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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화] 오늘날 새내기 해녀들에게 가장 먼저 전수되는 기본 이념

 

내가 몸담고 있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대학교(aSSIST)는 석·박사과정을 중심으로 기업경영을 가르치는 비즈니스스쿨이다. 핀란드에 있는 알토대학(전 헬싱키경제대학)의 MBA(경영학석사과정) 과정을 운영하면서 대학원 대학교로 발전한 학교다. 이 과정에서 생겨난 독특한 학풍이 윤리경영과 집단지성이다.

 

월요일 아침 7시에 열리는 세미나는 SIE(Seminar for Intellectual Exchange)라 불려진다. 각자의 지식이나 경험, 생각과 아이디어를 공유하기 위한 자리여서다. 교수와 직원들이 서로 돌아가면서 특정한 주제를 가장 자기답게 발표하는 시간이다.

 

2009년 12월 21일은 내 차례였다. 서울 사람들에게 가장 독특하게 소개할 수 있는 나만의 지식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서울로 가기 전, 내가 가장 새롭게 경험한 것이 한수풀해녀학교의 해녀수업이었다.

 

김종두 시인의 ‘제주여인 1’로 시작된 세미나는 서울사람들에게 매우 이색적으로 비쳐지는 눈치였다. ‘시집 왕 보난 돌랭이 호나, 살아갈 일 생각호난 귀눈이 왁왁 호여도, 우리 할망 살아온 시상 고슴에 새기명 살았수게. 조냥 호여사 밥먹은다 호다 멩심호영, 이실 때 애끼곡 젭져 놨당 어신 듯 존디멍 살라. 올레밖까지 좇아오멍 고라주던 우리 어멍의 혼시상. 아명호믄 못사느냐, 조름 붙이지 마랑 탕근도 졸곡 물질도 호멍 시집 어른 뜻받앙 살암시믄 살아진다. 아-, 탐라할망들의 삶이여, 제주 여인의 삶이여.’

 

내용인 즉, ‘시집 와서 보니 작은밭 하나, 살아갈 일 생각하니 귀눈이 캄캄하여도, 우리 할머니 살아온 세상 가슴에 새기면서 살았습니다. 절약해야 밥먹는다 부디 명심해서, 있을 때 아끼고 따로 젖혀놓았다가 없는 듯 견디면서 살아라. 골목밖까지 따라오면서 말씀해주시던 우리 어머니의 한세상, 아무려면 못살겠느냐, 엉덩이 붙이지 말고, 탕근도 잣고 물질도 하면서 시집어른 뜻 받들어 살다보면 살아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제주도 여성들의 삶이 환경과 문화가 전혀 다른 서울사람들에게는 얼마나 이국적인 풍습으로 보이겠는가?

 

제주도는 화산이 폭발하면서 형성된 한라산이 섬 전체인 곳이다. 따라서 밭이라고 해봐야 흙과 돌이 반반인 돌짝밭이 대부분인데다가 사시사철 부는 해풍과 계절풍, 태풍 등으로 토양이 척박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시집이라고 와서 보니 겨우 돌렝이 하나밖에 없다면 어떻게 그 많은 식속들을 먹여 살릴 것인가? 그래서 찾아낸 것이 바당밭이다. 바당밭은 육지의 작은밭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드넓은 일터다.

 

깨·고구마·보리·유채 대신 전복·소라·미역·톳 등이 자란다. 해녀들은 바다에서 채취한 소라 등을 물건이라 부른다. 그만큼 바다의 채취물이 육지의 농산물보다 소득이 높은 탓이다.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서인도제도를 발견했고, 제주해녀는 바다의 밭을 발견했다고 한다면 지나친 말일까? 어쨌든 제주해녀는 고려 숙종 때부터 물질을 해서 전복을 따다가 국가에 진상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훨씬 그 이전부터 물질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왜냐하면 돌, 바람, 여자가 많다고 해서 ‘삼다도’라 불리는 제주에서 여자는 그야말로 돌과 바람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돌과 바람이 많은 바다에서 이들과 맞서 싸우는 해녀들의 물질은 얼마나 초인적인가. 물건이 있는 곳이라면 바다 속의 보이지 않는 섬(여)이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육지로도 과감히 떠나는 그녀들. 배를 타고 노를 저어서 나가는 난바르 조업은 해녀들의 개척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예다.

 

이 개척의 정신은 바당밭을 제주섬에 한정시키지 않고 서해·남해·동해안을 아우르는 육지부의 해안선 일대로 확장해 들어갔다. 그리고는 국경선을 넘어서 중국, 소련, 일본으로까지 진출하기에 이르렀다. 제주해녀들은 북쪽으로는 블라디보스톡까지, 남쪽으로는 대마도까지 진출해서 물질로 소득을 올렸다. 특별한 자본이나 자산 투자 없이 그야말로 맨몸을 던져서 창출하는 수익이다. 겉보기에는 가장 육체적인 노동이지만 실제로는 아이디어와 발상의 전환이 가미된 창조적 작업이다.

 

바다 밑의 땅을 밭으로 보려면 우선은 밭에 대한 고정관념부터 탈피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바당밭에 접근하기 위한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실패와 도전의 반복이 요구된다. 이는 내가 학교에서 가르치는 경영학의 기업가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요 과정이다.

 

일제시대에는 제주해녀들의 출가물질이 절정에 이르렀다. 집을 떠난다는 측면에서는 출가이지만 먼 곳으로 가는 점에서 보아 원정물질이라고도 한다. 통계에 의하면 1932년에는 제주도의 해녀조합원 총수가 8,862명인데, 그 중 57%인 5,078명이 출가를 하였다. 보통 3월에 떠나서 8월에 돌아오는 일정이다. 칭따오의 경우는 5월에 가서 8월 추석 전에 고향에 돌아오곤 했는데, 해녀마다 평균 300원씩의 수입을 올렸다.

 

당시에는 소학교 교사 봉급이 40원이었다. 일제시대에는 해녀의 해산물 수출액이 제주도 전체 수출액의 절반을 넘기도 하였다. 뉴욕타임스는 ‘1970년대 후반까지 제주 해녀들은 채취한 해산물을 일본으로 수출해서 제주시에 집을 짓고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정도로 경제활동이 활발했다’는 내용의 기사를 송출했다.

 

한편, 제주해녀의 개척정신은 독도에서도 유명세를 떨쳤다. 울릉도에서 독도까지는 배를 타고 6∼8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바람이 세게 불어서 파도가 거친 날은 목숨을 잃을 만큼 위험한 길이다. 미역철이 되면 울릉도의 전주(錢主)가 자기 배에다 해녀들 20여명을 태워서 독도로 갔다. 막사를 짓고 공동생활을 했는데, 주로 소라와 미역을 채취했다.

 

물이 없어서 암반에 고여 있는 물을 마셨는데, 맛이 짜서 설탕을 타서 눈을 꼭 감고 들이켜야 했다. 그래도 1주일 정도 지나면 적응이 돼서 암반수 그대로를 마실 수가 있었다. 독도의 화석은 갈매기가 날면 돌이 떨어질 정도로 푸석푸석했다. 해녀들은 이 화석 바위에 자기 이름을 새겨놓기도 하였다.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그런 전사와 같은 여유를 드러낼 수 있었을까?

 

독도에는 섬을 지키는 수비대들이 10명 정도 양철지붕으로 된 숙소에서 살았다. 순경들은 해녀를 보호해 주었고, 해녀들은 파도가 세서 식량이 끊길 때 전복을 채취해서 수비대에게 주었다. 제주해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도 수비에 구멍이 생길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독도의 실효지배를 위해서 주민등록을 이전하고 실제 거주하면서 이장직을 수행하는 김성도씨의 아내도 제주해녀다.

 

이쯤이면 제주해녀의 개척정신이 얼마나 초인적인지를 짐작할 수 있으리라. 해녀들은 마치 제주 해안가를 지키고 서있는 해송처럼 스스로의 높푸른 기상으로 어디에서나 제 역할을 잃지 않고 의연함을 나타냈다. 망망대해에서도 밭을 찾아내는 창조정신은 목숨을 내던져서 보물을 캐내는 개척정신과 함께 해녀들의 물질세계를 구성하는 양대 축이 되어 왔다.

 

그리고 이 두 기둥으로 이루어진 해녀정신은 오늘날도 해녀학교의 커리큘럼을 통해 새내기 해녀들에게 가장 먼저 전수되는 해녀교육의 기본이념이 되고 있다. 출렁이는 바다로 맨몸을 던져서 소라, 전복, 해삼, 성게를 채취하는 해녀들이야 말로 ‘1만 8천 신들의 섬’이라는 제주의 창조 여신이요 개척의 전사가 아니겠는가?  <다음 편으로 이어집니다>

 

☞허정옥은?
= 서귀포시 대포동이 고향이다. 대학 진학을 위해 뭍으로 나가 부산대학교 상과대학에서 회계학을 공부하고 경영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후 미국 볼티모어시에 있는 University of Baltimore에서 MBA를 취득했다 주택은행과 동남은행에서 일하면서 부경대학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이수했고, 서귀포에 탐라대학이 생기면서 귀향, 경영학과에서 마케팅을 가르치면서 서귀포 시민대학장, 평생교육원장,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2006년부터 3년간 제주국제컨벤션센터(ICC JEJU)의 대표이사 사장과 제주컨벤션뷰로(JCVB)의 이사장 직을 수행했다. 현재는 서울과학종합대학원에서 서비스 마케팅과 컨벤션 경영을 가르치고 있다. 한수풀해녀학교 2기를 수료, 다시 시작하는 해녀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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