업에 뛰어든 창립자 라크루 신부가 전주성당으로 전출되자 학교는 재정난에 봉착했다. 1916년 7월 학생 150여 명이 재학하고 있던 신성여학교는 설립 7년 만에 휴교를 하는 비운을 맞아야 했다.

 

일제는 학교건물을 강제로 빼앗아 1916년 혼간지라는 일본 절을 세워 일본인 거류 사망자들의 유골 안치소로 이용하였다.

 

광복이 되자 1회 졸업생인 최정숙을 중심으로 학교 재건을 추진 한 결과 1946년 신성여자중학원이란 이름으로 향사당에서 재 개교 했다. 향사당에 학교가 들어섰지만, 미군정은 일본인 소유의 적산 건물로 취급했다.

 

신성학원은 법정 투쟁에도 환수를 못하였으나 졸업생들과 후원회 성금으로 건물과 부지를 되찾았다. 1949년 제주신성여자초급중학교로 정식인가를 받았고, 최정숙이 교장으로 취임했다. 향사당에 있었던 신성여자학교는 1949년 총물당(삼도2동 인천문화당) 터로 옮겼고, 1979년에는 도남동으로, 2002년에 영평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문영택은?
= 4.3 유족인 부모 슬하에 부산 영도에서 태어났다. 구좌중앙초·제주제일중·제주제일고·공주사범대·충남대학교 교육대학원(프랑스어교육 전공)을 졸업했다. 고산상고(현 한국뷰티고), 제주일고, 제주중앙여고, 서귀포여고, 서귀포고, 애월고 등 교사를 역임했다. 제주도교육청, 탐라교육원, 제주시교육청 파견교사, 교육연구사, 장학사, 교육연구관, 장학관, 중문고 교감, 한림공고 교장, 우도초·중 교장, 제주도교육청 교육국장 등을 지냈다. '한수풀역사순례길' 개장을 선도 했고, 순례길 안내서를 발간·보급했다. 1997년 자유문학을 통해 수필가로 등단, 수필집 《무화과 모정》, 《탐라로 떠나는 역사문화기행》을 펴냈다. 2016년 '제주 정체성 교육에 앞장 서는 섬마을 교장선생님' 공적으로 스승의 날 홍조근정훈장을 받았다. 지난 2월 40여년 몸담았던 교직생활을 떠나 향토해설사를 준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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