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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철 교수가 전하는 '제주근대화의 선구자' 맥그린치 신부 (23)

이시돌 의원의 원장을 맡았던 파멜라 수녀가 과로로 2년만에 귀국길에 올랐다. 이시돌 의원을 책임질 원장은 그후론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목포 성골롬반 병원도 지원해 줄 여력이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일반 의사들 역시 쥐꼬리 봉급을 내밀자 모두 손사래를 쳤다. 하는 수 없이 임시방편으로 광주 기독병원에서 3~4년차 레지던트 수련의를 지원받아 치료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레지던트들도 고충이 있었다. 전문의 수련을 받으며 진료를 해야 하는데 이시돌 병원에는 진료과라곤 고작 일반내과 하나였다. 그들은 3~4개월 근무수련을 끝으로 이시돌 의원을 그만두고 돌아갔다.

 

나중에는 경희대 병원 내과, 서울대 소아과에서 3~4개월씩 레지던트를 보내줬다. 서울대 병원이 그나마 관심을 더 보여줬다. 그러던 중 1976년 메리 엔다 수녀가 원장으로 부임했다. 의사면허를 가진 그가 오자 이시돌 의원은 활기를 되찾았다.

 

하지만 이시돌 의원은 항상 적자에 시달렸다. 비영리 병원이기에 받아야 할 진료비의 30%만 받았다. 더욱이 가난에 쪼들린 환자에게는 무료였다. 엔다 수녀가 처방전에 ‘F’라고 적어주면 '공짜'(Free)라는 뜻이고 곧 무료였다. 이렇게 무료로 진료를 받는 환자가 무려 매일 40%나 됐다. 엔다 수녀는 심지어 끼니조차 때우지 못한 환자를 보면 먹을 것도 챙겨줬다. 당연히 병원 운영은 적자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당시 이시돌 의원의 인건비도 열악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원장 수녀와 간호사 수녀는 무일푼 자원봉사나 다름 없었다. 방사선 기사, 임상병리사, 간호보조사, 관리직원 등 모두 그 시절 월급은 제주도립병원 직원 월급의 3분의 1 수준이었다. 그나마 약품을 비롯한 의료장비·소모품의 90%를 외국 원조기관에서 보내 줘 근근히 유지할 수 있는 의료시설이었다.

 

병원의 적자는 이시돌 협회에서 충당해 주었다. 이시돌 협회 안에 성이시돌 병원부가 따로 있었고, 이시돌 협회의 이사장은 맥그린치 신부였다. 다행인 것은 당시는 이시돌 협회가 양돈은 물론 사료공장 사업에도 나서 성장을 거듭, 큰 이익을 내고 있었다. 병원 적자를 충당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엔다 원장수녀는 병원에서 낮 근무를 마치면 여러 곳을 또 찾아다녔다. 암환자 등 중증환자가 있는 집을 직접 찾는 방문진료였다. 그 때마다 늘 동행했던 장창두 현 이시돌 복지의원 과장의 증언에 따르면 엔다 원장은 정작 집을 찾아가 진료만이 아니라 가정형편을 보고 쌀이 없으며 쌀을 보내 주기도 하고, 심지어 집이 더러우면 청소까지 손수 했다. 엔다 원장은 그렇게 왕진을 다니다 새로운 눈을 떴다. 통증을 이기지 못하는 암환자들을 보면서, 그리고 이들을 돌보느라 가정경제가 엉망인 처지를 보면서 호스피스 병동을 꿈꾸기 시작했다.

 

한림 이시돌의원 2층에는 경로당이 있었다. 한때는 인근 마을의 노인들까지도 이 경로당을 찾을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그러다 마을마다 경로당이 생기면서 이시돌 의원을 찾는 노인들의 수가 급격히 줄었다. 빈 공간이 생긴 것이다. 엔다 원장은 맥그린치와 의논 끝에 이 경로당을 개조, 호스피스 병동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호스피스 병동이다. 현재 이시돌 복지의원 호스피스 병동의 모태다. 맥그린치 신부가 마지막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이 바로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이 호스피스 병동을 살리는 것이다.

 

 

이시돌 병원은 1994년부터 경영압박을 받기 시작한다. 정부가 전국민 의료보험을 시행하면서부터다. 그 이전엔 외국에서 보내오는 무료 의약품이 있었기에 그나마 진료비를 크게 낮출 수 있었다. 그러나 의료보험과 의약분업으로 외국에서 보내오는 의약품을 쓸 수가 없었다. 정부가 인정하는 약품과 그리고 정해진 의료비를 반드시 받아야 하기에 황당(?)하게도 적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아이러니였다. 다만 그동안 무료로 운영하던 양로원이 정부 정책에 따라 전액 정부가 운영비를 지원, 적자 폭을 줄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시돌 병원은 1998년 7월 1일을 기점으로 운영에 일대 변화가 나타났다. 지금까지 운영을 책임졌던 성골롬반 수녀회가 철수한 것이다. 성골롬반 수녀회 규칙에 따라 한국은 이제 선진국이 되었기 때문에 외국의료원조 대상에서 제외된 것이다. 엔다 원장수녀도 20년의 제주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했다. “송별식을 하는데 엔다 수녀가 그렇게 고마움과 보람의 뜻을 여러번 말하는 걸 처음 봤다”는 게 당시 한림읍장이던 양승문 전 도의원의 기억이다.

 

이시돌 병원엔 다시 위기가 찾아 왔다. 그러나 이시돌 병원을 도맡아서 운영하겠다는 또 다른 수녀회가 나타났다. 성가소비녀 수녀회다. 성가소비녀회는 1943년에 프랑스외방선교회 소속인 피에르 싱에(Pierre SINGER·한국명 성재덕) 신부가 서울 혜화동에서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을 보호할 목적으로 설립된 수녀회다. 성가소비녀 수녀회는 그 후 크게 성장하여 서울에 약 100병상의 성가복지병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오직 후원으로만 운영되는 병원으로서 진료와 입원까지 무료였다. 성가소비녀 수녀회는 그런 병원이 서울 아닌 다른 지역에도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계획을 세우다 이시돌병원의 사정을 듣고 맥그린치를 찾아와 위탁운영을 자원했다.

 

 

한림시가지에 있던 이시돌 복지의원은 2007년 이시돌 목장 내 1200평 부지에 13개의 병실, 25개의 병상, 1개의 임종실 등을 마련하고 30여년 한림읍 시대를 마감하고 이전했다. 현재는 말기 암 진단을 받고 수술이나 항암요법으로도 더 이상 치료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거나 통증완화와 증상조절을 필요로 하는 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호스피스 전문 병원으로 운영되고 있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말기 암환자가 가장 힘든 점이 무엇일까? 몸을 움직이는데 불편한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경제적인 부담이 가장 힘들다. 물론 가족들도 힘들다. 이시돌 복지의원은 이런 부담을 덜어주고자 무료로 운영하고 있다. 호스피스 병동에서는 생활형편이 어려워 자택에서 보호하기 어려운 암환자가 여생을 편안히 지낼 수 있도록 사망 시까지 무료로 입원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환자 면회가 자유롭게 허용되고 같이 잠도 잘 수 있도록 공간도 넓다. 이시돌 복지의원 덕분에 환자는 비용 걱정 없이 삶의 마지막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가족들은 경제․시간적으로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환자 중에는 대형 병원에서 고작 며칠에 불과하다는 시한부 판정을 받았지만 5개월이 넘게, 심지어는 1년 이상 생존하고 있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지금 이시돌 의원의 고민은 말이 아니다. 현재 원장인 오정남 스바니아 수녀는 고민을 해결하고자 동분서주하고 있다. 현재 수용인원은 28명이지만 현재 15명의 환자가 있다. 오겠다는 환자는 많은데 현재의 이시돌 복지의원의 능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받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돈도 없고 일할 직원을 찾기도 어렵다. 직원과 의사들은 봉급이 다른 지역에 비해 적고, 교통이 불편하기 때문에 근무하다가도 떠나는 일이 부지기수다.

 

병동 운영은 전액 후원금과 이시돌협회의 지원금으로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후원인은 현재 2800명. 60%이상이 제주가 아닌 뭍지방 인사들이다. 하지만 이들도 2~3년 후원하다 후원을 중단하기 일쑤다. 든든한 후원자인 이시돌 협회 역시 예전만 한 처지가 이니기에 병원의 적자를 메꾸기가 버겁다. 그럼에도 맥그린치 신부는 “말기 환자에게 무료, 그리고 최대로 편하게”라는 호스피스 병원 방침을 고수하고 있다. 국가의 도움을 받으면 말기 암 환자들이 일정기간만 입원해서 또 퇴원해야 하고, 병상도 좁아져야 하며, 돌보는 인력도 줄지만 환자는 더 많이 받아야 하는 일반 호스피스 병동과 마찬가지가 된다는 것이다.

 

“여유 있는 분들이나, 아무리 가난하게 살았더라도 숨질 때만큼은 일생에서 가장 편하게, 그리고 존엄하게 숨질 권리가 있기에 이 호스피스병동을 운영하게 됐다.”

 

맥그린치의 생각이지만 결국 우리 사회가 진작 만들어야 할 병동이었다. 그 의미에서 현재 환자가 100% 제주도민인 점을 고려하면 제주도민들이 이 병원과 병동에 대해 어느 때보다 따뜻한 관심과 격려가 필요한 때다.

 

성이시돌 복지의원 호스피스 병동에 따사로운 햇살이 찾아들 날은 언제일까? <글=양영철/ 24편으로 이어집니다>

 

 

 

맥그린치 신부는? = 1928년 남아일랜드의 레터켄에서 태어났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사제로 1954년 제주로 부임한 후 지금까지 60년간 제주근대화·경제발전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성당을 세운 뒤 수직물회사를 만들고, 4H클럽을 만들어 청년들을 교육했다. 신용협동조합을 창립, 경제적 자립의 토대를 만들었고, 양과 돼지 사육으로 시작된 성이시돌 목장은 제주축산업의 기초가 됐다. 농업기술연수원을 설립하고 우유·치즈·배합사료공장을 처음 제주에 만든 것도 그다. 그는 그 수익금으로 양로원·요양원·병원·호스피스복지원과 어린이집·유치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도왔다. 그 공로로 5·16민족상, 막사이사이상, 대한민국 석탑산업 훈장 등을 받았고 1973년 명예 제주도민이 돼 ‘임피제’라는 한국명을 쓰기 시작했다.

 

 

 

 

양영철 교수는?

 

=제주대 행정학과를 나와 서울대와 건국대에서 행정학 석·박사학위를 받았다. 학위 논문은 “내생적 지역개발에 관한 연구 .” 맥그린치 신부의 제주근대화 모델을 이론적으로 살핀 저술이다. 현재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대통령 소속 지방자치발전위원회 위원 및 제2소위 위원장을 맡고 있다. 조선말 ‘의녀’로 불리는 김만덕 기념사업회 기획총괄위원장이면서 ‘나비박사’로 알려진 석주명 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이기도 하다. 제주특별자치도 출범, 자치경찰 탄생의 이론적 산파 역을 한 게 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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