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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연재를 마치며 ... 가슴 속 바다에서 길어올린 물질

어머니가 편찮으시다. 요양원의 주간 보호 버스를 타러 나가다 넘어져서 다리를 크게 다치셨다. 대퇴부 골절이라니, 얼마나 아프셨을까?

 

올해 나이 95세. 올 겨울을 우리와 함께 무사히 보내게 해달라는 기도가 일상이 되었다.

 

오늘도 대문 앞에 나와서 망연자실 바다를 바라보시는 어머니. 수척해진 얼굴 위로 저물어가는 햇살이 슬그머니 내려앉는다.

 

오늘 따라 어머니의 안색이 몹시도 쓸쓸하다. “날이 볽암시냐, 어두웜시냐(밝고 있느냐, 어둡고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어머니의 음성이 파도소리에 묻혀서 사그라진다. “날 더 볽으민 이 고추, 종택이 어멍한테 갖다 주라이!” 하는 어머니 손바닥에서 붉은빛 도는 고추 대여섯 개가 시들거린다. 며칠 동안 손안에서 애지중지 주물러진 모양새다.

 

종택이 어멍은 어머니의 조카다. 갈치 잡으러 갔다가 태풍으로 사라진 남편의 시신을 한평생 가슴에다 끌어안고 살았다. 종택이 아방은 마을에서 일등 가는 인물이었다. 생김이나 배움 뿐 아니라 성격과 재주까지도.

 

세 살 된 딸과 유복자로 낳은 아들을 물질로 키우면서, 그녀는 남몰래 술을 홀짝이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답답할 때만 아주 조금씩 숨을 들이키듯이. 맨 정신으로는 하루도 더 살아갈 수 없을 만큼 망부의 한이 깊었던 탓이리라. 그러기에 아무도 그녀를 질책하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살아내는 게 다행일 만큼 가혹한 삶을 버텨내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딸과 아들을 시집 장가보내고 난 어느 날, 물에 들어가더니 도무지 나오지를 않았다. 주인 잃은 태왁이 불안스레 흔들리며 떠 있는 바다 속으로 어머니가 다급하게 숨비질해 들어갔다. 바로 그곳에, 종택이 어멍이 천연덕스레 주저앉아 있었다. 마치 남편처럼 의지했던 바다의 품에다 삶의 회한과 고통을 고스란히 내려놓은 듯. 그녀의 얼굴은 무심토록 편안했다.

 

“아이고, 조캐야!” 하고 부둥켜안고 흔들자 삼춘을 알아본 듯 엎드러졌다. 상군인 그녀가 사고사를 당하기엔 수심이 너무도 낮고 잔잔한 바다였다. 그녀의 망실이 속에는 먹다 남은 소주병이 덩그러니 남아서 해녀의 마지막 숨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도 아버지를 바다에서 여의었다. ‘돈 벌어다가 집도 짓고, 밭도 사고, 막내딸 고무신도 사온다’며 일본으로 가던 길에 풍랑으로 실종됐다. 남편의 흔적을 찾지 못한 외할머니는 빈 상여로 장례를 치러야 했다. 상여를 매고 장지로 떠나는 사람들 속에서 상주는 짝 잃은 백학처럼 소리 높여 울었다. 시신을 가슴에 묻고서 태풍만 불면 거품이 이는 바다로 나가 정신없이 흔적을 찾아 다녔다. 그러다가 망연자실 수평선을 바라보며 넋을 놓은 모습은 외돌개 마냥 혼이 나가버린 정물이었다.

 

그런 외할머니 밑에서 예닐곱 살이 된 어머니는 눈만 뜨면 바다로 달려가기를 좋아했다. 어쩌면 얼굴도 모르는 아버지, 막내딸 고무신을 사러 가다가 바다에서 사라졌다는 그 아버지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는지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스스로 물질을 익혔다. 수에기(돌고래)처럼 온 바다를 누비면서 지형지세도 익혔다.

 

상군의 제 1 조건은 바다 속을 잘 아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바다 속은 보이는 육지와 지형이 비슷하다. 그러므로 제주바다는 오름 같은 여(암반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와 엉장(움푹 파인 굴)들이 유달리 많다. 엉장은 들어가서 나오다가 머리를 부딪칠 수도 있고, 숨이 급하면 입구를 몰라 헤맬 수도 있는 구조다.

 

사람들이 위험하다는 그곳을 어머니는 겁도 없이 들락거렸다. 그런 어머니에게 상군 잠수들은 주의를 주었다. ‘그러다가 시체라도 보면 어쩔거냐’고. 어머니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면 행운이 아닌가’ 라고.

 

 

이따금 수에기를 만나면 함께 어우러져서 바다를 휘젓고 다녔다. 어른들은 ‘배알로 배알로!’ 하면서 쫓아내라는데, 어머니가 ‘배알로’ 하면 오히려 허연 배를 내보이면서 장난스레 다가왔다.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듯이 수에기들이 따라다닐 때는, ‘아버지가 수에기가 되어 찾아 왔다면...’ 하는 생각도 들었다. 어처구니없는 공상이었다.

 

바다는 그렇게 아버지의 넓은 가슴이 되어 어머니를 안아주고 키워주고 도와주었다. 바다에만 가면 외로움도, 서러움도, 고달픔도 썰물처럼 밀려났다. 아, 바다는 아버지의 집, 보고 있어도 보고 싶은 어머니의 첫사랑이었다.

 

어머니는 17세에 육지로 원정물질을 다녀왔다. 비로소 자타가 공인하는 상군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듬해 동네 총각에게 시집을 가고부터는 아버지의 바다를 결코 떠나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는 한 번 눈으로 본 것은 결코 남에게 주지 않는 기질이었다.

 

바다에만 들어가면 어디선지 모르게 힘이 나고 기운이 솟구쳤다. 소라든 전복이든, 미역이나 톳이든 간에 1등은 못해도 2등은 하였다. 하지만 물꾸럭(문어)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고기록을 세웠다. 마치 녀석들이 어머니를 따라다니는 것만 같았다. 동네 해녀들은 ‘그렇게 물꾸럭 머정이 따르는 걸 보면, 누가 꼭 도와주는 것 같다’면서, 어머니를 ‘물꾸렁 어멍’이라 불렀다.

 

바다는 아무리 생각해도 고맙고 또 고마운 은인이었다. 배롱배롱(초롱초롱)한 아이들 눈을 보면서 어떻게 살아가나 절망하고 좌절될 때, ‘죽는 것만큼 노력하면 살 수 있겠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 덕택에 2남7여를 무사히 키우고도, 집뿐만 아니라 밭도 사고 소도 살 수 있었다. 돌랭이(작은 밭)도 없는 이들에겐 물질이 천직이요 은혜였다. ‘친정보다 나은 게 물질’이라는 속담은 참으로 옳은 말이었다.

 

생각해보면 누군가의 은덕이 아니고서야 바다가 그렇게까지 잘 해줄 리 없었다. 아무리 해변마을이지만 동네 여자들이 다 물질을 하는 것은 아니어서, 해녀는 열 명 중에 한 사람밖에 되지 않는다. 더욱이 물질은 타고나야 하는 법이다.

 

옆집 사는 맹자 어멍은 바당에만 다녀오면 꿈자리가 사나워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정자 어멍은 시퍼런 바당물이 무서워서 아예 숨비지를 못하였다. 두 다리를 번쩍 하늘로 치켜 올리면서 머리를 바다 속으로 처박고는, 두 팔을 벌려서 쑤욱 쑤우욱 바다 밑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게 무엇이 무섭단 말인가?

 

요즘 들어 어머니는 ‘물질을 안했으면 동녕바치(거지)가 되었을 거’라며 중얼거린다. 그 고마움을 혹시나 잊게 될까봐 바다를 쳐다보고 또 바라보신다. 이제는 방금 한 말도 잊어버리는 나이겠건만, 바다에 대한 기억만은 또렷하시다. 지나온 삶을 반추하듯 되뇌는 저 얘기가 어쩌면 지상의 마지막 추억이 되지 않을까?

 

“저 너른 바당밭이 공짜로 펼쳐졌으니, 다 내 것인 양 휘어잡고 큰소리치며 살았다. 가끔은 풀이 죽어 있는 내게 파도가 달려와서 어깨를 두드리며 이렇게 말해주었단다. ‘친정이 없어도 이녁만씩 다 턱이 있다(저마다 몫이 있다)’고, ‘제주 여자로 났으면 한 식솔은 너끈히 책임져야 한다’고.

 

그러면 나는 어깨를 활짝 펴고서 다시 힘차게 발차기를 하였다. 너른 바당을 내 밭처럼 누비면서 자식들을 키우고 살림도 늘렸다. 바당은 부지런만 하면 거저 주는 것, 아버지처럼 너른 가슴을 열고서 ‘살암시믄 살아진다’며 있는 것 다 내주는 고마운 세상이란다!”

 

사실 이 글은 어머니에게 말을 걸어서 그 가슴 속 바다에서 길어 올린 물질에 대한 추억담이다. 60대 중반에 미국으로 이민 가서 17년을 살다 오셨으니, 그 시간을 빼면 70여년을 바다에 의지해서 살아온 셈이다.

 

미국은 순전히 아들의 요청에 의해 손자들을 돌봐주려고 가신 길이었다. 어머니 입장에서 보면 말 모르고 길 모르는 곳에서의 삶이라, 잃어버린 시간에 다름 아니다. 그 17년을 꼭 나와 함께 사시기로 약속하셨는데, 요즘 들어 어머니의 눈빛이 힘없이 흔들린다.

 

어쩌면 이 글은 우리 어머니, 김성춘 여사님의 첫사랑인 바다를 기억하고, 물질 인생을 돌아보고, 그 삶에 경의를 표하고 싶어서 쓰인 것이다. 그 과정에서 때로는 제주도의 어머니, 물질로 자식을 키우고 바다를 지켜온 해녀의 삶을 기리기 위해 쓰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주저앉으려는 자신을 억지로나마 일으켜 보기 위해 쓴 부분들도 있다.

 

두서없이 써 온 글들을 흉허물 없이 읽어주신 여러 분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인사를 전한다. 소중한 공간을 아낌없이 할애해 준 제이누리에게도 깊은 감사를 표한다. 덕택에 개인적으로 참 행복한 시간이 되었음을 고백하며, 제주 해녀의 삶이 더 아름답게 지속되기를 기도한다.

 

마지막으로 ‘해녀’라 쓰고서 ‘어머니’라 읊조려 본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고맙수다, 해녀 삼춘들. 부디 오래오래 사십서예!  <끝>

 

*** 지금까지 허정옥의 '제주해녀와 삶'을 사랑해주신 애독자님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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