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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견해인가? 강유위와 양계초의 반목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85)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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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8.03.13  08:4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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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계초(梁啓超, 1873~1929), 자는 탁여(卓如), 호는 임공(任公), 근대 개량주의 개혁자, 학자다. 거인(擧人) 출신이다. 일찍이 강유위(康有爲)와 함께 변법유신을 창도했으나 실패하자 일본으로 망명했다.

신해혁명 후 원세개(袁世凱)를 옹호해 원세개 정부의 사법총장을 지냈다. 나중에는 또 단기서(段祺瑞)와 협력해 재정총장을 맡았다. 만년에는 청화(淸華)대학 강단에 서기도 했다.

1890년 막 17세가 된 청년 거인 양계초는 포의(布衣) 강유위를 스승으로 삼아 그의 문하로 들어갔다. 강유위의 가장 출중한 학생이 됐다. 이후 그들의 운명은 함께 뒤섞여 흘러간다.

무술변법 운동 중 스승과 제자는 곳곳으로 돌아다니며 변법을 고취했다. 강연도 하고 글도 발표하면서 학회도 만들고 신문도 창간하면서, 일시에 중국 내에서 이름을 떨쳐 강양(康梁)이라 병칭됐다. 양계초는 나중에 강유위 밑에서 학생으로 지낼 때의 생활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우리들이 강선생님의 학생이 된 후 개개인이 천진난만했고 패기가 넘쳐났으며 형제처럼 지냈다. 선생님도 우리들은 친아들처럼 대해줬다. 강선생님은 그의 집안에 누대로 보관해온 장서들을 모두 내놔 도서관을 세웠다. 강선생님은 우리들을 독려하고 스스로 악기들을 제작해 악기고(樂器庫)를 세웠다."

"매일 정오가 되면 선생님은 자리를 잡고 고금학술원류를 강의했다. 대략 두세 시간 강의를 했는데 선생님이나 학생들 모두 피로도 잊고 열중했다. 우리들은 한 과 강의를 들을 때마다 환희작약하며 자신들이 무슨 새로운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했다. 수업이 끝난 후 세밀히 생각을 다듬었다. 선생님의 말씀은 여전히 우리들을 의미심장하게 만들었다. 오래면 오랠수록 늘 그득했다."

"막 날이 어두워질 무렵 선생님은 학생들을 만났다. 대부분은 서너 명이 입실해 알현했다. 어떤 때는 혼자 학생을 대면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선생님은 문답을 시작했다. 고담준론이 이어졌다. 갑에서 을까지 토론하면서 큰 학문을 이야기했다. 광대하고 정미한 곳에 다다르면 우리들 중 어려운 질의를 할 수 있는 학생들이 거의 없었다. 그때 선생님은 크게 기뻐하며 한층 더 거리낌 없이 말씀을 해주셨다. 우리들은 더더욱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국가 대사를 말하면서 민생이 도탄에 빠지고 외국의 침략을 논할 때마다 우리들은 격앙강개 하며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는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했다. 천하가 어려움에 처한 것은 필부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깨우쳐 주셨다. 경계하라,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으라, 방종하지 마라, 시시각각 채찍질하라, 항상 면려하라.”

강유위는 양계초를 계몽하고 일깨워준 사람이라 하겠다. 강유위의 이름과 그 변법 이론이 천하에 널리 전파된 것도 양계초의 감정이 풍부한 문장이 있어 가능했다. 봉건 완고파와의 투쟁 속에서 두 사람은 생사를 같이한 공동운명체였다. 스승과 제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뤘고 서로의 장점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렇게 친밀했던 사제는 끝내 절교하고 공개적으로 반목하면서 물과 불처럼 돼 버렸다. 이는 실제 근대사상 어처구니없을 만큼 기이하며 가장 희극적인 사건이라 하겠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만년의 양계초는 다른 사람들이 그와 강유위를 ‘강양(康梁)’이라 병칭하는 것을 지극히 싫어했다고 한다. 강 씨와 양 씨가 반목하게 된 내막은 과연 무엇일가? 학술계에서는 여러 가지 다른 해석을 내놓고 있다.

강유위와 양계초의 대립은 학술사상의 이견에서 비롯됐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1894년 양계초는 학술 방면에서 강유위와 이미 이견이 있었다. 양계초는 “계초는 위경고를 다듬고 있었는데 그때 스승이 터무니없다고 싫어했다. 나중에 길을 달리해 그 스승이 위서(僞書)를 인용해 신비적인 것을 가지고 공자를 얘기하기를 좋아했으나 계초는 그렇지 않았다”고 자술하고 있다.

“계초는 30살 이후 결코 ‘위경(僞經)’을 얘기하지도 않았고 ‘개제'(改制, 정치.경제 등 사회제도를 개조)는 더더욱 입에 담지도 않았다.” 양계초는 스스로 강유위의 학설과는 다르고 ‘강양(康梁)’이 일파가 아니라고 했다.

학술사상의 차이는 그리 큰 것이 아니고 정치적 갈등이 그들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무술정변 이후 양계초는 일본으로 건너가 손중산(孫中山)과 빈번히 왕래했다.

“거의 배웠던 것을 버리게 됐고 고담(高談)이 무너졌다.” “양계초는 그때부터 혁명을 제창했고 만청을 배척하고 공화(共和)를 이야기했으나 그의 스승 강유위는 절대 그렇지 않다고 생각했다.” 무술정변 후 1902년, 양계초는 강유위의 개량주의 정치 노선을 위반하는 문장을 발표하기도 했다.

   
 

양계초와 손중산이 비밀리에 연합했다는 사실을 강유위가 알게 됐다. 강 씨는 곧바로 양계초에게 급전을 보내 빠른 시일 내에 만나자고 했다. 홍콩 보황당(保皇黨)의 비밀회의에서 강 씨와 양 씨는 먼저 한구봉기(漢口蜂起)가 실패한 일을 검토했다.

그리고 서로 말을 하다가 화제가 군주입헌(君主立憲) 제도로 옮겨갔다. 갑자기 강유위는 양계초의 ‘에노시마(江之島) 결의’(1899년 7월, 강유위가 일본을 떠난 후 양계초를 주축으로 강유위 제자 12명이 일본 에노시마에서 반청(反淸)을 결의했다)를 책문하기 시작했다.

“너 그것은 제자들이 ‘혁명에 기우는’ 것이 아니더냐! 혁명, 혁명, 너는 누구의 명을 바꾸겠다는 것이냐? 만청(滿淸)의 명을 바꾼다는 것은 광서(光緖) 황제의 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더냐? 너는 광서제의 구명 대은을 잊었다는 말이냐! 네가 어찌 그런 배은망덕한 일을 저지를 수 있더란 말이냐! 네가 어찌 잊을 수 있느냐! 백일유신 때 수구당(守舊黨)이 우리를 죽이려고 호남(湖南) 거인(擧人) 증렴(曾廉)이 우리가 만청을 반대하는 대역무도한 죄를 지었으니 극형에 처해야 한다고 상소를 올리지 않았느냐. 만약 광서제가 온힘을 다해 우리를 보호하지 않았다면 우리 머리는 이미 잘렸을 것인데. 어찌 오늘이 있더란 말이냐?! 무술정변 후 나는 내 명호를 ‘갱생(更生)’이라 고쳤느니라. 내 목숨은 우리 황상이 주신 것이다! 당시 너 또한 말끝마다 황제의 은덕을 찬양하지 않았더냐. 지금 그의 명을 바꾼다니, 네가 인간이냐!”

강유위는 말하면 말할수록 화가 치밀어 몽둥이를 찾아 제 구실을 하지 못하는 제자를 훈육하려 했다. 몽둥이를 찾을 수 없고 신문을 끼우는 종이끼우개가 손에 잡히자 양계초를 향해 내던졌다. 그러면서 “네 목숨은 광서제가 주신 것이다!”며 소리쳤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강유위는 사람을 때린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때도 정말 때리려고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분명 양계초를 맞추지는 못했다. 그러나 양계초는 대경실색해 즉시 무릎을 꿇고 죄를 인정하면서 강유위에게 황제를 보위하는 노선을 계속 걸을 것이며 결코 흔들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렇게 손중산이 고심하고 노력했던 양계초의 혁명당(革命黨) 입당은 끝내 수포로 돌아가게 된다.

신해혁명(辛亥革命) 이후 청 왕조는 이미 멸망했음에도 강유위는 “제제(帝制, 군주전제 정체)로써 소강(小康)을 먼저 달성하고 제제를 이용해 청 왕실을 부흥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견지했다.

그는 군주입헌제도가 중국 상황에 가장 적합한 제도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 ‘공화국’을 만든다면 분명 가짜 공화가 될 것이라 여겼다. 원세개(袁世凱)가 총통이 된 후 여러 차례 강유위에게 정부의 요직을 맡으라고 청했지만 강유위는 끝내 나가지 않았다. 그러나 양계초는 원세계의 요청을 받아들인다.

   
 

이외에 강 씨와 양 씨의 상이한 성격이 다른 노선을 걷게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강유위는 나이가 많고 경력이 풍부해 노련했다. 반면 양계초는 젊고 경력이 짧아 격정적이었다.

특히 강 씨의 사상은 무술정변 이전에 자신만의 사상적 체계를 이루었지만 양 씨는 그렇지 못했다. 양계초는 스스로 “유동적이고 잘 변한다”고 정의하고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싸우는 것도 아끼지 않는다”고 했다.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그렇게 계속 변하면서 혁명당과 보황당 양 쪽 진영 사이를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반면 강유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늘 “나는 30세에 이미 완성을 보았다. 이후 다시는 변하지 않을 것이요 다시는 진보를 구할 필요도 없다”고 했다. 보황당임을 자임하며 끝끝내 바꾸지 않았다.

강유위와 양계초의 반목은 변혁하는 시대의 흔적이다. 복잡하게 얼키설키 얽혀 있는 정치적 원인에 따른 것이다. 두 사람이 연대하고 반목한 것은 역사적 필연일 따름일 터. 그들의 사상의 분열은 사제 사이의 반목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개량주의 내부의 반목일 따름이리라. 정치! 그것이…….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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