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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돌 목장, 제주 축산의 기틀을 다지다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24)
양영철  |  yongchul@jeju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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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17  13:3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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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시돌 목장이 활황세이던 1980년대 방목지를 따라 젖소들이 이동하던 장면이다.
맥그린치 신부는 1954년 한림성당에 부임한지 3년차인 57년에 가축은행을 만들었다. 성당마당에서 키우기 시작한 돼지가 새끼를 낳자 이를 다시 4H 클럽 회원들에게 나누어주고, 그 돼지가 또 새끼를 낳으면 어미 돼지 한 마리당 두 마리 새끼를 다시 가져오도록 했다. 이를 다시 지역주민들에게 분양하는 중간역할을 하는 곳이 가축은행이다.

돈을 빌린 사람이 이자를 붙여 가져 오면 이를 다시 더 많은 사람에게 빌려주는 방식으로 운영했으니 은행과 흡사했다. 가축은행은 금세 규모가 불었다. 비좁은 성당마당이 수용할 수 없을 정도로 돼지, 면양, 닭 등 가축이 늘어났다. 게다가 축산 악취로 골머리를 앓게 되자 성당에서 사 둔 더 넓은 부지로 돼지와 닭을 옮겨 키웠다. 하지만 그 자리도 늘어나는 가축수를 감당하긴 어려웠다.

맥그린치 신부는 그쯤 이르자 소규모 축산이 아닌 대규모 축산을 생각했다. 자존심 강하면서도 성실한 지역 주민을 보노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는 판단이었다. 대형 목장을 꿈 꾼 것이다. 현재의 이시돌 목장을 중심으로 땅을 사기 시작하였다. 가족, 친구들의 십시일반 도움과 미국과 독일의 구호단체에서 도움을 주었다.

   
▲ 이시돌 목장 초기 돼지를 우리에 가둔 장면이다.
당시 이시돌 목장 부지는 방치된 땅이나 다름 없었다. 잡목과 돌 투성이었다. 농사는 고사하고 잡풀만 쌓여 사람의 발길조차 닿지 않는 전인미답지나 다름 없었다. “줘도 갖지 않을” 정도의 불모지였다. 그러니 이 땅을 사겠다고 하자 팔려는 주민들이 줄을 이었다. 돈만 있다면 땅 사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맥그린치 신부와 일을 같이 한 이들을 그래서 맥그린치를 외교관으로 비유했다. “기가 막히게 외부에서 돈을 잘 끌어온다”는 것이다.

불모의 땅은 맥그린치란 ‘마이더스의 손’을 만나 환골탈태했다. 우선 소와 돼지를 키워야 하기에 울타리를 쌓아야 했다. 수십만 평의 땅을 울타리로 둘러야 하는 일이다. 수백 명이 금악으로 몰려 왔다. 일자리는 커녕 곡식이 없어 굶어 지내는 일이 다반사인데 일자리와 식량을 준다고 하니 이 보다 더 좋은 조건이 어디에 있는가?

당시 직접 돌담 쌓는 일에 참여했던 홍군석(72) 노인의 이야기다. 홍 노인은 4천 평 농장에 2000마리 돼지를 키우면서 고향 금악리 양돈마을에 살고 있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다. 아직도 기운이 펄펄하다. 먼 길 왔으니 저녁이나 하자고 한림까지 내려가서 오리고기로 소주 한잔을 곁들이며 지난 일들을 소상하게 말해 주었다.

   
▲ 홍군식 노인의 자택 옆에 양돈마을을 알리는 버스정류 표지판이 설치돼 있다.
홍 노인은 금악리에서 이장, 노인 회장, 한림노인회장 등을 지낸 지역 유지다. 홍 노인은 군을 제대하고 특별히 할 일도 없어 돌담을 쌓는 일에 나섰다. 일당은 강냉이 두 되. 강냉이 두되면 다른 곡식과 섞어 식구들 일주일 식량분이던 시절이다. 일당으로 강냉이를 받고 나서면 그 강냉이를 사려고 상인들이 줄을 섰다. 강냉이는 그 시절 고급 식량으로 시장에 나가면 좋은 값을 받았기 때문이다.

홍 노인은 몸집도 좋은데다 성실하게 보였는지 나중에 감독관이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도 받아 정직원이 되었다. 정직원이 된 뒤 2년이 되자 조장이 되었는데 그 시절 봉급이 6000원이었다. 한림읍장 월급이 4500원이었느니 이시돌 직원은 그 시절 고액연봉 신분이다. 홍 노인은 1970년대 말 이시돌 목장에서 퇴임, 퇴직금으로 양돈을 시작하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지금까지 왔노라고 너털웃음을 지었다.

당시에 이 마을 초대 이장을 지낸 양옥하 노인의 생생한 기억도 들어 봤다. 1921년생으로 94세의 나이인데도 기억이 생생했다. 아직도 금악리에 살며 거뜬히 소주 한 병을 해치운다. 젊은이와도 스스럼없이 지내는 게 젊음의 비결인 것 같다.

처음 이장을 맡았던 때가 1953년으로 당시 금악리 인구는 90가구에 300명이 채 안되었다. 그런데 이시돌 목장이 진을 치면서 1959년에는 600가구가 넘었고 인구도 2000명을 넘겼다고 한다. 금악은 4.3사건의 와중에 소개령으로 주민들이 떠났던 곳이다. 먹을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주식은 고구마와 보리였는데 이마저도 없어 굶는 일이 다반사였다. 하지만 이시돌 목장이 들어서면서 달라졌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다른 지역에 비해 전기도 일찍 들어오는 등 ‘문명의 혜택’이 남달랐다.

   
▲ 양옥하 노인(좌)과 필자가 지난 10월 열린 도세기축제 현장에서 대화를 나누던 장면이다.
이시돌 목장이 조성되면서 품종이 좋은 돼지를 들여왔다. 닭도 늘어났고, 토끼, 칠면조까지 키워나갔다. 돼지는 야생방목으로도 키웠다. 현재 제주양돈농협조합을 이끄는 이창림 조합장은 유년시절 이시돌에 대한 회상을 이렇게 한다.

이창림 조합장은 1948년생이다. 12살이던 초등 5학년 시절인 1961년 얘기다. 당시에도 이시돌 목장은 각 지역학교마다 견학을 갈 정도로 유명했다. 대정읍 무릉리에서 그 먼 거리를 걸어 금악초등학교에서 하룻 밤을 자고, 이튿날에 이시돌 목장을 견학한 후에 다시 금악초등학교에서 하룻밤 자고 무릉리로 돌아가는 2박 3일 일정을 초등 5학년 시절에 다녀왔다.

이창림 조합장은 그 때 본 이시돌에 대한 기억을 생생하게 전했다. 그렇게 넓은 목장을 본 적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생전 보지 못했던 송아지 만한 돼지를 비롯하여 칠면조, 면양을 신기하게 보았다. 그게 인연이 돼 이 조합장은 나중에 수의사가 되었고, 북제주군청에서 수의계장을 지냈다. <25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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