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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인가 죄인가? 장헌충(張獻忠)의 살인이권홍의 '중국, 중국인'(148) ... 중국사에 담긴 미스테리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  lee@jej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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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7.06.14  14: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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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 제주로 밀려오고 있다. 한마디로 러시다. 마치 '문명의 충돌' 기세로 다가오는 분위기다. 동북아 한국과 중국의 인연은 깊고도 오래다. 하지만 지금의 중국은 과거의 안목으로 종결될 인상이 아니다.

  <제이누리>가 중국 다시보기에 들어간다. 중국학자들 스스로가 진술한 저서를 정리한다. 그들이 스스로 역사 속 궁금한 것에 대해 해답을 찾아보고 정리한 책들이다. 『역사의 수수께끼』『영향 중국역사의 100사건』등이다.
  중국을 알기 위해선 역사기록도 중요하지만 신화와 전설, 속설 등을 도외시해서는 안된다. 정사에 기록된 것만 사실이라 받아들이는 것은 승자의 기록으로 진실이 묻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중화사상에 뿌리를 둔, 그렇기에 너무 과하다 싶은 순수 중국인 또는 중국학자들의 관점도 중요하다. 그래야 중국인들을 이해할 수 있다.

  중국문학, 문화사 전문가인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가 이 <중국, 중국인> 연재 작업을 맡았다. / 편집자 주

장헌충(張獻忠, 1606-1646), 자는 병오(秉吾), 연안(延安) 사람이다. 숭정(崇禎) 3년(1630)에 미지(米脂)에서 봉기해 스스로 ‘팔대왕(八大王)’이라 칭했다. 사람들은 ‘황호(黃虎)’라 불렀다. 봉기 후 봉양(鳳陽)을 점령하고 황릉을 불살랐다. 연이어 개현(開縣), 양양(襄陽)을 공격해 연전연승했다. 숭정 16년 무창(武昌)을 함락시킨 후 대서왕(大西王)이라 칭하고 이듬해 성도(成都)에서 대서(大西)국을 세워 황제에 즉위했고 연호를 대순(大順)이라 했다. 1646년 청병(淸兵)이 남하하자 서충(西充) 봉황산(鳳凰山)에서 전몰했다.

명나라 말기 농민 봉기군 수령 장헌충이 촉(蜀) 지방에서 도살을 자행한 문제는 명청(明淸) 교체기의 역사에 풀기 어려운 현안으로 남아있다. 명대 중엽부터 청대 초기, 사천성(四川省)의 인구는 대폭으로 감소했는데 그 숫자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기록에 따르면 명나라 만력(萬曆) 6년(1578) 사천성의 총 호수(戶數)는 26만여 호였고 총 인구는 310여 만 명이었다. 당시 통계 중에 누락된 것도 있고 도망친 인구도 포함한다면 그 수는 더 늘어날 것이다.

청(淸)나라 강희(康熙) 24년(1685)에 이르면 사천성 성인 남자의 총수는 18,090명 전후였다. 당시 가족 내부의 남녀 비율을 고려하고 성인 남자 가정이 5명 규모로 계산하면 사천성의 총인구는 9만여 명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인구수가 엄청난 차이를 보이는 것은 생로병사의 자연적 요소에 의해 만들어질 수 없는 것으로, 역대로 사람들은 명청 교체기 장헌충이 사천에서 무차별적으로 살육을 벌인 까닭이라 생각한다.

 
   
 

문인들의 기록에는 장헌충에 대한 저주가 가득하다. 그를 “인간세계의 살성(殺星)”으로 살인을 밥 먹듯이 자행했다고 한다. 『명사․장헌충전』에 장헌충을 “성격이 교활하고 살인을 즐겼다. 하루라도 사람을 죽이지 않으면 침울해 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사천 남녀 6만만(萬萬)을 죽였다”(‘만만萬萬’은 억億이다. 6억을 도살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고한어古漢語를 보면 십만十萬이 억億으로 만만萬萬이란 10만이라 풀이하기도 한다.)는 통계에 이르면 그저 경악할 따름이다.

『명사明史』에 명대의 인구 총수가 기록돼 있다. 만력 6년 중국의 인구수는 60,692,856명이었고 사천성 인구는 310만 명이었는데 장헌충이 ‘6억(혹 60만)’을 살육했다는 숫자가 생겨날 수 있었겠는가? 이것으로 보면 당시 통치자들이 장헌충을 악의적으로 폄훼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명말청초(明末淸初)의 사천성 인구가 대폭적으로 감소한 것은 여러 방면의 원인이 있을 수 있다. 근대 학자들은 자신들의 견해를 피력하며 논쟁을 벌였다.

노신(魯迅)은 『신량만기晨凉漫記』에서 장헌충의 살인 문제를 거론한 적이 있다. “그는 처음에는 사람을 그리 죽이지 않았다. 그가 어찌 황제가 되고 싶지 않았겠는가? 나중에 이자성(李自成)이 북경을 함락시켰다는 것과 연이어 청병이 산해관을 넘었다는 것을 듣고 자신이 몰락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살육하기 시작해 계속해서 사람들 죽이고……”라고 했다.

노신은 장헌충이 살육을 자행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장헌충이 살육을 벌인 과정을 논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견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노신의 문장은 전문가의 고증이나 평가를 거치지 않았고, 당시 정치를 빗대어 비평한 것으로 근거가 부족하다고 평했다. 그러면서도 역사학자들은 장헌충이 살육을 자행한 문제에 대해 통일된 관점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어떤 학자들은 장헌충의 봉기군은 군율이 엄격했다고 한다. 장헌충의 ‘대순’ 정권은 사천 백성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도 백성들을 제멋대로 살육할 수는 없다고 본 것이다. 장헌충은 일찍이 “지역에 해를 끼치거나 양민에게 아무렇게나 해를 끼치는” 것을 엄금했다. 예를 들어 『석궤서石匱書후집․도적열전』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13년 좌양옥(左良玉)이 태평(太平)현 마노(瑪瑙)산에서 장헌충을 대파하고 만여 수급을 베었다. 장헌충은 예기가 다해 용맹한 기병 천여 명만이 뒤따랐다. 흥귀(興歸)산으로 들어가 청구(箐口)에 숨었다. 산민에게 뇌물을 주고 소금과 쌀 등 생활용품을 파니 산민들은 평안해지고 도적(장헌충)의 편이 됐다. 장헌충은 휴식을 취하며 흩어진 병사들을 모으고 상처를 치료했다. 여러 도적들이 그에게 귀의하니 병사들이 떨쳐 일어났다.” 장헌충의 부대가 백성들과 장사를 하면서 존중하니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는 말이 된다. 그와 군중들과의 관계가 괜찮았음을 알 수 있다.

이외에도 『황서荒書』의 작가 비밀(費密)과 『촉난서략蜀難敍略』의 작자 심순위(沈荀蔚)의 기록이 있다. 그 둘은 신번(新繁,) 화양(華陽)의 벼슬아치 집안 출신으로 장헌충이 ‘대서’ 정권을 건립한 후에도 도망치지 않고 여전히 ‘숨죽인 지주(地主)’ 생활을 했다. 성도(成都) 현령 진사 오계선(吳繼善)이 여전히 대서 정권의 상서를 지내고 있었다. 1644년 그의 권속과 심순위는 함께 성도로 도망쳤다고 했다. 이렇게 본다면 명 왕조 신하와 관리 집안에 대해 장헌충이 주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장헌충이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백성들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고산정(顧山貞)의 『객전술客滇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도적(장헌충)이 재동(梓潼)으로 도망가자 관병이 그를 추격해 도적 5,6백 명을 주살하고 노약자 수백 명을 사로잡았다. 라여재(羅汝才)의 동생을 죽였다. 장헌충은 다시 관병을 공격하고 영양묘(靈陽廟)에 이르러 노약자들을 구출하고 검각(劍閣)으로 달아나 광원(廣元)을 경유해 한중(漢中)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장헌충은 관병들이 노약자 즉 약한 백성들을 붙잡아 간 것을 참지 못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구출작전을 벌였는데 백성을 살육하는 행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여러 가지 기록을 종합해 보면 장헌충이 사천성에서 사람을 죽인 일은 주로 세 부류다. 하나는 완강하게 저항하는 명나라 군대다. 『죄유록罪惟錄』에 “성이 무너지자 서왕(瑞王)의 환관과 관료들이 재난을 당했다. 순무(巡撫) 진사기(陳士奇)가 죽었다. 중경(重慶)을 도륙해 장정 만여 명을 잡아 귀와 코를 베었고 한쪽 손을 잘라 각 주현(州縣)으로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두 번째는 명나라 종실과 지방 세력가들이다. “성도(成都)가 함락되자 촉왕(蜀王)의 환관과 관료들이 재난을 당했다. 순무 용문광(龍文光)과 도부(道府)의 관리들이 모두 죽었다. 성도의 세력가들을 모두 죽이라 격문을 보냈다”는 부분에서 알 수 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청나라 조정과 결탁해 장천충과 대적한 유생들이다.

물론 또 다른 관점이 있다. 장헌충이 사천에서 사람을 죽인 것은 무턱대고 도살한 것은 아니지만 그의 통치 후기에 ‘살인’이 확대돼 응당히 받아야 할 죄가 없는 사람들, 심지어 무고한 백성들도 불지불식간에 살육당하는 부류에 포함됐다고 본다. 예를 들어 순치 2년 12월, 장헌충은 ‘특과(特科)’를 개최해 관리를 선발했는데 앞서거니 뒤서거니 선발된 진사, 거인, 공사가 많았다. 장헌충은 그중 ‘모반’을 꾀한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 한꺼번에 5000여 명을 도살했다.

성을 함락시킨 후 도살한 이른바 ‘도성(屠城)’에 대해 보자. 『촉란蜀亂』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장충헌이 성도를 공격했는데 여러 번 실패하자 함락시킨 후 “3일 동안 도륙해 빈부귀천 가릴 것 없이 모두 죽였다. 단지 군인들이 숨겨준 어린이와 부녀자들은 잠시 피할 수 있었다.” 중경을 공략한 후 “그 성을 완전히 도륙했다. 간혹 은닉시켜 생존한 자는 찾아내 그 손을 잘랐다.” 물론 이 기록이 전부 옳다고만 할 수 없고 또 과한 부분은 있다.

그렇다고 해도 장헌충이 ‘도성(屠城)’ 전략을 택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와 순응하는 자들을 완벽하게 구별할 수 없어 무고한 사람들이 살육됐을 가능성이 많다. 함부로 진압하면서 옥석을 구별하지 않은 죄과는 무거울 수밖에 없다. 그 외도 장헌충은 의(醫·의사), 승(僧·승려), 장(匠·장인), 역(役·노역자)들도 죽였다.

이것보다도 더 심각한 것은 장헌충과 이자성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농민봉기군 내부에서 참살이 벌어졌다는 점이다. 장헌충과 이자성이 충돌하자 이자성을 옹호하던 사천 사람들을 도살했다. 장헌충의 통치 후기, 그는 청나라 군대, 명나라 군대와 지주 무장 세력이 공격하는 주요 목표가 됐다. 밖으로는 강적이 점차 다가오고 내부로는 지주 무장 세력이 난을 일으키니 장헌충은 사천 사람들이 자신을 “골수에 사무치도록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자신이 직접 도살할 사람들의 등급을 매겨 실행하도록 했다. 그렇게 하면서 맹목적인 도살은 피할 수 없게 됐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장충헌의 부대가 양식이 떨어져 허기를 채우기 위해 살육을 저질렀다고 하기도 한다. 이렇든 저렇든 한번 유행하기 시작한 살육의 결과는 결국 ‘도성’이라는 잔혹한 살인이 성행해져 버렸다.

 
   
 

다른 견해도 있다. 장헌충의 살육을 자행한 사실이 있다는 것을 긍정한다. 위 관점과 다른 것은 장헌충을 단순히 사람들을 ‘살해’했다는 것만 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장헌충은 ‘도성’의 정책을 취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것은 ‘대서’ 정권이 농민 봉기인 반봉건적 성격의 봉기(의거)이기에 피할 수 없는 살육이었다고 본다. 장헌충이 사천에 입성한 후 강력한 반대 세력인 지주계급들이 심산으로 숨어든 후 무장 세력을 결집해 반항했다. 이에 장헌충의 ‘대서’ 정권은 반지주 정책을 견지하면서 무자비한 방법을 동원했다.

그리고 이미 투항했던 명나라 관리들과 지방 토호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지주 무장 세력과 합류하면서 반항 세력이 나날이 강대해지기 시작했다. 그러면 그럴수록 장헌충은 더 악랄하게 ‘도성’ 방법으로 진압했다. 한번 도살이 시작되자 멈출 수가 없게 됐다. 어찌 칼에 분별력이 있을 수 있던가? 일반 백성들도 살육의 와중으로 빠져들 수밖에.

   
▲ 이권홍 제주국제대 교수.
이상으로 볼 때 장헌충이 사천에서 백성들을 도륙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학술계에서는 아직까지도 일치된 의견을 도출해내지 못하고 있다. 어떤 이는 장헌충이 살육을 자행하지 않았다고 하고 ; 어떤 이는 확실히 백성들을 도살했다고 한다.

물론 백성들을 도살했다는 말은 그리 믿을 만한 게 아니다. 황제의 전제주의 사회를 지켜온 봉건시대에 농민봉기군은 그야말로 ‘역성(易姓)’을 넘어 ‘성인의 도’를 위배하는 것이기에 실패한 봉기의 수장을 좋게 표현하리는 만무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장헌충은 농민을 위해 봉기했기에 약자를 위한 정책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무고한 백성까지 살육의 와중으로 끌어들였을 가능성은 많다. 즉 일반 백성들까지 잘못된 죽임을 당한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일부러 살육을 자행하지는 않았을……. 천추의 죄, 공과의 분별, 누가 어떻게 정확하게 구별할 수 있을까? <다음편으로 이어집니다>

이권홍은?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나와 대만 국립정치대학교 중문학과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중국현대문학 전공으로 『선총원(沈從文) 소설연구』와 『자연의 아들(선총원 자서전)』,『한자풀이』,『제주관광 중국어회화』 등 다수의 저서·논문을 냈다. 현재 제주국제대학교 중국어문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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